밴쿠버에서의 색다른 식사
생각해 보니 밴쿠버에서는 생각보다 맛집을 많이 가보지 못했다. 여행의 9할은 식도락인데! 커피 맛집, 맥주 맛집, 이어서 아이스크림 맛집까지 섭렵했지만 정작 식사를 위한 맛집을 찾지는 못했다. 현지 맛집은 현지인이 제일 잘 알겠지? 아침에 카페에서 말을 섞게 된 현지인 손님에게 물어봤다.
나: 밴쿠버는 뭐가 맛있어요?
Her: 내가 대단한 곳을 알고 있어요!
나: 빨리 말해줘요 0_0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나에게 기다렸다는 듯 신나서 자신의 최애 맛집을 설명해 줬다.
Her: 꼭 먹어봐야 해요. 튀김옷도 바삭하고 무슨 양념이 발라져있는데... 어쩌고저쩌고 ... 이 치킨 정말 맛있어요.
나: 어???
와, 밴쿠버에서 현지인에게 K-치킨을 역전파 당할 줄이야. 밴쿠버는 이민자들이 많은 만큼 다양한 요리를 쉽게 맛볼 수 있다.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딤섬, 동남아 요리 혹은 양념치킨보다 더 특별한 것을 원했다. 이를테면 원주민 전통음식 같은. 나에게 치킨을 추천해 준 그녀에게 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본 원주민 전통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에 대해서 물어보니 그런데도 있냐고 오히려 신기해했다. 현지인한테 먹히지 않는 향토 음식도 향토음식일까. 내 전두엽이 움찔했다. 아니야, 씨앗 호떡을 먹어보지 않은 부산 사람도 있고 홍어를 먹어보지 않은 광주 사람도 있는 거지! 그렇게 원주민 식당 '연어와 빵' (Salmon n’ Bannock)으로 마음을 정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타악기의 리듬 위로 흐느끼는 듯 황량하면서도 잔잔한 목소리의 원주민 노래가 흘렀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한 톤 낮춰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메뉴에는 소시지, 파이 등 내가 알고 있는 음식이 많았다. 하지만 음식 재료는 순록고기, 들소 고기, 멧돼지 등 생소한 것들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멧돼지 소시지를 골랐다. 멧돼지 소시지를 시킨 이유는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 때문이다. 극 중 로버트 왕은 사냥을 갔다가 사나운 멧돼지에 들이 받혀 죽는다. 그의 장례식에는 그가 죽기 직전 잡은 멧돼지 요리가 나오는데 왕비는 남편의 장례식인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맛있게 식사한다. 이쯤 되면 멧돼지가 어떤 맛인지 궁금해할 만하지 않은가. 우선 소시지라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탱글탱글한 비엔나소시지 혹은 브라트브루스트와 달리 케이싱 안에 진짜 고기가 꽉 차있어서 가공식품이란 느낌이 안 들었다. 심지어 고기의 결까지 느껴지는 소시지라 신기했다. 야생 동물의 누린내는 전혀 나지 않고 평소 먹던 소시지보다 훨씬 더 담백하고 건강한 맛이었다. 왕비는 육질 가득한 살코기를 좋아했나 보다.
두 번째 요리로는 ‘들소 로스트’가 나왔다. 육즙이 섞인 갈색 그레이비의 모습이 흡사 소고기장조림 같았다. 소고기보다 더 비싸다는 들소 고기. 소고기보다 풍미도 더 진하고 달콤하다는 들었던 바라 특등급 한우의 맛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소고기의 부드러운 마블링과 고소함을 예상했건만 들소는 생각보다 퍽퍽한 살코기였다. 말그대로 '고기 먹는 느낌'이었다. 거친 식감 때문인지 맛이 특별하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기 밑에는 야생 쌀이 깔려있었다. 쌀은 농사를 지어서 수확하는 곡식인데 반대로 야생 쌀은 한 톨 한 톨 야생에서 채집하는 열매이다. 길쭉하고 거뭇거뭇 한 야생 쌀은 사실 좀 징그러웠다. 현미 비슷하게 까칠까칠한 게 건강에는 좋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얇게 저민 훈제 야생 연어와 훈제 야생 고기가 남아있었다. 레스토랑의 상호가 '연어와 빵'이니 만큼 기대가 되는 메뉴였다. 부드러움의 대명사인 연어요리. '야생' 연어요리는 어떨까. '삭아이 (Sockeye)'라고 불리는 캐나다 연어 (홍연어)는 입안에서 보들보들 녹아내리는 마블링 가득한 살 대신 단단한 식감을 가졌다. 색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핑크빛 연어보다 훨씬 더 붉었다. 색뿐만 아니라 맛도 평소에 먹던 양식 연어보다 훨씬 더 진한 '연어 맛'이 났다. 곰이 잡아먹는 연어는 이런 맛이구나.
작은 접시에는 삼나무 잎 잼이 곁들어 담겨 나왔다. 사과잼처럼 반투명한 황금빛 색 잼에서 달달하면서도 상쾌한 '솔의 눈' 맛이 났다. 이럴 수가 이런 잼이 가능하다니. 아니, 사실 놀랄 건 없다. 한국에서도 솔잎을 재료로 쓰는데 캐나다에서 소나무의 사촌 격인 삼나무 잎을 못 먹을 건 뭐람. 솔잎에 송편도 쪄 먹고 삼겹살도 구워 먹는 것처럼 나도 삼나무잎잼을 빵과도 먹고 고기와도 먹었다. 거부할 수 없는 단짠 조합과 민트 초코같이 상쾌한 향을 함께 맛볼 수 있었다.
나쁜 꿈은 걸려내고 좋은 꿈만 전해준다는 원주민 전통 주술품 '드림 캐처'라는 이름의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하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수렵시대를 연상케 하는 원주민 레스토랑에서 나는 내 혀가 얼마나 도시의 기름진 맛에 익숙해져 있는지 놀랐다. 도시 음식이 바삭한 삼겹살 껍질, 찰진 쌀, 부드러운 마블링같이 편안한 식감으로 승부한다면 야생 요리는 재료 본래의 풍미로 승부를 보는 듯했다. 육고기는 '찐'고기 맛으로, 연어는 '찐'연어 맛으로. 거친 식감의 장벽만 극복할 수 있다면 보다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야생'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익숙하지 않은 야생의 맛을 처음부터 제대로 느끼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도 이날 이후 삭아이 연어를 먹어볼 기회가 몇 번 더 있었다. 혀가 드디어 눈을 떴는지 처음 먹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심지어 그동안 먹어왔던 연어보다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주민 식당에서 야생의 맛을 배워버렸다. 나는 이렇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