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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Nov 01. 2019

사과와 용서를 배웁니다

_ 여행 17일째, 크라쿠프 1

#1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Wrocław główny”

첩첩 안개 너머 도시의 심장마냥 꺼지지 않던 네온사인은 그러니까 ‘브로츠와프 중앙역’. 위로 체코와 독일과 아래로 과거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로 떠날 기차는 물론이거니와, 오스트리아 등으로 뻗어가는 분주한 역의 이름표였다.

도시는 오래 전 브라티슬라프, 브로티슬라, 브레슬라우, 프레슬라브, 브레슬라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졌다. 평지가 90퍼센트인 폴란드가 외침이 많았던 걸 떠올려 보면, 보헤미아 왕국령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국령이었다 프로이센령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다시 폴란드령이 되어 브로츠와프로 불리게 된 이 도시 사람들도 다사다난한 삶이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조식 후 자전거를 빌려 어제보다 좀 더 큼직하게 동심원을 그리기로 했다. 그런데 호텔을 나서자마자 브레이크를 잡기 힘들 만큼 손 곱아드는 냉기와 선뜻 페달을 밟아 달리기엔 여전한 안개에 어영부영 두 발이 되었다 네 발이 되곤 했다. 쿵,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맙소사, ‘익명의 보행자’들이었다.

장을 보고, 타이어를 갈다, 혹은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을 떠올려 나섰을 각각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식인과 노동자, 남녀노소 구분 없이 언제 꺼질지 모를 불안한 땅에서 삶을 지탱했던 사람들. 폴란드 공산 정권 하에서 부지불식간 사라진 사람들을 기리는 동상이랬는데, 지금도 진행 중인 익명의 삶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전거를 돌리기엔 크라쿠프행 기차 시간이 한참 멀어 대성당 섬으로 이어 달렸다. 발틱해에서 빈과 베니스 등으로 호박을 운송했다는 앰버 로드, 그 일부였던 피아스코비 다리를 어제도 지났건만 단풍처럼 빨간 줄 미처 몰랐다. 파란색 툼스키 다리만 찾느라 놓친 게 많았다.

이제 샌드섬 한두 성당을 지나고 자물쇠 철겅철겅 매달린 툼스키 다리를 건너 익숙한 길로 달렸더니 어제 사내를 찾아 헤맸던 성 요한 대성당 앞이었다. 비질하던 수도사를 방해할까 봐 내려 걷자니 어느 벽면, 폭격에 성당의 두 첨탑마저 잘려나간 1945년 이 거리의 참혹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PRZEBACZAMY I PROSIMY O PRZEBACZANIE’ 

되짚어 대성당 섬을 돌아 나오던 길, 이곳 대주교를 지낸 블레스와프 코미넥 추기경의 동상 발치에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고'란 주기도문쓰여져 있었다. 폴란드를 폐허로 만든 독일을 용서하겠다니, 훗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독일의 과거를 참회하고 원수지간이었던 두 나라가 손을 맞잡을 수 있던 것도 몇 음절에 응집된 이 우주적 용서 때문이랬지만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됐다. 그리고 다시 페달을 밟았을 때, 정말 용서하기 쉽지 않았을 일이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 부끄러운 날로 다가가는 것 같아 그만 브레이크를 잡았다.



#2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중학교 1학년, 학급회의 시간이었다. 제 앞가림도 서툴던 나이, 어쩌다 불우이웃 돕기가 안건으로 올랐을까. 동네 현수막을 읊은 건지 교내 유행처럼 번지던 선행 운동을 따랐던 건지 이유야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결석 잦던 반 친구 S가 불우이웃으로 낙점된 결과만큼은 또렷하다.

점심 도시락을 싸오기는커녕 때마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그 친구를 돕겠다며 쌈짓돈을 모으는 동안, 이 친구가 보통내기 소녀가 아니라는 제보가 잇달았다. S네 집에는 4차원으로 드나드는 통로가 있다는 둥, 그녀가 그리로 들락날락하는 신묘함을 지녔다는 둥, 그곳에 잠깐 다니러 오가는 사이 하루 이틀이 지나는 바람에 학교생활이 어렵다는 둥, 그 또래 아이들이 퍼뜨릴 수 있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얼추 큰돈이 모여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던 S를 찾아간 건 토요일 오후였다. 마침 같은 동네 친구를 앞장세워 찾아간 S네는 시내에서 한참 먼 마을, 거기서도 동네 살 만한 집들을 다 지나 굳이 찾지 않으면 누가 올까 싶을 산허리께 자리하고 있었다. 대문이랄 것도 없이 곧장 부엌문, 문을 밀치자 먼지 뽀얀 기름 풍로 옆으로 부러진 성냥이 너저분했고 바짝 말라 비틀린 도마와 뭉툭한 칼 등 변변한 가재도구 하나 발견된 바 없어 어떻게 먹고 사나 싶을 즈음 방문이 열렸다.

 “안녕, 언니 학교 친구들이야.”

뭐, 그런 인사였겠다. S의 동생들을 비집고 스위치를 켰으나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아 침침한 방엔 과자였던지 라면이었던지 암튼 쓸데없던 빈 봉지들과 두 아이 외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급히 두 조로 나뉘어, 한 조는 살림살이를 사러 가고 나머지 한 조는 그곳에 남아 S의 동생을 돌보며 어수선한 집안을 정돈하기로 했다. 시장에 가는 동안 S네 엄마가 동네 사람들한테 빚을 진 후 도망갔다는 얘기를 그 동네 사는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빠도, 돌볼 친척도 아무 없다는 건 세간살이로 알아챘다.


“Hurry up!”

해군사관학교 교수라던 아빠를 따라 미국에 1년 정도 살다 온 녀석은 퍼뜩하면 영어를 썼다. 동네 제일 멀고 높은 S네 오르느라 진땀 빼고 새 살림 요란하게 덜그럭거렸을 텐데, 남은 조 아이들이 하도 성화를 부려 한숨 돌리지 못한 채 방으로 등 떠밀렸다. 공금으로 뭔가를 사먹어 켕겼던 우리 조 아이들이 문간방에서 기역자로 꺾인 방에 들어섰을 때, 매서운 눈매의 신령 그림이 떡하니 맞아주었다.

S 엄마는 무속인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던 동네 친구도 붉은 제단에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꼬박꼬박 주일 예배를 다니던 영어 잘 쓰는 녀석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되레 엄마가 달아났다니 쓸데없어진 물건일랑 치우자 나섰다. 나는 그때까지 이도 저도 아니었지만 괴기스러운 제단 쪽으로 손도 대기 싫거니와, 주인 없는 집을 함부로 건드리기 마뜩찮아 그 녀석과 옥신각신했다.

방 청소가 재개됐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쉽사리 붉은 천이며 벽면의 것들에 다가서지 못했다. 집어내기 편리한 물건 몇 가지와 부적 같은 종이 들이 끌려나왔다 누군가에 의해 다시 들어가고, 또 잡혀 나왔다 누군가에 의해 구제되길 번복했다. 진작 쏠려나온 쓰레기와 함께 집 앞 공터 작은 무덤이 생기자, 잔뜩 겁 먹고 쳐다보던  S네 두 어린 동생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해가 갸웃하니 노을은 참 예뻤는데…. 잊고 있던 S가 출현하면서 산허리께 집에 고성이 오가고 치우기 전보다 더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잠깐이나마 바깥 나들이했던 잡동사니들은 다시 집안으로 거둬들여졌고 작은 봉분은 금세 해체됐다. 하루가 피곤했던 아이들은 나 몰라라 집으로 돌아가쟀고, 그날 기억은 화상의 흔적처럼 떠올릴 때마다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브로츠와프 호텔 근처, 아름다운 한철을 위해 오래도록 준비해온 공원에서 한숨이 나왔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노랗고 빨갛게 혹은 여직 파래서 더욱 알록달록 가을 든 공원, 이처럼 다름을 품는다면 우리 삶도 꽤 괜찮을 텐데. 신념이 다르고 생활수준이 다르고 종교가, 민족이,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다툼이 많구나.

돌이켜보면, 공개적으로 이웃돕기를 행세했던 것부터 잘못이었다. 불우 이웃으로 지목하는 순간부터 S는 남다른 아이가 되는 걸 분별치 못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돕는다 우쭐했던 잠시잠깐이 지나고 S네 가정사가 연일 학교 친구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와중, 줄곧 결석하던 S의 종적은 묘연해졌다.

S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린 친구들을 용서하고 스스로 평안해졌을까. 이곳을 떠날 기차 시간은 임박했는데, 사과와 용서의 시간은 다시 미뤄지고 말았다.       



#3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500년 이상 폴란드 수도였던 크라쿠프 역사 플랫폼은 번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니 까르푸 주차장이었고, 지하로 내려가니 시내 나서는 통로가 갈래갈래 많기도 했다.

“여기요!”

머리를 묶어 얼굴이 좀 큼지막해 보이는 청년 사장이었다. 그는 선뜻 내 캐리어를 당겨 트렁크에 실었고, 공원을 지나고 역사에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에 멈춰 섰다. 오, 교통 한 번 끝내주는 숙소구만.

물론 좋아하긴 일렀다. 대문이 열리고 한창 보수공사 중인 건물의 철골을 타고 넘어 시멘트가루에 그의 발자국이, 뒤이어 내 발자국이 났다. 계단을 올라 숙소 현관문을 열자, 이번에는 퀴퀴한 냄새가 비위를 건드렸다. 거실 소파에는 언제 빨았나 미심쩍은 붉은 천이 씌어져 있었고, 방문을 열자 이케아 이층침대 뒤로 닫히다 만 캐비닛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쑤셔 박은 베갯잇이며 이불들이었다.

 

“바빠서 얼른 설명 드릴게요.”

숙박비도 받지 않고 서두는 청년 사장은 바르샤바로 떠났다 이튿날 돌아온댔다. 한식 아침상을 기대하고 한인 민박을 찾았던 나로서는 난데없었다. 게다가 방문 열쇠도 고장 난 휑뎅그렁한 숙소에서 소방관 아저씨와 단 둘이 묵어야 한댔다. 기차표를 끊어놨다니 길게 붙잡지도 못했다.

꽁무니 빠지게 청년 사장이 떠난 후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면대 수도꼭지가 제멋대로 돌아가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왔다. 세탁기도 고장나 있었다. 옷이나 갈아입자 방에 들어섰을 땐 사람 키만큼 갸름한 유리창 너머 시멘트를 바르던 인부가 씨익 웃고 있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런 된장, 된장, 된장. 엉망진창 숙소에서 도망치듯 거리로 나서자, 이번엔 가을비가 앞을 가로막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우산을 가지러 들어가고픈 마음도 일지 않아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작정 걸었다. 아까 청년 사장이 선택한 길과 다른, 그러니까 크라쿠프 기차역 남쪽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였다. 그 길이 구시가지로 곧장 연결된다는 건 청년 사장이 아닌 구글 내비게이션이 알려 줬다.

이젠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바르바칸 아래 성벽 북문인 플로리안 게이트를 통과해, 바벨성으로 향하던 왕의 대관식 행렬이 지나갔다는 플로리안스카를 걸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광활하다는 크라쿠프 구시가지 중앙광장을 냅다 가로질러 도보 20분 남짓 바벨성에 다다를 때까지, 머릿속 온통 숙소 생각뿐이었다.

타타르족이 이 도시를 침략했을 때 나팔을 불다 화살에 맞아 숨졌다는 파수꾼을 기려, 성 마리아성당 높은 곳에서 정시마다 연주된다는 ‘성모의 새벽’을 듣는 게 무슨 의미람. 할로윈 복장의 호객꾼을 피했고, 이 도시를 부유하게 만든 비엘리치카 소금광산과 아우슈비츠 나치 강제 수용소로 떠나는 현지 투어 예약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걷고 걸으며 그 숙소에 머물까 떠날까,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거듭되는 동안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바벨성 근처, 떠나던 청년 사장을 붙들어 유일하게 안내받은 로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오래된 골롱카 맛집이라니 고민 없이 주문했다. 이 호텔 저 호텔 데이터는 쌓여갔지만 마땅한 숙소를 찾기도, 당일 부킹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골롱카는 무지 짰다.

“불행이 닥쳐온 이 순간 내가 ‘신이시여,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는 것은, 불행보다 여섯 배는 더 많았던 행복의 순간에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배의 필체를 본 적은 없지만, 프라하에서 건네받은 책에서 떨어진 것이니 분명 그녀의 오래된 메모였다. 1968년, US 오픈 테니스 대회 사상 첫 흑인 우승자인 아서 애시가 은퇴 후 병상에서 남긴 말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한인 마트를 털어간다며 프라하 민박 사장이 부러워하던 해외 주재원 아내로 살아가기 전, 가난과 인종 차별에 저항했던 스포츠맨의 말을 새겨야 할 사연이 그녀에게도 있었구나.


비는 그쳤고, 수런대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바벨성 붉은 성벽을 따라 올랐다. 슬라브인으로선 처음으로 교황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 그가 크라쿠프 대주교 때 미사를 집전했다는 바벨 대성당이 거기 있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많은 유대인을 구했고, 공산 정권 시절 폴란드를 처음 방문한 교황으로서 자유화에 큰 힘을 보탰다 했다. S가 떠난 해 즈음부터 모으기 시작했던 크리스마스 씰 앨범에 그의 방한 기념우표도 있었던 듯한데, 결혼 후 친정집이 이사하면서 그 앨범이 쓰레기로 버려졌는지 남의 손을 탔는지 잘 모르겠다. 그곳 어떤 구경거리보다 좋았던 편편한 언덕을 어슬렁 걸어 족히 1시간이 지났을 때, 언덕을 지나는 쌀쌀맞은 바람에게선지 시원스레 흐르는 비스와강에게선지 배려받지 못해 화가 난 마음이 씻겨나갔다.

숙소로 들 때 맞은편 현관문이 열렸다. 나흘을 머문다는 일본인이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가르쳐 달랬다. 쯧쯧, 바르샤바로 급히 떠난 청년 사장이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투숙객이었다. 내 우려와 달리, 밤늦게 자코파네에서 돌아온 소방관은 불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목례를 나누고 거실의 불을 끈 후 각자의 침실로 들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잠자는 시간이 다르고, 무엇보다 나와 같을 수 없는 세상이었고 타인이었다. 이해받기보다 이해하기 익숙할 나이가 되고도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 이날도 무척 애를 먹었다. 결과적으로 별일 아닌 데 매여 여행길은 엉망이 됐지만, 또 다시 때를 놓치기 전에 이 하루를 사과하고 용서해야겠다. 지난날 부끄러움도 죄 사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많은 실수를 용서받고 싶은 밤이 깊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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