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회생활 첫 번째 상사는 잠깐 발 담갔던 출판사의 팀장 A와 팀원 B이다. 지금 와 그 두 사람을 떠올려 본다면,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게 ‘인생은 실전이다, 인마’라며 사회생활의 쓴맛을 알려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교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던 가을, 나는 여느 대학생처럼 ‘취직’이 큰 고민거리였다. 소설 쓰는 게 취미였던 나는 막연히 출판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왜 다들 경력직을 뽑는 것인지. 변변한 스펙이 없었던 나는 취직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러자 ‘대학 졸업 = 경제적 독립’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대학생활 종료라 할 수 있는 겨울 방학 시작과 함께 여러 출판사에 말 그대로 이력서를 투척했다. 역시 어설픈 시도였는지 들어가고 싶어 했던 출판사에서 줄줄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불안함과 무기력함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에 뜬 낯선 전화번호는 ‘혹시?’ 하는 생각으로 가슴 두근거리게 했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하는 나의 말에 핸드폰 너머에서 ‘안녕하세요, XX출판사입니다. 지야 씨 맞으신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력서를 투척했던 수많은 출판사 중 하나였는데, 전화가 온 곳은 처음이라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내가 맞다 대답했다. 그러자 ‘저희 내일 오후에 면접이에요. 주소가 대구로 되어 있는데, 내일 오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왔다. 그 출판사는 경기도에 있었다. 이때 알아 봤어야 했는데. 만약 지금 이런 전화를 받는다면 ‘뭐 이런 경우가 있어?’하며 걸러냈을 수도 있지만, 그땐 그저 나를 면접에 불러주었다는 것만으로 고마워서 냉큼 ‘갈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잡힌 면접 일정에 나는 서둘러 나가 면접용 옷과 신발을 사고 기차표를 끊었다. 가슴 떨린 면접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끝났다. 그리고 대구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땐 정말 너무나 기뻤다.
경기도에 있는 작은 장르문학 출판사에서 내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로맨스팀에 배정받았다. 그 팀엔 면접 때 보았던 팀장 A와 팀원 B가 있었다. 팀장 A와 팀원 B는 내게 그다지 살가운 편이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다지 살가운 편은 아니어서 문제없었다. 게다가 이미 둘 사이가 매우 친밀해 보여서 내가 낄 수 있는 틈을 보기 어려웠다. 업무적인 때 외에는 둘과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팀의 신입 직원들과는 친분을 쌓고 있었고, 오히려 약간 거리감이 있는 편이 일 하는 데 편할 것 같아서 약간 소원한 우리 팀과의 관계에 크게 신경 쓰지 앉았다. 뭐, 시간이 가면 자연스레 익숙해지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회생활 햇병아리였던 나는 팀원들과의 관계보다 팀장 A와 팀원 B가 시키는 일을 어떻게 하면 잘 해낼 수 있는지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다 일이 생겼다.
일을 시작한 지 2주 조금 지났을 무렵, 나는 신간 도서 정보를 한글 파일로 작성하여 교보문고, 알라딘, YES24 등의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팀원 B에게 ISBN 번호를 받아 문서에 옮겨 적고 도서명, 저자명, 줄거리 등을 있는 그대로 타이핑하면 되는 일이라 큰 문제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 팀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신간으로 나갈 예정인 도서의 ISBN이 이미 다른 도서에 적용되어 있단 내용이었다. 그리고 신간의 ISBN으로 잘못 나간 도서는 내가 한글 파일로 작성하여 전달한 도서였다. 그때부터 긴장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팀원 B가 나를 찾아와 채근하기 시작했다.
팀원 B는 나에게 와서 ‘얼른 맞는 거로 적어서 보내고 전화해요’라고만 했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디에 전화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건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팀원 B에게 다시 묻자니 덜컥 겁이 났다. 일단은 제대로 된 ISBN을 먼저 찾아 수정하자는 생각에 팀원 B가 보내줬던 도서별 ISBN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 도서의 ISBN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싶던 찰나, 팀원 B가 내게 보내준 그 도서 정보 한글 파일이 보였다.
사실 팀원 B는 애초에 잘못된 ISBN을 적어 한글 파일로 내게 보내주었던 거다. 보통은 비어 있는 ISBN 자리에 잘못된 ISBN이 버젓이 적혀 있었다. 나는 어련히 그 번호가 맞겠구나 생각하고 다른 공란만 채워 그대로 보냈던 것이고. 나는 팀원 B에게 ‘이 책 ISBN 따로 받은 건 없고 보내주신 한글 파일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하고 말했다. 내 말에 팀원 B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자신의 컴퓨터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곧 메신저로 다른 ISBN을 보내준 뒤 내 자리로 걸어왔다. ‘내가 잘못 준 건 맞는데, 책이랑 비교해서 맞는지는 지야 씨가 확인했어야죠.’라고 말한 뒤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이 맞았다. 그래서 ‘네’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덜컥 서러움이 몰려왔다. 게다가 일이 벌어지는 동안 팀장 A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소원했던 팀원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 이 사람들은 나를 전혀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막막해졌다.
물을 마시러 간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한쪽 구석에 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마음을 좀 추스르고 나오니 메신저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옆 팀의 팀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지야 씨,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별일 아니에요. 서점 번호 목록이 있는데, 파일 제대로 보낸 다음에 그쪽으로 전화해서 ISBN 번호가 잘못되었으니 수정해 달라고만 하시면 돼요.’ 그 메시지를 보자 다시 울컥했다.
내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팀장 A에게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이었던 것 같은데 다른 팀 팀장이 보내주다니. 어쩐지 팀장 A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내 잘못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회사 생활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