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 큰딸이 와서 오랜만에 밖에서 둘이 밥도 먹고 카페에도 갔어요. 그러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생일이어서 딸에게 뭘 해 줄 건지 물어 보았어요. 딸은 눈 아래 지방 제거를 해 줄까 생각했다더군요. 제 눈 아래에 지방이 쌓여서 볼록한데 한쪽이 두 배는 더 부풀어 있어서 신경이 쓰이거든요. 전에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딸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없애주는 시술을 해 주려고 했나 봐요. 참 예쁘지요? 엄마 말을 흘려듣지 않고 해결을 해 주려고 한 그 마음이요.
하지만 저는 다른 것을 해 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에 도보여행 붐을 일으키고, 많은 여행 에세이를 써서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가 시작한 에어비엔비를 예약해서 하룻밤 같이 지내자는 거였어요. 이른 오후에 제가 먼저 가서 체크인하고 주변 숲에서 산책도 하고 돌아보고 싶은 곳 다니다가 딸이 퇴근해 오면 같이 시간을 보낸 뒤 그곳에서 함께 자는 거예요. 다음 날엔 딸과 함께 그 숲길을 다시 산책하고, 가고 싶은 곳들을 같이 다닐 겁니다. 딸과 단 둘이 여행을 떠난 적이 없어서 추억될 일을 만들고 싶어요.
어르신, 그곳을 예약했다고 방금 딸에게서 연락이 왔거든요. 사랑하는 딸과 하룻밤 보낸다는 것에 많이 기대돼요.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집에 머물면서 작가의 서재를 엿볼 수도 있고, 다음 날 그 작가와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고 딸에게 말했는데 정말 그럴 것입니다. 딸 세대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은 세계 곳곳을 누비고 온 작가의 이야기에 자극도 받고, 작가의 섬세한 감성에 흠뻑 빠져들었답니다. 제가 예약해서 다녀올 수도 있지만 딸이 해주는 선물로 딸과 함께 다녀온다면 그 의미가 몇 배는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껏 들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제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여행으로 떠나게 했다는 그 북소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날 아침 작가가 눈을 떴을 때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북소리가 울려왔다고 해요. 아주 가냘픈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답니다. 그리고 작가는 정말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도 요즘 어디로 떠날지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있습니다. 아마 여행 작가의 집을 다녀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먼저 다녀올 것 같지만 예약은 딸이 선물로 해 준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러니 제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인지 오늘 유난히 제 말이 길어졌네요. 이번에 가져온 문장도 이 기분과 많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완벽한 날들》에 있는 메리 올리버의 문장입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27쪽
어르신, 오늘은 미세 먼지도 없고 청명하기 그지없어 제 마음도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만 가득 풀어놓고 가게 되네요. 어차피 지금 어르신은 봄맞이에 많이 바쁘실 것 같아 그냥 떠납니다. 그리고 흥분되면 다른 사람 말이 잘 안 들어온다는 것을 어르신도 알고 계시지요? 걸으면서 마음 차분히 가라앉히고, 보여드린 문장들 더 많이 음미하면서 걷고 오겠습니다.
볕이 화사하기는 해도 따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날들처럼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마음도 몸도 한 없이 가벼웠다. 누가 심한 말을 해도 얼굴 붉히지 않고 잘 흘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고,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류시화는 ‘길 위에서의 생각’이라는 시에서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라고 했다. 그 말처럼 여름에는 겨울이 그립고, 겨울에는 여름이 그립다. 며칠 동안 귤만 먹다 보면 즐겨 먹지 않던 사과마저 그립다. 집에서만 오래 지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오랜 시간 여행지에 있으면 집이 그립다. 시골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엔 도시를 그리워했고, 도시에 살고 있는 지금은 시골을 그리워한다. 이것도 결핍의 한 종류이리라.
2년도 더 넘게 마스크 쓴 채 외출하고, 2년도 더 넘도록 집에 머물렀다. 남들은 제주로도 떠나고 강원도, 남해로도 잘들 다녀오던데 혹여 감염이라도 될까 싶어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짧은 여행을 떠올리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것은 한 독자가 농촌민박 숙박권을 내게 선물해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친구사이인 세 할머니들이 한집에 살고 있는데 펀딩으로 농촌민박을 시작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펀딩에 참여한 그 독자가 리워드로 받은 숙박권을 내게 주었다. 주변에 산책하기 좋은 곳도 있고, 조용해서 글쓰기에 좋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방송에도 나왔는데 개성 강한 할머니 세 분이 서로에게 맞추어 가면서 한집에 사시는 모습은, 한 때 큰 인기를 누렸지만 현재는 싱글로서 후반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 연예인 몇 명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의 실제 모델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기대가 많이 된다.
그 여행이 ‘내 생에 다시없을 특별한 여행’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당일치기부터 하룻밤 이나 이틀 정도 머물고 올 짧은 여행은 위의 두 예처럼 무언가 특별하고 의미를 안겨줄 시간들이 될 것이다. 예약이 하나 되어 있으니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심장이 뛰고 몹시 흥분되어 있다. 내게 남다른 의미와 행복을 안겨다 줄 그 여행이 세상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떤 여행으로 진행해 나갈지 계속 아이디어를 떠 올리고 있다. 아름다움을 빚어낼 그 여행이 글로 탄생하여 누군가에게 힘을 준다면 그것은 세상에 보내는 아름다운 선물이 될 것이다.
길을 걷는 동안 지난 연말 뉴스에 등장한 한 형제 이야기도 떠올랐다. 나는 그 뉴스를 보고 한참 울었다. 감동도 그런 감동이 없었다.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 전 영상만 보았을 때는 안 좋은 상상을 했었다. CCTV 영상이라 모노톤인 데다 선명한 화질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위에서 눌러 찍힌 것이니 어린아이인지 청소년인지 구별도 잘 안 되었다. 영상에서는 패딩을 입은 남자 둘이서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경찰서 지구대 앞에 두고 서둘러 사라졌다. 그러니 그 안에 혹여 폭발물이나 안 좋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찰나의 순간에 상상했다. 험한 뉴스가 많이 나오는 요즘이라 반사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뜻밖에도 종이가방 안에는 색색의 저금통 세 개와 손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게임기 사려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씌어 있었다. 눈이 쌓이고 매서운 한파가 있던 날이었다. 그들이 출입문을 열고 사라졌을 때 뒤따라 나간 경찰들은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니는 형제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종이가방 안의 돼지저금통에서 나온 돈은 1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연말이 되면 행정복지센터 주변에 돈 박스를 두고 자취를 감추는 천사들이 뉴스에 나오곤 하는데 초등학생일 줄이야. 게임기를 사겠다고 친척이나 부모한테 받은 용돈을 쓰지 않고 둘이서 2년이나 모았다는데 어떻게 그걸 안 사고 참았을까. 어른의 2년과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2년의 시간 감각은 많이 다를 것이다. 그것도 익명으로 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형제의 사연을 보는 동안 심장이 뜨거워지고 왈칵 솟은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어른으로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었다. 나 역시 손길이 필요한 곳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어떤 목표를 가지고 긴 시간 모은 돈을 몽땅 후원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어린 형제의 저금통 기부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그 사연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니 어디선가 그 빛이 발화기를 기대한다.
언제부턴가 파릇파릇한 풀들이 참 예뻐 보인다. 목련, 벚꽃, 복숭아꽃, 조팝 등 화사한 꽃들에서 그냥 풀꽃으로, 그냥 풀꽃에서 풀들로, 내가 보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확장되고 있다. 왜 이름도 받지 못한 풀들이 아름답게 보일까?
다른 이유는 없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화사한 꽃이든 풀이든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는 그들의 의지는 아름다움 자체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명’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인지 각별하게 인식한다. 세상에 재미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고, 막막한 벽만 느껴져 옆구리에 죽음을 끌고 다녔던 이십 대 초반의 나. 그때의 염세주의를 청산하고 ‘처음과끝’이라는 이름으로 휴대폰에 저장해 둔 남편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딸을 낳으면서 이제는 한 살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염원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굴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죽을 것만 같던 청년시절을 잘 버티어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풀들에게서 회상하는 것일까.
마음속에 생의 기쁨이 가득하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내 삶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다. 부족한 속에서도 살려고 노력했고, 어떤 대상을 보면 좋은 면을 보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보면 감동하고 그걸 닮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들과 행위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그것이 세상에 주는 선물이라면 좋겠다.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힘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나눌 수 있는 만큼 나누어 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풀 같은 모습으로, 풀 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