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든 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든 Nov 30. 2019

기도

백구 잡문집

기도



  사람들은 그 능력을 안목이나 심미안이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능력 말이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스스로 알아보는 능력이 떨어진다. 믿을만한 사람이 예쁘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한다. 부럽고 부끄러우나 별다른 방도가 없다. 나는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므로 차라리 믿을만한 안목을 가진 자의 심미안을 따르고 만다.


물론 나도 아름다움에 관해 떠들 줄은 안다. 남의 것에 한해서 말이다. 멀리 있는 남의 것은 잘 보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내 것은 못 본다. 미(美)에 관해 나는 '원시(遠視)형 인간'인 것이다. 근시, 원시 할 때의 그 원시 말이다.




이제 막 고추에 털이 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구가 같이 교회에 가자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 너는 신앙이 없는데." 내가 놀리듯 말했다. "신이 있거든." 친구는 꽤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 반응에 조금 놀란 나는 "신?"하고 되물었다. 친구는 더욱 단호하게 덧붙였다. "응, 그 교회에는 여신이 있다."


그는 예배 내내 피아노 반주를 하는 여자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친구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그가 꽤 귀엽고 처량해보였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도 실눈을 뜨고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도 실눈을 뜨고 그녀를 훔쳐보는 친구를 훔쳐보았다.


그 신앙 없는 신앙생활을 6개월 넘게 지속했다. 우리 셋은 알고 보니 동갑이었고 꽤 친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친구는 그 아이에게 두세 번 정도 고백했고 두세 번 정도 차였다고 했다. 그가 나를 보더니 대뜸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아무 말 못하고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너도 걔 좋아해서 교회 나오는 거 아니냐고." 순간 아득해졌다.


그 말은 이상한 주문 같았다.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할 수 없었으나 내 눈이 점점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기도 내내 실눈을 뜨고 그녀를 훔쳐보게 만들었으며, 관심도 없는 찬양팀에 들어가 그녀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만들었다. 서투른 내 손 위에 능숙한 그녀의 손이 포개지자 나는 또 아득해졌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여신은 존재했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세 번의 고백과 두세 번의 거절을 감수해야 했다. 2012년 겨울, 우리는 수능을 치렀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기숙학원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예배 시간, 나는 그녀에게 10cm 1집 앨범을 주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사랑을 고백했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사랑을 그녀가 받았다.


이제껏 그녀의 지인이 나를 좋아해왔으므로 승낙할 수 없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녀와 그녀의 지인을 떠올렸다. 못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의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내 고백을 받아 주었을까. 오히려 그녀의 친구가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나에게 관심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내게 곤란한 벌을 내리셨다. 막상 그녀와 연애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아직 키스도 못 해봤는데 나는 곧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그녀는 왜 내 고백을 받아 주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내 마음에 추한 작은따옴표가 계속해서 못 박혔다. 그녀는 왜 '하찮은' 내 고백을 받아 주었는가? 그녀는 왜 '그녀보다 못한' 나를 사랑하는가? 혹시 그녀는 나를 아름답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착각 속에서 벗어나면 지금의 수락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 따옴표들은 몹쓸 주문이었다. 어쩌면 예쁜 것은 내 곁에 있지 않아서 예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은 '내 것'이 되면, 그렇게 착각하면 도대체가 아리송해져서 사랑이 식는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내 곁에 있을 정도면, 나 같이 별로인 인간 옆에 있어 줄 정도면, 어쩌면 너도 딱 그 정도이지 않을까 하는, 못된 억측을 독 풀 듯 확 풀어버리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용인으로 떠나야 했다. "네 눈에 씌인 콩깍지가 벗겨지면 더 이상 지금처럼 사랑하지는 못할 거야." 습관처럼 상처 주는 날들이 많아졌다. 기도는 통하지 않고, 신에 대한 원망만 늘어갔다. 그렇게 나의 여신을 두 손으로 꽉 쥐어서 천천히 질식시키고 있었다.


"보라색."


무슨 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나는 보라색이라고 답했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재수해." 내가 말했고, "매일 편지할게." 그녀가 답했다. 편지지는 때때로 분홍이거나 아이보리색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랑의 동의어였다. 



애인은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재수생이 되었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친구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예쁜 애가 왜 너 같은 애한테 매일같이 편지를 써 주냐고 물었다. 나 역시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학원에서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매일 한 통씩 나에게 보라색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재수생에게 연애는 사치이며 불효라는 말이 여러 입을 거쳐 들려왔다. 그녀의 마음을 욕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성적은 마음만큼 잘 오르지 않았고 나는 점점 야위어갔다.


애인은 매번 나에 대한 염원과 기도로 편지를 끝맺었다. 섣부른 걱정도, 안일한 위로도, 기만하는 충고도 없이 늘 담담한 내용이었다. 꾹꾹 눌러쓴 애인의 글씨체에는 내 모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답장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 나에게 온 것이었으나, 늘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편지가 담긴 우편이 도착하면 어쩐지 ‘이걸 읽을 자격이 없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불쌍했다. 괜히 그 편지를 뜯어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2013년 겨울, 일 년이 조금 넘는 재수 생활이 끝났으나 우리는 계속 장거리 연애를 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답장에 재능이 없었고, 연락도 먼저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애인은 처음으로 서운해 했다. 나는 혼자 우두커니 기숙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애인의 울음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재수생일 땐 공부해야 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면 난 이 사랑을 계속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내가 있는 층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 꺼내는 듯한 말로 이제, 그만, 끝내자고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내가 있던 층을 지나쳐 더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더 사랑한 쪽이 먼저 문을 닫았다. 나는 어쩌면 그 결말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에게는 다시 모종의 거리감이 생겼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러니까 그녀의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영양제를 먹거나 소주를 마시면 예외 없이 변기에다 대고 구토를 했다. 동그란 변기물에 비친 내가 너무 더러웠다.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와 내가 다시금 각자의 연애를 시작할 무렵, 우리가 서로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아득한 먼 미래처럼 여겨졌다. 그녀에게 선물 받은 버스커 버스커 2집의 2번 트랙을 자주 들었다. 있을 때 잘할 걸, 하고 후회하는 치졸한 남자의 애절한 러브송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내가 가엾고 영원히 죽이고 싶었다.




쓸 걸, 하고 못 쓴 그 답장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까. 


애인아,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사랑을 담아둘 자리가 없다.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또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혐오하고 말지. 이 지극히 재미없는 아포리즘을 얻으려고 네게 상처 준 것은 아닐 텐데……. 후에 만약 생의 화두를 묻는 질문을 받게 되면, 자기애와 자기혐오라고 말할 것 같다. 그 두 가지가 다냐고 다시 물으면, 아마 이렇게 답하겠지. 두 가지처럼 보였습니까. 저는 한 가지를 말한 건데요. 


기도는 두 손이 모여 한 손이 되는 것임을, 나도 모르지는 않은데 말이야.  <끝>



백구

인스타그램 @baek9oo

트위터 @baek9oo

네이버 메일 paradoxbox@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아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