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
따뜻한 봄 날씨에 몸 건강한지
며칠 전에 주민등록증 하라고 소식이 왔어.
꼭 수요일 날이어야 한 대. 기간은 이달 말이고
그러니 화요일 저녁때 와야겠어. 그리고 형이
가지고 올 것이 있어. 사진 6장 찍어 가지고 오고 재학 증명서를
가지고 와야 한 대.
그러니까 이달 말 안 화요일 저녁에 아무 때나 와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잘 계시고 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형도 열심히 공부해. 그래서 대학교 가야지. 안녕 바이발
일천구백팔십 일 년 삼월 구일 아침 7시 10분 학교 가다가 붙임.
동생 00 이가
타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형에게
중학생 동생이 쓴 편지다.
전화가 있었을 텐데 하숙하고 있어서 주인집에 전화하기가 그랬나.
형한테 편지를 쓰고 싶었나,
남편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동생은 형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정말 착한 동생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후 학생이었던 시동생은
매일 그날그날 일을 메모해 둔 수첩을 내게 보여주며
“나는 소설가가 될 거예요” 했었다.
“그리고 형수님보다 더 예쁜 색시랑 결혼할 거예요” 했었다
그러던 동생은 연애하다 먼저 아이가 생겨 동서는 만삭이 되어 드레스를 입었다.
동생이 아이 낳았다는 전화를 받은 겨울밤,
남편은 아기를 보고 와서 “ 새 새끼 같아” 했었다.
그 어린 아기를 두고 동생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어느 날 동생은 머리가 아프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두통약 먹고 감기약만 먹었다.
그러다가 병원 가는 시기를 놓치고, 중환자실에 오래 있었다.
왜 바로 병원을 안 갔는지 원망해도 소용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이 병명도 모르고 오래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시골 부모님 심정은 어땠을까.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동서 부부는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이 없었다.
병원비에 간병비에.... 현찰 나올 곳이 없으니
갓 회사 들어간 남편이 회사에서 대출을 받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남편 월급을 온전히 받아보지도 못하고
어린 아기 둘 데리고 참 고생 많았다.
결국 동생은 몇 년 고생하다 집안에 빚만 남기고 갔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 삶도 꼬이고 힘들어졌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나는 우리 가족 건강한 것만 감사하며 살았다.
그때 그 어린 조카는 지금 공무원이 되었고
우리 애들도 다 잘 자라주었다.
그러나 내 처지를 생각하면 급 우울해지려 한다.
아,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