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 더위, 그리고 어둠
주말 아침, 알람도 없이 갑자기 눈이 떠졌다. 평소와는 다른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서둘러 단톡방을 확인했다. 이 동네 일대는 아침 6시부터 5시까지 정전이 될 예정이었다. 며칠 전 미리 공지가 있었지만, 수많은 베트남어 사이에서 필요한 공지를 찾아 읽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단톡방을 거의 확인하지 않았고, 정전이라는 정해진 미래를 모른 채로 마음 편하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전기가 끊긴 지 몇 시간이 지나있었고, 에어컨 없는 방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서둘러 활동을 시작했다. 누워서 생각했다, 시내로 나갈까 말까.
한국에 있는 가족 단톡방에 이 사실을 알렸다. 아빠는 정전을 오랜만에 듣는다고 했다. 이어서 나갈 거면 빨리 나가는 게 더 좋다는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정전을 온몸으로 느껴보면 어떨까? 일부러 ‘노 와이파이 존’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나는 가만히 있어도 ‘노 전기 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곧 한국에 돌아간다면, 아마 하루 종일 정진이 되는 날은 없을 것이다. 물론 없어야 한다, 그것은 전시 상황일 테니. 나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했다. 무엇을 해야 하지?
냉장고에 있는 식품들이 떠올랐다. 특히 냉동고에 있는 고기와 치즈, 냉장고가 꺼지면 금방 상하지 않을지 걱정이 됐다. 우선 최대한 식재료를 소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우선순위를 정했다. 고기랑 김치를 볶아서 김치볶음밥을 해 먹자. 부엌으로 나갔다. 프라이팬을 헹구고야 알았다. 내가 인덕션 쓴다는 사실을. 평소 같았으면 인덕션이 고장 나더라도 다른 것을 이용했겠지만, 전자레인지나 커피포트 역시 오늘은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주방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접시와 조리도구 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젯밤에 삶아 둔 계란이 있었다. 이와 함께 용과와 망고를 깎았다. 피스타치오와 과자도 늘어놓았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이것들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다면 자연스럽게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틀었겠지만, 와이파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핸드폰과 노트북을 충전해 두고 자질 않았다. 노트북을 덮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는 냉기를 느끼며, 과일을 천천히 입 안에 넣었다. 손바닥 보다 작은 크기의 초록색 망고는 며칠 전 동료선생님이 사준 과일이다. 처음에는 꽃향기가 나더니, 그다음엔 미세하게 떫은맛이 났고, 씹을수록 감과 망고의 중간 정도의 맛이 났다.
음식을 다 먹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떴다. 몇 시간 만에 오른 기온이 피부로 느껴졌다. 엉덩이 밑에 땀이 고여서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더워서 깼다가, 비몽사몽한 낮을 보냈다. 한창 더울 때는 도저히 생산적이거나 명료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에 몸은 쉽게 더러워졌고,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진득하게 생각할 기운이 없어 그저 5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인덕션이 켜지면, 아까 먹으려고 했던 김치볶음밥을 먹어야지. 에어컨 아래에서 계란과 치즈를 얹은 볶음밥을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가만히 누워 시계를 쳐다봤다. 그마저도 자주 볼 수 없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꺼지고 있었으므로.
5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에어컨은 켜지지 않았다. 다시 단톡방을 켰다. 친절한 누군가가 6시에 복구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가만히 기다렸다. 뒤 이어 8시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더 이상은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이미 창 밖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서둘러 배달 앱을 켜서, 음식을 주문했다. 1층에는 평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 있었다. 음식을 가지고 집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아니 평소라면 밤이라도 느끼지 못할 초저녁 시간이었지만, 불빛이 전혀 없으므로 까만 밤이었다. 머리에 헤드랜턴을 썼다. 그리고 눈앞에 음식을 비춰가며 어둠 속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면 어떨까? 휴대폰은 결국 꺼질 것이다. 유튜브는커녕 정확한 시간도 알지 못하게 되겠지. 엘리베이터가 멈춘 고층 아파트는 사실상 감옥이나 지옥이 될 것이다. 1층 마트에서는 식료품을 팔지 못하고, 줄지은 가게들은 영업을 중단하고, 맞은편 병원에서는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겠지. 선잠을 자다 서둘러 출근을 하더라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거다. 밤다운 밤, 한 여름밤의 산책은 꿈도 못 꿀 것이다. 하루 간의 정전으로 나는 이것이 결코 상상의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24시간 내내 밝다 못해 눈이 부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그 장면이, 지구 어딘가에선 마지못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