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산책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한여름 밤의 산책을 소망하며

by 민선

산책하는 기쁨. 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튼튼한 두 다리와 걷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이 기쁨을 영영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 이 믿음이 깨진 것은 태국 치앙마이에서였다. 여유를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 여러모로 완벽한 여행지였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보행자에 대한 배려였다. 그 더운 나라에서 걷는 사람은 외국인과 거지밖에 없다는데, 나는 습관처럼 열심히 걸어 다녔다. 하지만 종종 인도가 없었고, 들개들이 나타났고, 비가 퍼부었다. 기분 좋게 시작한 산책이 이따금 공포로 끝났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불편함을 단 번에 잊고 마음 편한 산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베트남.


이번엔 관광객 가득한 치앙마이와 달리 거의 현지인들만 사는 곳에서 일 년을 보냈다. 우리 동네에는 인도가 거의 없다. 있더라도 좀만 걷다 보면 툭툭 끊기니 사실상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개들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 없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는 뜻이다. 차가 쌩쌩 달리는 사거리의 보행자 신호등은 얼마 전에 생겨났고, 가로등은 차도에만 존재한다. 큰맘 먹고 걷기를 시작하더라도, 쓰레기들이 발에 차이고 여러 장애물이 도처에 널려 있어 바짝 긴장해야 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건강한 신체와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나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내가 산책을 좋아하게 되고, 언제든지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상적 행위조차 사실은 많은 것이 갖춰져야 가능하고, 그중 산책은 난이도가 높은 활동이다. 무엇보다 도로 위에서 보행자는 약자이며, 이들에 대한 배려는 가장 마지막에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역에는 화물차가 다닐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도로가 갖춰져 있지만, 보행자를 위한 안전하고 깨끗한 인도는 값비싼 지역에 사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출장 차 떠난 시골에는 차를 위한 도로마저 없었다.


베트남은 비교적 공권력이 강하고, 이민자가 거의 없어 치안에 있어서는 안전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어떤 나에서 산책을 하기 위해서는 강도, 강간 등의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돌아보면 서울의 산책로에는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비상벨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곧장 CCTV 상황실로 연결된다는 그 버튼을 눌러본 적은 없지만, 그 존재 덕분에 깜깜한 밤에도 나는 안심하며 동네를 누빌 수 있었다. 산책자들을 위한 배려는 곳곳에 가득했다. 언제든지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치나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도로 위 작은 방해물들은 실시간으로 치워졌다. 시원한 물과 달달한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편의점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당연하지 않은 환경 덕분에 나는 산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이곳에 태어났다면, 안전한 환경에서 끝없이 걷는 기쁨은 경험하지 못했을 테고, 그 시간에 떠오른 수많은 감정과 생각 중 몇몇은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가 저문 밤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짜릿한 느낌은 알아도, 음악을 들으며 아주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마음 편히 걸어 나가는 여유로움은 몰랐을 거다. 좋아하는 사람과 동네를 빙빙 돌며 시답지 않은 대화를 깔깔 거리며 주고받던 그 한여름 밤도 없었겠지. 이번에 한국에 돌아간다면,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걸어야지. 어느 방향을 향해도 끊기지 않는 길을 따라 영영 걸어가고 싶다.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