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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Dec 05. 2020

인도에는 '기생충'이 없다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델리행 에어인디아에 탑승했다. 기내에서 시간을 죽이려고, 에어인디아에 등록된 유일한 한국영화였던 '기생충'을 틀었다. 개봉하자마자 이슈가 된 영화지만, 아직 안본 영화였다. 에어인디아에는 명장면 중 하나인 시계방향신이 삭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랬나, 명성에 비해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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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인도에서 일했던 한인 게하는 '게스트 하우스'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감성적인 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여행자가 아니라 주재원이나 출장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처럼 수직적이고 삭막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인도 직원들도 나를 '맴'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고, 그만큼 나도 손님들을 깎듯히 대해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감정노동은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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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장은 독한 여자였다. 악착같이 살았다. 이보다 더 열심히 살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었다. 그녀의 삐쩍 마른 몸에는 살이 붙을 틈이 없었다. 항상 텐션이 높았다. 그녀는 가식적으로 웃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계산하느라 바빴다. 휴지 한 장도 아까워했다. 실제로 휴지가 너무 아까웠던 나머지, 매일 휴지 개수를 직접 다 세알렸다. 직원들이 혹시나 휴지를 남용할까봐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휴지를 아껴 쓰지 않았다. 휴지는 막 쓰는 게 휴지니까, 당연히 막썻다. 아니, 그 쪼잔한 마음에 반감이 생겨 더 열심히 썼다. 인도인들이 휴지로 똥도 닦을 지경이었다. 악순환이 계속되고, 불신이 사장을 완전히 갉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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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사장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가족들을 사업장에 끌어들여 잔인하게 갈아 넣었다. 그녀의 어머님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쩔쩔매며 납작 기었다. 식당에서 식사가 끝난 손님이 나가면, 두 손을 모으고 주차장까지 쫄래쫄래 따라가서는 한참이나 어린 사람에게 허리 숙여 배웅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손님들을 불편하게 했다. 한국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선'이 보여면 불편해한다. 괜히 아닌 척하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괜히 나쁜 사람 되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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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은 손님이 없을 때는 더 안절부절했다. 매일 적자라며, 5시간 내내 쉬지 않고 한숨을 내셨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혔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너무 심해서 잠도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당연컨데,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불면증이 가장 심한 사람이었다. 그 날 이후, 언론에 나와서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사는 사람인 것마냥, 하루에 세 시간 잔다는 사람들은 다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세시간을 자고서는 그런 얼굴일 수가 없다. 아마 하루에 세시간 자는 사람은 어떤 얼굴인지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어머님의 깊게 파인 늙고 앙상한 얼굴과 퀭한 눈동자는 마른 멸치 같았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는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했다. 죽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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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 어머니가 인도에서 마른 멸치처럼 말라 비틀어가는 동안에도, 사장은 어머니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어머님은 몸이 완전히 상해버려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되자, 그제야 한국으로 돌아갔다. 몸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나서야, 어머님은 그동안 뭘 위해서 그렇게 살았나,하는 신세 한탄하는 소리를 자주 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사는 걸 멈추지 못했다.  불안증 심했기 때문이다. 불쌍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사장보다 더 많이 미워했다. 그 후 혼자 남겨진 친척 어른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자주 앓아누우셨다. 그나마 코로나로 락다운이 걸려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똑같이 말라비틀어지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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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은 휴지 개수 세느라 바빠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하나도 계산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돈밖에 모르는 좁은 시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병들어 갔다. 그녀 어린 딸아이에게도 충분한 사랑을 쏟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아이는 말을 못하게 되었다. '다 정상인데 말만 못 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정말 모르는 걸까, 애써 모른척하고 싶은 걸까, 생각했다. 아이가 아픈 원인을 찾아보겠다고 매일 전문가를 불러서 몇 달째 아이를 관찰하고 있단다. 얼마나 무능한 전문가들인지, 아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원인을 아직도 못 찾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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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발달 장애는 9살까지가 치료 가능성이 있는 황금기란다. 그래서 그 황금기를 놓치기 전에, 아이에게 집중해보겠다고, 나와 그 친척 어른을 제외하고도 한국인 직원을 한 명 더 채용했다. 하지만 사장은 아이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에도 사업머리 굴리느라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숙박관리 어플 결제도 아까워서 객실관리하는 데에만 엑셀시트 3개와 수기 다이어리 2개를 매일 작성했을 정도니, 아이의 눈을 맞출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인도의 인건비가 저렴해도 본인이 직접 일을 하면 인건비가 공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직원들보다도 스스로를 더 혹사시키며 일했다. 그 모습이 본인 엄마와 소름끼치도록 닮았다. 사장님도 머지않아 큰 병나시겠구나, 생각했다. 이왕 가족들과 본인 건강까지 갈아 넣은 사업인만큼 돈이라도 왕창 벌었으면 좋았으련만, 이런식으로 무리하게 끌고 나가는 사업이 잘될 리도 없었다. 그녀는 욕심이 많았고, 그 욕심으로 사업을 망쳤고, 사업이 잘 안되니 더 욕심을 냈고, 그러다 결국 주변사람들 건강까지 망쳐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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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들 건강은커녕 본인 건강도 못 챙기는 사람이 직원들 건강 따위에 관심있을 리가 없었다. 노동인권 개념 자체가 없는 인도는 그녀에게 직원들을 혹사시기키에 아주 좋은 나라였다. 그녀의 직원들은 네팔이나 인도 동쪽 시골마을 마니 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주 7일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 12시간 이상 일했다. 식당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퇴근이 2시로 미뤄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 새벽 4시부터 일을 해야 했는데도, 새벽 2시에 퇴근했다. 직원들이 일을 그만두는 경우는 딱 한 가지였다. 본인이 아파서였다. 휴가를 쓰는 경우도 딱 한 가지였다. 어디선가 비슷한 일을 하는 가족이 아파서였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직원들을 착취하는 업무를 맡았고, 그런 나자신을 자주 가증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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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는 보이는 선이 존재한다. 그러니 기택(기생충 송강호)처럼 눈치 없이 선을 넘는 일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화물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야 하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있다보니, 배달직원을 화물칸에 탑승시키는 것 따위가 이슈가 된다는 게 신기 따름이었다. 직원들은 앉을 수도 없었다. 긴 이야기를 전달해야 했을 때도 직원들은 무조건 서있어야 했다. 그들이 쓰는 식기도 따로 있었다. 주로 식당에서 사용하다 이가 나간 식기들이었다. 생수도 마실 수 없도록 관리해야 했다. 사장님 말에 따르면, 얘네는 지네 물 마셔도 탈이 안나니까. 식재료도 모두 다르게 썻다. 같은 쌀문화에 속했지만 같은 쌀을 먹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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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하 손님들의 식사 시간은 제각각 다르고 야근도 잦아서 식사시간이 규칙적이지 않았다. 직원들은 언제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위해 주방에서 상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모든 손님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들의 식사시간도 무기한 연장되었다. 그래서 거의 10시가 훌쩍 넘어서 식사를 했다. 차가운 주방 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고기가 없는 단출한 식사를 맨손으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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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은 손님들에게 식사시간을 묻는 대신, 직원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선호했다. 중요한 일 하시는 높으신 분들 식사 시간까지 보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란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였다. 그 높으신 분들도 회사에서는 일개 직원일 뿐이다. 그들도 상사가 퇴근을 허락할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 오늘 회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그날 출근해봐야 안다. 언제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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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부당함이 인도에서는 당연했다. 이 땅에서 수천 년 이어 내려온 문화였다. 그 누구도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부당함을 느끼는 일도, 행여나 느꼈다고 해서 박사장(기생충 이선균) 살해하는 일도 없었다. 모처럼 카페에서 쉬고 있는데, 한국인 초등학생 둘이 수행기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인 초등학생은 카페 문 앞까지 따라온 수행기사에게 기다리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고는 빵과 음료를 주문해서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자연스럽게 학습된 행동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불편해져서 한국 사람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글어 자막 패드가 있는 노트북을 황급히 덮어버렸다. 괜히 들켜버렸다간 '어디 콩만한 게 어른한테 싸가지 없이 굴어!'하고 한마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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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외로 인도를 좋아하는 한인들도 많았다. 보이는 선만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제일 편히 살 수 있는 나라가 인도다. 그곳의 한인들은 누구나 '드라이버'와 '아야(메이드)'가 있었다. 역주행도 마다하지 않는 인도에서 외국인이 운전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집이 커서 아야 없이는 청소도 힘들었다. 게다가 월 2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누릴 수 있는 이 노동서비스를 굳이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특히 가정주부이신 사모님들이 매우 좋아했다. 집안일을 안 해도 되는 주부라니, 이보다 호화로운 생활이 어디 있겠는가. 인도에서 설거지 한 번 안하고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답답해서 다시 인도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릴 때 인도로 이민 온 아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빠 우리 집 망했어?'라고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한다더라. 회사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백인국가에서 부하직원들에게 인종차별이나 당하느니, 고분히 '예썰'을 외치는 인도 직원들을, 그들의 노동인권 따위는 고려해줄 필요도 없이, 맘껏 부리는 게 훨씬 더 편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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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날, 하루 오프를 내고 식당 문을 닫았다. 사장은 전직원들에게 무급이지만 선심쓰 듯 특별 휴가를 줬다. 그 날, 나는 한국인 직원들과 인도 식당에 들렸다. 다른 모든 직원들이 휴가를 즐기는 동안, 드라이버는 우리를 식당에 데려다주느라 혼자만 쉬지 못했다. 그게 미안했고 모처럼 특별한 날이기도 하니 식사자리에 드라이버도 초대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드라이버가 식당에 들어오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식당 직원이 드라이버를 막아 세웠다. 겨우 설득해서 같이 자리에 앉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그는 불편해 보였다. 괜히 초대했다고 후회했다. 그에게는 당연히 그래야하듯이 밖에서 대기하는 게 더 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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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에서 나는 어느 계급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혼자 외로웠다. 그래서 인도 직원들과 친해지고 싶었고, 나도 같이 놀아달라고 뇌물까지 사다바쳤다.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도 분명한 선이 존재했고, 그 선은 나도 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노동만으로도 지친 그들이 내 외로움 욕구 풀이까지 되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행위였다. 그곳에서 나는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치이는 눈치없고 무능한 중간관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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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주재원들은 어쩔수 없이 인도 노동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보다 일하는 시간이 길었다. 10시가 넘도록 퇴근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사모님은 '핀란드에 있었을 땐, 6시면 칼퇴근이었는데'라고 말하며 과로에 찌든 남편을 걱정했다. 가혹한 인도의 노동환경 덕분에, 독거노인들은 밤마다 부하 직원들을 불러놓고 법인카드를 긁어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회식문화가 사라지는 추세였지만, 인도에서는 주말에도 회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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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세계에서 브라만은 당연 손님인 주재원들이었다. 하지만 브라만이라고 다 같은 브라만이 아니다. 그 안에서도 계급은 확실하게 나눠졌다. 방글방글 웃으며 상사 비위 맞추는 직원들을 보고 있으면, 회식은 분명 근무시간의 연장이었다. 하루는 부사장이란 직위를 가진 사람이 식당에 방문했다. 그 날은 정말 살벌했다. 그의 직원이 회식시간 4시간 전부터 식당에 전화를 해서 메뉴를 주문했다. 그 후로도 30분마다 전화를 해서, 메뉴가 나오는 순서, 테이블 의자 배치, 플레이팅 방식까지 세세하게 지시했다. 회식 때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혹시라도 다음 메뉴가 늦게 나올까봐 노심초사하며 주방 앞을 서성였다. 서빙도 본인이 직접 다 했다. 좋은 머리로 수천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해서 서빙을 했다. 역시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본인이 숙주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다는  아주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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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 자주 오는 단골 브라만이 있었다. 서빙을 잘해서 임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사장은 그에게 아부를 떨었다. 그러면 브라만은 좋아했다. 손님과 한 번도 합석한 적이 없지만, 그 브라만과는 딱 한번 합석한 적이 있었다. 올해의 첫날이었다. 직원들끼리 새해 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브라만이 불쑥 찾아왔다. 하지만 싫어도 어쩔 거야, 기생충들이 어찌 감히 숙주를 내쫓겠는가. 사장님이 대표로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어주니 기분이 좋았는지, 어눌한 발음으로 이탈리아 노래도 한 곡 뽑았다. 듣기 괴로울 정도였는데 박수쳐주니 좋단다. 다들 존경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를 욕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걸 애써 모른 척하는 모습이 불쌍했다. 임원까지 갔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과 서빙으로 바쁜 삶을 살았겠는가. 당연히 친구도 없을 거고, 가족관계도 뻔하다. '아빠' 혹은 '남편'으로 불리는 atm기. 새해에도 식당이나 찾아와서 자기 대단한 사람인 걸 알아달라고 주정 부리는 외로운 인간의 삶이 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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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스트 하우스라는 특성상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회사 밖에서 넥타이를 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손님들 중에는, 기러기 아빠로 몇 년째 장기 투숙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들의 책상에는 항상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들이 한참 일을 많이 해야할 나이에 그의 아이들은 한참 자라날 나이다. 한참 자라날 아이들이 아빠와 떨어져 있으니, 아이들은 아빠가 누군지나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위해 살지만,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는 삶이 슬펐다. 가족 없이 보내는 심심한 주말에 공만 치러 다니는 꼴이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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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가족 손님들도 있었다. 대부분 집 구하기 전에 한 달 정도 머무는 경우다. 그 중 한 팀은 맞벌이 부부 가족이었는데, 이놈의 회사가 얼마나 공과 사가 확실한지, 부부가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다른 도시로 발령냈다. 아빠가 혼자서 두 아이와 함께 구르가온에 살았고, 엄마는 첸나이에서 일하고 있어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주말에만 구르가온으로 올라왔다. 하루는 그들의 둘째 아이가 학교를 못갈 정도로 많이 아팠다. 하지만 아이가 아파도 엄마는 올 수 없었고, 아빠는 그날도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 했다. 나는 아이가 신경 쓰여 자주 상태를 살폈다.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책상 앞에 붙어있는 아이 엄마의 편지로 눈을 돌렸다. 한참 잔소리가 이어지더니,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로 끝나는 편지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깼다는 연락을 받고,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00아, 일어났어?'하고 묻자, 아이는 내가 제 엄마인 줄 알고는, 어리광 피우는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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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보이는 선과 한국의 보이지 않는 선이 모두 명확하게 존재했다. 그 선들은 감정을 통제했다. 감정이 통제된 인간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다. 그래서 그 선은 인간을 외롭게 했다. 하지만 외로움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래서 그 감정은 항상 선을 넘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기생충이 미국에서 큰 상을 받아 다시 한번 이슈가 되었다. 하여튼 미국 놈들 영화보는 안목 더럽게 구리다. 이러니 당연히 할리우드가 발리우드에 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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