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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r 21. 2022

뿌리 깊은 나무는

   

나무를 키울 때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눈에 보이는 줄기가 아니라 흙 속의 뿌리란다.

-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메이븐, 149쪽          

  


한 책방 대표로부터 서점지원사업에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두 번 망설이지 않고 좋다고 했다. 내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야 하는 무게감 있는 사업이지만 이 시국에 강의할 기회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그 책방은 내 책이 나올 때마다 북토크도 하고, 다른 강의도 여러 차례 하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작년 하반기에도 심야책방 지원사업으로 4개월 동안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번 지원사업은 규모가 가장 커서 코로나로 더 어려워진 동네책방에 많은 도움이 되는 지원사업이었다. 그래서 책방과 함께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선정되지 못했다.

  

그런데 탈락된 것이 다른 한편으론 안심이었다. 7개월 동안 16차례 강의를 해야 하는데 요즘 책 읽기에 탄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에 몰입하면 거기에다 많은 에너지를 쏟는 성향 때문이다. 지금은 맥이 끊이지 않게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른 일에서도 그렇지만 현재 하고 있는 일 하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야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줄기보다 흙 속의 뿌리가 더 중요하다는 우종영 선생님의 문장에 합리화 시켰다. 내공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더 없이 시기적절하기도 해서 그 문장을 들고 상록오색길에 나섰다.




어르신 느티나무의 가지 끝들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것들은 너른 울타리를 넘어올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뿌리도 그 정도이거나 좀 더 길게 뻗어 있지 않을까? 울타리 따라 돌면서 어쩌면 내가 뿌리 위를 걷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 30년 넘게 나무를 돌본 나무 의사 우종영 선생님은 눈에 보이는 줄기보다 흙 속의 뿌리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라는 용비어천가의 한 문장을 우리들도 수도 없이 보고 들었습니다.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뇌 당했을 정도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뿌리가 깊고 넓게 뻗어야 강한 바람에도 거뜬하겠지요. 그런데 제가 어르신 나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아래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에 언덕 위에서 멋진 가지를 쫙 펼치고 서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띄었었거든요. 그 동안 뿌리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튼실한 뿌리가 있기에 어르신의 멋진 풍모가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자네가 내 뿌리에 대해 말해주니 반갑네. 우리에게 뿌리는 더 없이 중요하지. 자네들도 다리가 있어 몸을 지탱하고, 어디로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잖은가. 우리에게 뿌리는 다리일 뿐만 아니라 입이기도 하고 심장이기도 하네. 밖으로 나와 있는 몸통과 가지들을 받쳐주고, 물과 영양분을 흡수하고, 나무줄기와 나뭇가지 수분을 펌프질도 한다네. 어린 나무가 더디게 자라는 이유도 다 뿌리 때문이지. 막 틔운 싹에서 얻은 영양분을 뿌리 키우는 데에 쓴다네. 나무에 따라 몇 십 년 씩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어림잡아 5년 정도 걸리지. 그것을 유형기라고 한다네. 어린 나무들은 그렇게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을 거친 후에야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어 나가지. 거친 비바람에 견딜 수 있을 힘을 비축한 뒤에 말일세.”

  

“나무들은 어릴 때에도 어른스럽군요.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그걸 실천하니까요. 우리들은 어릴 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뿌리보다 눈에 보이는 외형을 치장하느라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이거든요. 부끄러워집니다. 저도 저의 뿌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걸어야겠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시니어 대상으로 한 그림책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50권이 넘는 그림책을 뽑아놓았지만 활동지를 못 만들고 있다. 먼저 공부를 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해 노년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나무 관련 그림책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어 나무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들도 부지런히 읽고 있다.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그것들로만 쓸 수 없기에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한쪽엔 불안한 마음이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해야 된다는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겨우 싹을 틔운 나무들은 어떻게 주변의 유혹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뿌리에만 집중할 수 있을꼬? 옆에 있는 나무가 아무리 뽐내면서 쑥쑥 자라도 눈 딱 감고 자신의 물길을 찾아 뿌리를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일까? 그런 뚝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린 나무들이 참 대견하다.




  


상록오색길을 걸은 날 저녁에 이 글을 쓰려고 했으나 그러하지 못했다. 맨발로 걸어 더 몸이 노곤한 것도 있었고, 언제부턴가 저녁 시간엔 치열하게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영화나 TV 시청 등으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 다음 날엔 다른 일 제쳐두고 꼭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하루가 더 지나서야 쓰고 있다. 그 날은 허리가 아팠다. 며칠 전 아는 동생이 요가를 해 보라고 한 말이 떠올라 유튜브를 검색했다. 첫 번째로 올라와 있는 초보 요가 동영상을 20여 분 동안 따라서 마치고 나니 다음에 시니어 요가 동영상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까지 하고 나니 아팠던 허리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바로 아침을 먹었으면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집안의 매트들을 걷어서 세탁기에 가져갔다. 통안에 넣어서 돌리고 났는데 하필 가지런하지 않은 그 주변이 신경 쓰였다. 빨래 바구니 위치를 바꾸고 먼지를 닦고 베란다 바닥을 닦았다. 그러고 나자 창문 틀의 먼지가 거슬렸다. 그리하여 창문틀을 닦고 안방 문틀까지 닦고 나니 여간 개운한 게 아니었다. 그러자 다음엔 멀리 떨어져 있는 냉장고 옆 수납장으로 마음이 달려갔다. 여기저기 쑤셔 넣은 포장끈들을 분류해 정리함에 넣어두자 기분이 아주 산뜻해졌다. 정리에도 탄력이 붙었다. 바로 옆 반려견 물건을 넣어둔 수납장 문을 열어 전부 밖으로 꺼냈다. 전부터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그제야 하게 게 된 것이다. 옷과 간식과 사료, 패드, 휴지 등을 하나하나 정리했더니 깔끔해졌다. 이젠 청소기 돌리고 안방화장실과 거실화장실 청소를 했다. 일부 책들도 위치를 바꾸어 정리했다. 그제야 늦은 식사를 하고 나니 반려견 산책시간이었다.

  

그래서 뒷산에 다녀오는 것은 물론 노트북은 아예 켜 보지도 못한 채 저녁을 맞고 말았다. 물건 정리하다가 큰딸 육아일기가 나와 한 권을 다 읽고, 결혼 전 남편에게 쓴 편지 노트도 붙잡고 읽었다. 저녁엔 브런치에 올릴 글을 다듬는데 시간을 많이 썼다. 그렇게 하루가 또 미뤄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더 없이 말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 해도 지저분하게 있는 곳들은 마음 한 구석에 쓰레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전부터 하려던 집안 정리를 했다고 그 쓰레기들이 싹 치워진 느낌이었다. 덕분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줄일 수 있었다. 요즘 허리가 종종 아프고 어깨도 안 좋다. 나는 그게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장 봐가지고 와서, (2.4킬로밖에 안 나가는)반려견을 안고 동물병원에 다녀와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너무 앉아있기 때문이다. 책 읽는 데에 탄력이 붙었다는 말은 바로 많이 앉아 있다는 말이다. 날마다 뒷산에 다닐 때는 허리 통증이 사라졌었다.

  

글을 쓰지 못한 채 하루를 또 보냈지만 진짜 중요한 뿌리가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었다. 어떤 일의 성과를 내는 것보다는 건강을 잘 챙기고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그것이다. 건강을 챙기기 위해 한 요가나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놓고 하고 싶을 만큼 흡족하게 만든 집안정리는 하루의 뿌리를 잘 내리게 했다. 그러니 어찌 그것들을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루 이틀 글이 늦어진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글 쓴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면 허리통증은 더 심해졌을 테고, 집안 정리를 하루 미뤘다면 일 년 후에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른 봄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딱 한 마디만 자라고 성장을 멈춘 소나무가 탄탄한 몸을 갖듯 너무 급하게 가려 애쓰지 말지어다. 하루는 내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뿌리이며 건강은 전체의 삶을 책임지는 뿌리이다. 하루의 뿌리를 잘 내리면 한 달이, 한 달의 뿌리를 잘 내리면 일 년이, 그것들이 쌓이면 삶의 뿌리가 단단히 내리는 법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지니.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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