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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Oct 31. 2019

난쟁이 도시에서 가스등 켜는 거인

_ 여행 16일째, 브로츠와프

#1 새벽의 모녀

한 량, 두 량, 세 량…,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 세단인지 왜건인지, 색깔도 모양도 알아보지 못하겠는 자동차를 위아래 포갠 화물 수송 열차가 어둠을 뿌리치며 북쪽으로 달려갔다. 스트라호프 수도원 양조장에서 맞술하던 친구도, 프라하 민박집 아가씨도 단잠일 새벽, 드레스덴 중앙역 건너 이렇다 할 이정표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기차 열량을 세던 나는 폴란드행 버스를 희망하는 내내 하품을 쏟았다.

열하나, 열둘, 열셋…, 동안 역내 레스토랑에 볼일이 있을 냉동탑차들이 줄지어 멈췄고, 뒤이어 급정거한 자동차 조수석에서 여인이 내려 달렸다. 운전석의 남편 혹은 연인이 그녀를 따라잡아 서류 가방을 건네곤 분별할 수 없는 입맞춤을 보탰다. 택시가 늘어났고 승객마다의 구둣발 소리는 다급해졌지만, 불 밝힌 역사 건너 이쪽은 미동 않는 새벽 공기에 의혹이 싹텄다. 이곳 정류장이 틀림없겠지?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호루라기 소리에 하릴없던 셈을 그만뒀다. 경찰에 쫓겨 역사를 나서는 배낭족, 도둑이나 강도의 등장처럼 몹쓸 풍경이 아니어서 안도했다. 호텔 삯이 아쉬워 역사 벤치에서 노숙하던 젊은이들이 찬 기운에 머뭇머뭇 담뱃불을 붙였고, 화물 수송 열차가 떠나버린 역사 위 플랫폼으로 가녀린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쩌고저쩌고, 브로츠와프?”

어엇? 아마, 아마도…?

꼼짝 않던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새하얀 굴에 깜짝 놀랐다. 낯선 언어에 뒤섞인 서로의 희망을 감지하고 대충 답한 후, 이제 건너편과 무관하게 이쪽으로 버스가 올지 어떨지 불확실한 어둠을 응시하기로 했다. 다행히 '베를린-크라쿠프’행 플릭스 버스가 멈춰섰고, 중간 기착지인 브로츠와프행 예약 티켓을 꺼낸 내 뒤로 언제부터 함께였는지 모르겠는 아주머니를 모신 아까의 아가씨가 줄을 섰다.

계단을 올라 2층, 수면 중인 뒷좌석 대신 앞쪽 맞좌석을 차지하고 전날 마련해 둔 과일과 요거트 들을 꺼냈다. 이른 아침을 야무지게 먹어치우는 동안에도 차는 출발할 기미가 없었는데, 동안 모녀로 보이던 두 사람은 아래층 기사들과 오르락내리락 심상치 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로소 티켓을 검수하던 젊은 차장이 올라와 좌석을 둘러고, 잠시 후 버스가 남동쪽으로 내달릴  모녀가 타박타박 2층으로 올라 나보다 앞좌석을 차지했다. 침침한 불빛 아래에서도 빛바랜 게 분명해 보이는 숄을 풀고 오래도록 쓸모를 다했을 손가방에서 사과를 꺼내들던 그녀. 우묵한 눈매와 날렵한 콧방울 아래 일자로 다문 입매의 그녀가 엄마에게 사과를 건네는 걸 곁눈질하며 몇 해 전 “폴란드, 천 년의 예술”에서 마주한 <워비치의 소녀>를 떠올렸고, 코페르니쿠스와 마담 퀴리와 모두 한 조국일 거라 속단했다.


당시 전시는 폴란드의 역사전에 다름아니었다. 10세기 무렵 독일을 막아내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피아니스트 왕조가 폴란드의 첫 통일 왕국으로, 피에타상과 최후의 심판 제단 등 종교물 전시를 지나면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수차례 몽골 침입을 받던 폴란드가 14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을 수립하며 중흥의 길로 나아감을 볼 수 있었다. 독일계 튜턴 기사단을 물리친 <그룬발트 전투> 러시아를 이긴 후의 <프스쿠프의 스테판 바토리> 그때를 증명했고, 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성과도 이때 이뤄져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지그문트 바자 3세의 결혼 행렬 기록화인 <스톡홀름 두루마리>를 지나면 몽골과 타타르족의 공격을 막아낸 <빌라누프 궁에서 나오는 얀 소비에스키 3세>를 만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이 대작은 17세기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해 유럽 최대 영토를 가졌던 폴란드의 호시절을 진군하고 있었는데, 이후 폴란드는 우리 역사를 배우며 지겹도록 들었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숱한 침략을 겪은 데다가 제 이익을 챙기기 급급했던 귀족들로 무주공산이 되어 간다. 결국 세 차례에 걸친 3국(합스부르크 제국과 현재 독일로 축소된 프로이센과 러시아) 분할 통치로 123년간 망국의 슬픔을 겪게 되는 폴란드. 그래서인지 이 시절 프랑스로 망명했던 쇼팽의 초상은 버스에 함께한 아가씨처럼 나쁜 안색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도록 독립을 위해 안팎으로 싸웠던 장군들과 의용군,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에 차례로 침공당하면서도 끈질겼던 폴란드 지하 저항 세력과 영국 망명 정부의 암약에 관한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의병과 독립운동가 및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연상시켰다. 이후 공산 정권에 항거한 봉기들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다른 듯 많이 닮아, 여행의 종착지를 번복할 만큼 폴란드는 궁금한 나라가 됐다.

1989년 자유화를 선언한 이래 1996년 OECD, 2004년 NATO, 2005년 EU에 차례로 가입하면서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선 폴란드. 지난한 역사를 관통한 그들은 지금 희구하던 삶에 다다랐을까. 뒤늦게 자본주의의 길로 합류한 이들의 현재를 통해 늦된 삶의 변명 혹은 위로를 찾으려던 이방인 건너에는, 아무것도 짐작치 못할 모녀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2 한낮에 만난 난쟁이

‘돈을 왕창 뽑지 그래요.’

자작나무가 좀 더 많아지는 사이, 아무래도 익숙치 않은 문자의 브로츠와프에 도착한 이래 구시가지 시장 광장에서 처음 발견한 ATM 기기 옆 난쟁이가 속삭였다. 환전수수료 때문에 폴란드 은행 기기를 찾고 싶었지만,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유로넷 기기. 배는 고프고, 환전소인 칸토르는 뵈지 않고, 브로츠와프 대학가에 이르러서야 ‘PKO bank polski’ 기기를 발견했다.

‘삐뽀삐뽀 길을 비켜요.’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던 길, 이 도시의 최장신이라는 엘리자베스 교회 앞 호스와 사다리를 든 두 난쟁이와 마주쳤다. 14세기 현재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1529년의 우박과 2차 세계대전의 화염에서 회생한 후로도 1976년 대화재를 겪었다는데, 불우한 역사에도 건재한 폴란드인처럼 상처에도 단단한 붉은 벽돌을 한 층씩 오르면 91미터 첨탑이랬다. 그곳엔 오데르강을 휘감아도는 도시 풍광을 즐길 전망대가 있지만,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이곳에서 배불리 드시죠.’

피자집 앞 배불뚝 난쟁이였다. 그래도 폴란드 전통식을 먹자 싶어, 피에로기가 맛있다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난해한 대화가 오갔고, 감자와 양파로 속을 채운 것과 고기와 버섯과 치즈가 버무려진 피에로기가 골고루 3개씩 잘 구워져 차려졌다. 반달 모양 만두 같은 이 음식을 갈릭 소스에 찍어 입에 넣으니 바삭, 굶주린 혓바닥보다 귀가 먼저 달아올랐다.

‘이곳에서 지도를 구하세요.’

시장기가 가시고, 박공 지붕 위 아르누보 장식이 화려한 구시청사를 지나 관광객으로 왁자한 맥도날드 옆(폴란드 은행 기기가 그제야 여럿 보였다!) 관광안내소를 찾았을 때 지도와 카메라 차림의 난쟁이가 말했다. 오가다 만난 '시지프스의 두 난쟁이'를 포함해서 이제 400여 개가 훌쩍 넘는 난쟁이 동상 지도를 6즈워티에 구할 수 있었는데, 정작 이날 만나고픈 사내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농사를 돕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는 이곳 난쟁이는 장난이 심하지만 사람을 좋아하여 잘만 대접하면 부자가 되게도 만든다는 우리나라 도깨비와 닮았다. 다만 이곳 난쟁이는 공산 체제에 반발하던 대학가 벽화로 환생해 저항의 상징으로 더욱 유명한데, 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의욕은 없고 수줍게 호객하던 폴란드 청년을 좇아 카페에 앉았다.

때마침 민소매 차림 청년이 큼지막한 비눗방울을 피어올려, 광장은 금세 아이들의 까르륵대는 소리로 부풀었다. 공교롭게도 일곱 난장이를 만난 이날, 잠에 드는 묘약을 먹은 백설공주처럼 눈꺼풀이 차츰차츰 무거워졌다. 백마 탄 왕자를 바랄 나이가 아녔는데도 온종일 맘에 품은 사내는 있어, 자칫 그를 만날 시간을 놓칠까봐 시계를 보다 말다 끄덕끄덕 잠이 들고 말았다.        



#3 밤을 밝히는 램프라이터

볼썽 사납게 입가에 침이 흐르고 있었다. 뭐, 수군댔어도 폴란드 어를 알아들을 리 없으니 댓츠 오케이! 오후 5시, 해는 기울고 사내를 만나기 적절한 시간이 됐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피아스코비 다리를 건너 새파란 툼스키 다리 앞에 이르러 무리진 뱃사공들에게 물었다.

“선셋 무렵 저기 성당에서부터 이 다리에 이르기까지 오갈 테니, 여기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어.”

영어로 자세히 알려줬지만, 가만 앉아 기다릴 성미가 못됐다. 가이드북은 두 첨탑이 보이는 어느 담벼락을 찾으면 된다 했는데…. 다리를 건너 한때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여 살았다는 성당섬으로 들어섰지만, 높지도 낮지도 않게 매한가지로 늘어선 담을 어떻게 분간할까. 저녁 든 거리는 다소곳했고, 성 십자가 성당과 두 첨탑의 성 요한 대성당 어디에도 사내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어 한껏 초조해졌다.  


벌써 다른 곳으로 가버렸나, 툼스키 다리에서 기다릴걸 그랬나, 이대로 만나지 못하는 건가. 싱숭생숭 애꿎은 낙엽을 걷어찰 무렵, 인적 드문 골목길로 뒤뚱뒤뚱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헬로!”

당신을 찾아 한국에서 왔노라 밝히자, 사내는 멈칫했다.

“동행해도 될까?”

“…일단 차에 타.”

타자마자 1분도 걸리지 않는 어느 길가에 주차를 마친 남자는 1시간 정도 소요될 거라며 미리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차의 트렁크를 열어 검고 기다란 플록 코트를 꺼냈다. 그럼 그렇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전 이 도시의 파수꾼으로 존경받았다는 램프라이터였다. 이제 곧 사내의 활약으로 어둠이 빼앗았던 브로츠와프 골목 골목은 제 모습을 찾을 거였다.

“이 도시 가스등은 몇 개나 돼?”

“전부 103개. 그런데 하나가 고장 나 102개만 불을 밝혀.”

“그걸 일일이 기억해 점등하다니, 대단하다! 이 일을 한 지 얼마나 된 거야?”

“이 일을 하던 친구가 소개해준 뒤로 지금까지 꼬박 10년쯤?”

“10년 동안 매일 저녁 가스등을 밝히러 다녔단 말이지?”

“아니, 두 명의 동료랑 돌아가며 일해. 이번 주는 월요일과 목요일이 내 당번 요일이야. 낮에는 다른 일을 하거든. 그래도 브로츠와프 사람들을 위해 하는 이 일이 가장 보람돼.”

드넓은 유럽에서 이곳과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에서만 볼 수 있다는 램프라이터. 그가 제 키를 넘어서는 막대를 쭉 밀어올려 4촉 가스등의 상하좌우를 재빠르게 점등하고 가운을 휘날리며 다시 걸을 때면 낙엽들도 일어나 환호했다. 점점 부탄가스 냄새에 머리가 띵해지는 나와 달리 사내의 걸음걸이는 확고해서, 오종종 그를 따라 툼스키 다리로 돌아왔을 무렵 한 치 분간 못할 물안개에 가로막혔을 때도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앞질러 나아갔다.

사반세기 내 이름표였던 '편집자'는 시작부터 배고픈 직업이었다.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의 연봉에 비하자면 앞자리 수부터 기가 죽었다. 그래도 당시는 어둠을 밝히는 램프라이터처럼 시대의 빛으로 기능하던 출판이어서, 시청률과 광고수익으로 민감했던 방송계를 떠나 출판인으로 사는 게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편집자 생활이 난처해졌다. 애초에 비주류였던 업이 주류가 될 가능성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 시대 유물(遺物)이 될까 경쟁 치열해진 출판업계에서 나는 점점 구닥다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내처럼 가던 길 걸어가도 무탈확인하고 싶었는데….


시티투어 중이던 빨간 자동차에서 내린 4인조 남자들이 사내를 에워싸는 바람에 두 사람의 데이트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찰칵찰칵, 그를 기다린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폴란드 서북쪽 도시의 유명 관광상품이 된 그는 이 나라 저 사람의 사진 데이터로 재빠르게 전환됐다. 와중에도 가스등을 켜는 남자는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묵묵히 걸어갔다.  

성큼성큼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지던 나는 물안개에 갇힌 채 핸드폰마저 방전되어 방황했다. 그때 친절한 현지인이 다가와 구글 지도(!)를 보여준 덕에 간신히 숙소 가는 트램을 탈 수 있었다. 트램에 올랐을 땐 주머니 동전이 없어 쩔쩔맸는데, 이 도시 젊은이가 대신 카드를 대주어 숙소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고 오랜 가치를 지킬 줄 알며 불의에 저항할 줄 알고 가족 간 정을 잃지 않은 이들로 따뜻해진 밤, 책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세상과 온기를 나누는 휴머니즘으로 여전할 텐데 삶의 기저가 흔들린 나 홀로 마음 식어버린 건 아닐지. 진실의 알약을 삼킨 듯 입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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