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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Jan 05. 2021

2021년엔 마스크 없이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인류의 위기 혹은 과업이라고 불려지는 것들엔 관심이 없었다.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깨워주는 위협적인 자료들은 매년 새롭게 쏟아졌지만, 그런 건 내 인생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행을 통해 광활한 대자연을 마주할 때면 어차피 그런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마존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그 안에 작은 구석을 차지한 사람들이 화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곧 지구가 파괴될 거라 염려하는 건, 재벌들 상속세 때문에 가난해질까봐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인도에서 마스크를 쓰고 맞이한 2020년에도, 인간이 감히 지구를 파괴할 수 없을거란 생각은 변함없었다. 다만, 지구가 아닌 지구에 사는 인간이 파괴되어 버릴까 무서워졌다.


 점점 심해지는 미세먼지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매일같이 울렸던 시기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밖에서 함부러 숨이라도 들이마셨다가는 온갖 질병들에 다 걸릴 것처럼 떠들었던 날에는 오히려 그 말을 믿고는 외출을 자제하는 사람들 덕분에 한적해진 한강공원을 산책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인도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했다. 구르가온의 대기는 한국의 미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분지 지역인 구르가온은 축제 때마다 터지는 폭죽 연기 몇 달 동안 고여있을 만큼 공기가 잘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겨울에는 운전이 어려울 정도로 (때로는 항공 운도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심했다. 곳에서 함부로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노숙자들 훌륭한 난방 연료였, 매일 밤 쓰레기를 태우는 불빛들 자욱하게 비췄.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들 사이에서 새까맣게 나온 콧물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구나, 하고 말이다. 내 몸에 닿는 물과 공기 내 삶을 위협해오자, 그동안 내가 만든 쓰레기들이 인도에 와서 내 눈 앞에 널브러져 있는 것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위생관념을 자랑하는 인도에서는, 아무리 좋은 아파트라도 단지를 벗어나면 바로 거대한 쓰레기장이 펼쳐졌다. 소유 공간 외에는 무관심한 이기적인 행동으로 도시는 더럽혀졌다. 그리고 이 더러운 도시에 살아가는 고상한 인간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간단히 문제를 해결했다. 내가 마실 공기만 정화시키겠다는 일차원적인 해결 방안이다. 하지만 임시방편적이길 바랬던 마스크만 점점 고성능으로 진화할 뿐이었다.


 심각한 대기오염을 온몸으로 느끼며 남들보다 일찍 마스크를 썼던 2020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다. 코로나 시대의 마스크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졌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사회적 책임'이라표현했다. 서로 조심해서 역병의 확산을 막자는 취지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보낸 2020년이 다 가도록 우리는 코로나를 이기지 못했다. 계급과 신분, 국적, 인종 차별없이 모든 인간을 공평히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와는 달리, 마스크는 차별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별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건드릴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을 존재하게 했다. 그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노숙자. 2020년 한 해의 대부분을 보낸 네팔은 여느 후진국가들이 그러하듯 부정부패가 팽배했다. 네팔에서 수많은 부조리함을 목격했지만,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경찰 앞에서 당당히 본드부는 아이들이었다. 5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들은 노란 본드가 발린 봉지를 쓰고 시내 한복판을 배회했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명령하며 이동을 통제하는 경찰에게는 마스크 대신 본드를 뒤집어쓴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본드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는 이 사회는 당연히 그들에게 마스크를 씌울 권리도 의욕도 없었다. 결국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숙주로 퍼져나간 바이러스는 마스크를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침투했다.



 12월 중순, 네팔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상파울루로 넘어왔다. 제3세계로 분류되는 최빈국에서 벗어나 한때 경제대국이었던 브라질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기대했다. 하지만 브라질은 빈부 격차가 심한만큼 노숙자가 많다. (그동안 경험한 나라들 중 가장 노숙자가 많은 나라다) 게다가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 모두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화려한 쇼핑몰과 고층빌딩이 즐비한 파울리스타 대로에서 텐트를 치고 는 노숙자들의 모습은 브라질의 심각한 빈부격차를 확연히 보여주었다. 남자 친구는, 땅값 비싼 중심지에서 노숙자들을 내쫓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그들을 내쫓지 않는 브라질은 노숙자들에게 호의적인 나라라고 했다. 하지만 노숙자가 무서운 나에게 브라질은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다. 힘없는 그들이 나에게 해를 가한 적도, 해를 가할 수도 지만, 존재만으로도 위협적 가난한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호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난과 차별에서 오는 분노가 두렵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과거 흑인을 이 땅으로 끌고 와서 무자비하게 학대한 백인보다, 힘없이 끌려온 흑인이 더 무섭.) 이런 비겁한 마음은 나를 안전한 곳으로 가두었다. 브라질에 도착해서 가장 불편했던 점은 에어비앤비 아파트의 보안이었다. 이 집에서 3주째 살고 있지만 12자리나 되는 비밀번호는 아직도 외우지 못해 늘 주머니에 쪽지를 넣고 다닌다. 아파트 입구에서는 경비가 문을 열어줘야 지날 수 있기 때문에 경비와 소통을 하고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것도 집을 드나들 때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숙자 침범하지 못하는 아파트를 벗어 순 없었다. 간혹 외출을 하는 날이면 양옆으로 즐비한 노숙자사이 오래 걷지 못하고 스타벅스 안으로 피신했다. 비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 들어오자 그제야 안전함을 느끼고는 꽉 붙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지들이 드글대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스벅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직원이 나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명령했다. 아직 커피를 덜 마셨지만 나는 마스크를 써야 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로 5m 앞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노숙자들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지만, 나는 마스크를 썼다. 하지만 이 커피를 다 마시면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럼 바이러스가 나에게도 올 수 있고, 언젠간 비밀번호가 12자리나 되는 아파트까지 침투할 것이다. 높은 담벼락과 총을 찬 경비가 노숙자들로부터 내 가방을 지켜줄  있어도, 바이러스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코로나를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자가격리를 핑계 대며 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나에게 가족들은 스타벅스의 나라, 한국으로 빨리 돌아오라며 재촉했다. 한국은 인구 대부분이 스마트폰 사용이 익숙한 만큼 경로 추적이 쉽고 이 시국에 대처할만한 의료시스템과 경제력이 갖춰진 몇 안 되는 나라다. 게다가 개인의 자유보다 공익이 우선시되는 사회 분위기와 이와는 상반되는 개인주의 성향 (특히 1인 가구) 또한 방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 코로나 방역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박멸하지 않는 이상, 국경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봉쇄하지 않고서는 한국에서의 코로나 박멸 결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며 방역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결국엔 지구 반대편에서 득실대는 코로나가 한국까지 위협해 올 것을.


 그러니 마스크가 아무리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플라스틱을 안 쓸 것도 아니고, 저 많은 노숙자들을 내가 다 도와줄 것도 아니니까, 2021년에도 마스크를 써야 할 것이다. 한국보다 12시간 늦게, 브라질에서도 2021년 새해가 밝았다. 갤런 타인이 걸렸지만 해가 지기 전부터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새벽  시까지 이어졌다. 아파트 발코니에서 폭죽을 구경하며, 코로나로 지긋지긋했던 2020년을 떠 보내고, 다가올 2021년엔 코로나가 없어지길 기대하는 마음에 신이 났다. 건너편 건물 창가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나처럼 발코니 나와 폭죽을 구경하는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사람들과 유난스럽게 터지는 폭죽 아래에는 해가 바뀌어도 여전한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자고 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새해축하 소음이 시끄러웠는지 노숙자는 두꺼운 이불을 들고 자리를 옮겼. 자리를 옮기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몰라, 웃고 있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웃 채 굳어버린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 나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내가 있는 아파트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었던 그 짧은 인사는, (남자 친구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대면으로 주고받은 2021년 새해인사였다. 하지만 내일 아침, 새해가 밝아오고 아파트 밖을 나가면 나는 어김없이 그를 무서워할 것이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는 상반되는 이유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있다. 바로 아기들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아기들이 바이러스에 걸다면, 그 바이러스 양육자에게 전염될 것이 분명했지만, 마스크를 씌우기엔 너무 작고 여린 생명체.  더 아이들은 유치원에 입학하기도 전에 마스크를 쓰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게 다 내가 노숙자들을 피해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는 바람에 생긴 일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미래 세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니 나에게도 아직 인류애라는 게 남아 있나 보다 생각하다가, 창밖에 노숙자를 바라보며 안전한 스타벅스에 앉아있음에 안도했다. 방역을 이유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는 세상이지만,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충분히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지 않았던가. 격리된 2021년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도,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격리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연말연초, 백신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빨리 백신을 내놓으라며 난리고, 동시에 그사이 새로 생긴 변종 바이러스 확진자 카운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노숙자를 피해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2021년, 마스크를 쓰고 시작하는 두번째 새해. 어느새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마스크가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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