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 자리, 무급 인턴
내 옆에 새로운 인턴이 출근했다. 그들은 깨끗한 셔츠와 단정한 바지를 입었다. 첫 출근 복장에서는 설렘과 긴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만국 공통이구나. 그러다가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그들이 신은 샌들을 보게 되었다. 맨발이 훤히 보여 웃음이 나왔다. 그의 첫 임무는 한국어 수기로 적힌 서류 발급 내역을 엑셀 파일에 옮겨 적는 것이다. 굉장히 쉬운 업무처럼 보이지만, 한 번이라도 영어 원어민이 쓴 꼬불꼬불한 필기체 글씨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나는 알파벳을 정확하게 다 아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을 때의 답답한 기분을.
이들은 내가 봉사하는 지역의 한 대학교의 한국어학과 학생들이다. 같은 과의 학생들이 매년 인턴으로 오고 있다. 밥 먹었어요? 지난해 만났던 인턴은 이 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에 돌아온 그에게 가장 쉬운 문장을 골라 물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국어학과라는데 어떻게 이 단순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지. 머지않아 나 역시 베트남 사람들이 말하는 숫자를 알아듣는데 한참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단어는 다 아는데 사람마다 다른 발음과 억양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숫자도 어려운데, 갑자기 훅 들어온 의문문은 얼마나 낯설었을까. 듣기 평가와는 다른 빠른 속도, 처음 듣는 억양. 무엇보다 모든 인사를 '밥'으로 시작하는 한국인들이 아니라면, 예상치 못한 맥락의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며칠간 ‘밥 먹었어요?’를 물었고, 그 뒤에는 ‘뭐 먹었어요?’를 물었다. 음식의 종류라는 것이 정확한 단어를 모른다면, 그저 고기나 생선, 밥이나 면 정도로 단순함으로 치환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고, 함께 아이들 선물을 사러 나가고,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언어가 아닌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경험은 정말 값진 기회다. 원어민들이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익힐 수 있을뿐더러 그 사람을 둘러싼 다양한 문화까지 함께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돈을 주지 않는 면죄부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뉴스를 통해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NGO에 오히려 내부 문제가 산재하다는 것을 종종 들어본 적이 있다. 불안한 고용성,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법의 보호 아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이곳에 출근한 베트남 인턴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직원들과 똑같이 8시부터 5시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는다. 언어와 실무를 배우는 기회를 얻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한 명의 노동자로서 비정부기구에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들의 월급은 ‘0원’이다. 단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이건 아닌데 싶었다. 한국 역시 체험형 인턴은 근로자로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긴 하지만, 아예 무급노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통근을 위한 교통비와 점심 식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는 활동비를 지급한다.
한국 노동법에 신뢰가 쌓인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대학 때만 해도 최저시급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적지 않았다. 내가 수습기자일 때만 해도, 6개월 동안 주에 6일 출근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월급도 70%만 받았다. 경찰서를 도며 취재를 하는 ‘사스마와리’ 때는 집을 가지 못했으니 사실상 24시간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라떼는 말이야’가 되어버리지만,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때 명확히 느낀 것은, 적어도 쉬는 날과 월급은 보장해 줘야 사람이 아득바득 삶을 살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는 거다.
이 억울한 마음도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생긴다. 학교에서 함께 파견된 친구들이 모두 인턴으로서 돈을 받지 못하고, 나라도 딱히 나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억울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인턴들은 자발적으로 계약 기간을 한 달 더 연장해서 무급 노동을 이어가곤 했다. 꼰대들이야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라고 하겠지만, 나는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들의 생활비는 부모에게 나올 것이고, 그들 대부분은 여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어려운 이들은 인턴 대신 생계유지를 위한 삶의 현장에 곧바로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NGO 특성상 빠듯한 사업비 내에서 인건비를 마련하기 쉽지 않고, 간단한 활동비 지급을 위해서는 온갖 증빙과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는 이들이 현지인에게 최소한의 대우도 해주지 않는 것은 어딘가 잘못됐다. 베트남 학생들은 한국어는 알아도, 한국에서는 인턴에게 얼마를 주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육 기관에서도 어떤 권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자국의 청년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거다.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도 좋지만, 억울할 기회를 알려주는 것도 우리의 역할 아닐까. 무엇에 억울할 수 있는지, 그걸 아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