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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Oct 26. 2019

기차가 사라진 밤

_ 여행 15일째, 드레스덴

#1 사건 발발 12시간 전

당장 외출해도 될 만큼 말쑥한 차림의 사람들과, 화장기는 고사하고 마른세수나 했을까 싶은 얼굴들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았다. 뒤늦게 의자를 당겨 앉은 중년 남성은 사내아이와 프라하로 여행 온 한국 아빠. 그는 아침밥을 먹지 않겠다는 아이를 설득하다 지친 건지 행색이 죄 그 모양 그 꼴이라 상관없겠다 싶었는지, 뻗친 머리를 감추려던 캡모자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프라하 중앙역 근처 한인민박집 여행객들은 그렇게 두서없이 수저를 들었다.

“여긴 캐러비언 베이가 아니란 말씀! 여기저기 의미를 새기고 어쩌고…. 한마디로 한국 젊은이들도 보편적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단 얘기지.”

명소를 훑고 저마다의 핸드폰에 등장인물과 각도쯤이 바뀌었을까, 얼추 비스무리한 사진들을 저장한 채 떠나는 여행자들이 도시의 진면목을 몰라봐 안타깝다는 민박집 사장님. 그이가 감자와 양파와 고추를 토막 써는 동안 왕국이 세워지더니 된장이 끓는 동안 제국이 되고, 샐러드를 버무리고 몇 가지 반찬을 만드는 동안 격동의 세월을 거쳐, 한끼 소박한 집밥이 달그락달그락 여행객들의 수저질에 여지없이 동나고 체코란 나라의 현재에 다다랐다. 젊은 피를 제물 삼아 역동하는 고약한 역사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시대의 흐름을 거꾸러뜨린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속사포처럼 흘러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끝났다는 게 신통방통할 따름이었다.

어느새 듬성듬성 이 빠진 식탁에는 민박집 사장님과 그녀의 두 아들, 그리고 아까의 중년 남성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캡모자를 조물거리며 남아 있었다. 사장님은 마른자리 펴주고 따뜻한 밥 먹이고픈 부모처럼 해주고픈 말도 많았다. 하지만 식탁에서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게스트룸 문지방 너머로 떠나간 젊은 친구들에겐 진부한 이야기, 그들에겐 중년의 우리와 다른 역사가 쓰여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사람 나름이겠죠. 지난 촛불 집회 때도 그렇고, 요즘 젊은 친구들 옹골차던데요? 아마 저희 어릴 때도 어른들 눈엔 맹탕 같았을 거예요.”

앞선 세대의 굳은살 같은 걱정에 중년 남성이 답했다.

몇 해 전 쌍둥이를 데리고 간 광화문이 떠올랐다. 정오부터 차량이 통제되던 바람에 거기까지 몇 정거장을 걸으며 바짝 잇대어진 전경차에 질겁하아이들. 어묵과 호떡으로 달래 광장 인파 사이 5단 신문 광고쪽 만한 자리에 앉힌 다음, 전기램프로 장난을 쳐도 내버려뒀다. 마침 집회가 시작되고, 까까머리 중학생이 나라의 내일을 걱정한다며 연단에 올랐을 땐 많은 어른들이 미안해졌다. 즈음 쌍둥이는 다시 배가 고프댔고, 이번엔 토닥토닥 사다준 먹거리 하나를 쏟고 남은 것을 나눠먹다 화장실에 가고 싶댔다.

“엄마, 졸려요.”

저희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길 바라 거기 있단 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쌍둥이와 종로 네거리로 발길을 돌렸더니, 영하로 뚝 떨어진 겨울바람서로 치고 박고 도망치다 다시 어깨동무하는 두 아이를 어쩌지도 못한 채 내 등만 밀어댔다.

이후 혼자 촛불 집회에 갔을 때, 마침내 '요즘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회가 마친 후 뒷정리에 나서는 쪽이 있는가 하면, 노래하고 춤추며 축제인 양 거리 집회를 마저 즐기는 청년들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한때 리에서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었던 중년보다 순하고 낭만적인 투쟁가로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 절박감만은 뒤지지 않았을 그들 덕래도록 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연히 만났던 이데올로기적 결기 대단했던 중년 친구들이 몇 시간 못 버티고 다리 아프네, 허리 아프네, 대열을 이탈해 밥집 술집으로 향했으니 하는 소리다.

그리고 촛불 집회를 몇 번 다니러가는 사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부르짖던 몇바람은 이뤄졌다. 곱은 손으로 촛불을 흔들던 사람이나 밥 벌어먹느라 종종댔던 사람이나, 촛불이 잉걸불이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개인사들이 금세 호전되지는 않았다. 집회 후 청소하던 청년이나 장구 치던 청년이나 개인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받아들이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도, 묵직한 역사서에 달랑 한 줄 쓰일 한철 이야기일지 몰라도, 인생 한때를 바쳐 이뤄낸 일이니만큼 각자의 인생에 묵직한 누름돌이 될 거였다. 부딪히고 넘어져도 누름돌 하나 얹고 회생하는 삶은 주위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게 분명했다.

쌍둥이도 원하는 게 생길 때면 전기램프를 흔들며 종종 시위했다. RV 장난감 자동차를 사 달라, 컴퓨팅 시간을 늘려 달라, 떼쓰지 않고 당당히 말하며 뭉치면 엄마가 고개 절레절레 지고 만다는 것쯤 알게 됐다. 갖은 성장통을 겪어아이들이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될 즈음 세상은 좀 더 살아볼 만하게 변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어른이 어른다워야 할 텐데,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2 사건 발발 10시간 전

짐작대로, 게스트룸은 지난 역사보다 앞으로의 이야기로 분분했다. 돌아가면 각자 내버려둔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여행하며 쉬어간 만큼 콤마 뒷이야기는 속기해야 될지도 몰랐다. 마침 면접 얘기가 나와 면접관으로서 훈수를 놓느라, 나 또한 간만에 말이 많아졌다. 그때 꿈지럭대던 이불 속에서 헝클어진 머리가 튀어나왔다. 이곳 장기 투숙자인 아가씨. 이날 드레스덴을 관광하고 다시 프라하로 넘어온다던 아가씨가 뻔질나게 다녔던 중앙역으로 동행하자 했다.

숙소에서 서쪽으로 도보 15분 거리 중앙역이랬는데, 좀처럼 목적지는 닿지 않고 길 한가운데 미심쩍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 아래 십자가라니, 더욱 심상치 않았다. 다가가보니, 1969년 1월 19일 죽음을 맞은 21세의 체코 대학생 얀 팔라흐(Jan Palach)가 분신한 자리!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련의 침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대다수의 도덕성 상실에 항거하며 불꽃이 되었다는 청년의 이야기가 마치 전날 석간 기사였던 양 꽃이 생생했다.

 “드레스덴에 가면 비타민을 사야 해요. 발레아 앰플이랑 아조나 치약도 유명하고….”

이 아가씨에게 드레스덴은 DM이 전부였을까. 왕복 기찻값을 더해도 프라하에서 쇼핑하기보다 남는 장사랬다. 아가씨가 스마트폰으로 쇼핑 품목을 살피는 동안 기차는 평원을 지나고 엘베강을 따라 깊은 산에 접어들었다.  

“저기예요, 저기!"

엘베 사암 산지, 차창 밖으로 높은 산에 숨어 살던 괴석들이 무리지어 흘러갔다. 드레스덴 숙소에 짐을 부리고 작센스위스국립공원 내 바슈타이 협곡을 트레킹할 계획이랬더니, 지질학 전공자라며 관심을 보였던 아가씨였다. 이 친구가 급히 사진을 남기는 동안에도 기차는 총 710제곱킬로미터 산지를 미련 없이 제치고 나아갔다.

 

“저는 천천히 쇼핑하다, 저녁 5시경 기차를 타고 돌아갈래요.”

골목 많은 프라하였더라면 아무 때나 헤어져도 미로에 삼켜져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각선미 곧은 아가씨처럼 쭉쭉 뻗은 드레스덴에선 어정쩡하니 이별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10월의 태양 아래 무지개 짓는 분수를 지나 DM을 비롯한 쇼핑가가 도열한 중앙로로 직진하니 크리스마스 마켓이 선다는 알트마르그트 광장, 길 건너 구시가 투어를 하려나 싶었는데 알트마르그트 갤러리도 아닌 중앙역 쪽 쇼핑가로 돌아가겠단다. 어째, 아가씨가 나를 숙소까지 바래다준 꼴이 됐다.

600년이 다 되어가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점등하고 슈톨렌과 한 잔의 글리바인에 취해 관람차에 오르는 상상이 무르익는 동안 체크인은 끝났다. 그때까지 호텔 바깥에서 기다리겠다던 아가씨를 끌고 목이라도 축이자며 함께 룸에 들었다. 무거운 형틀에서 해방된 내가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구경하는 사이, 벌컥벌컥 물을 마시던 아가씨가 화장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던 길치 아가씨를 모시고, 내가 중앙역 쪽으로 데려다줄 차례였다.

드디어 중앙역, 각자의 길을 향해 헤어졌으나…. 엘베 사암 산지행 기차를 타려던 나는 시장에서 손을 놓친 아이처럼 뒤에 남겨둔 아가씨가 마음에 걸렸다. 신세를 졌으니 내버려둘 수도 없고, 난 그녀보다 곱절은 어른이었다.

‘함께 드레스덴을 둘러볼까요?’

카톡으로 다시 만난 우리는 DM부터 들렀다. 그녀의 말마따나 국내 시가보다 훨씬 저렴한 화장품에 휘둥그레진 나도 몇 가지 물건을 골랐다.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할머니 선물까지 챙기던 아가씨를 따라, 동서와 시어른들의 선물을 담았다. 그리고 아마추어의 소심한 투어가 바통을 이었다.


여긴 츠빙거 궁이에요. 2층엔 마이센 도자기 박물관이 있고,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와 루벤스, 렘브란트 작품을 볼 수 있는 국립미술관도 있어요. 관심이 없다…니 거기 서 보세요. 찰칵. 좌우 대칭이 확실하고 화려한 왕관문 배경이 제격이네요. 저녁에 돌아가야 하니 오페라 예약은 좀 그렇고, 잼퍼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이나 찍죠, 찰칵. 이곳을 바로크의 도시로 만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 기마상이 함께 찍혔네요. 맞은편은 성 삼위일체 대성당, 개신교 많은 드레스덴의 유일한 카톨릭 성당이래요. 폴란드의 왕자리를 탐내 카톨릭으로 개종한 아우구스투스가 비밀리 건축한 성당이라니, 그 심장이 안치될 만한 곳이죠. 마침 수요일, 아뿔싸 정오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놓쳤군요.

저쪽으로 레지던스 궁의 마굿간이었다는 슈탈호프 외벽을 보러 가요. 총 101미터 길이의 벽면에 2,500개 마이센 타일로 만들어진 군주의 행렬은 전쟁 때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니, 굉장하죠? 지난 천 년간 작센을 주름잡았던 과학자, 철학자를 포함한 35명의 군주들의 힘이었을까요? 어디 보자, 파노라마로 찍어야겠어요.

여기 신교도의 상징인 마틴 루터 동상 뒤 프라우엔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때 깡그리 무너졌대요. 하지만 노벨의학상을 받은 독일 출신 미국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이 재건 기금을 내놓아, 1994년부터 10여 년간 복원되어 저 모습이라네요. 돔도 그렇고 바흐가 연주했다는 오르간도 멋지다니 들어갈래요, 전망대부터 오를까요? 이런, 벌써 역으로 돌아갈 시간이군요.

전쟁의 화마에 까맣게 그을린 조각과 새 살처럼 눈부신 사암 조각은 한 가지 건축물로 잘 어울렸건만, 오가다 만난 두 사람은 세대차가 나서인지 당최 어울리지 못한 채 떨떠름한 작별을 맞았다. 호텔에 던져둔 그녀의 짐을 챙겨 중앙역까지 배웅한 후, 아이들을 두고 외출하듯 홀가분해진 나의 저녁으로 걸어갔다.

괴테가 유럽의 테라스라 불렀을 때의 브릴 백작 정원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거나 '브릴의 테라스'로 불리는 드레스덴 예술대학 앞 강변길. 이곳에 내리는 석양은 마치 완쾌한 상이군사에게 건네는 꽃다발 같았다. 소시지에 맥주를 곁들여,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무덤이었던 전쟁이 끝났음을 축배하기로 했다. 멀리, 연합군의 융단 폭격에 불바다가 되었던 드레스덴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이 3,539개 상처를 모아 재건했다는 프라우엔 교회가 백골처럼 빛나고 있었다.      



#3 사건 발발

‘기차가 오지 않아요.’

진동하는 핸드폰엔 이날 동행한 아가씨의 기겁할 만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기차가 두어 시간 연착한댔다. 위로의 말 외에 딱히 해줄 게 없던 저녁 8시, 다음날 새벽 버스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숙소에 든 나는 족저근막염을 앓던 발바닥에 냉장 페트병을 대고 한참을 굴려댔다.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기차가 더 연착된대요.’

원래대로라면 프라하 중앙역에서 민박집으로 걸어갈 시간, 젊은 피에 바쳐졌던 꽃다발도 시들었을 시간인데….

‘헉, 열차가 사라졌어요!’

밤늦은 11시, 아가씨의 문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유럽에서는 안전 점검이나 파업 등으로 종종 기차가 연착된다고 들었지만, 늦게라도 국경을 넘을 줄 알았던 기차가 전광판에서 사라지다니 무슨 일일까? 자정을 향해 째깍대는 시계침이 거슬렸다.

‘혼자 있어요?’

점심을 오물거리던 입언저리, 복숭아처럼 부숭부숭한 아가씨의 솜털이 떠올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애송이 아가씨는 사라진 기차를 원망하는 한국인 신혼부부랑 같이 있다 했다.

‘버스를 찾아보세요.’

드레스덴 중앙역 서북쪽으로 국경을 넘는 플릭스나 프레지던트 버스를 찾아보라 했건만, 경황없는 아가씨는 버스를 찾을 수 없댔다.

나의 대답이 더뎌졌다. 이제 12시, 자정을 넘은 시계는 꼬박 다른 날을 달리고 있는데, 아가씨는 지난날 도착한 기차 역사에서 노숙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아가씨와 함께 하룻밤을 지낼 생각을 하니 그 또한 편치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어렵게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고 모시러 가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가씨, 카톡을 읽을 정신조차 없나 보았다.

‘찾았어요! 함께 버스를 타기로 했어요.’

마침내 플릭스 버스를 탔다 했고, 새벽길 그나마 한국인 동행이 있어 안심했다. 암막 커튼을 젖히자, 농담(濃淡) 다른 어둠이 불 꺼진 내 방으로 밀려들었다. 가로등 아래 거리에는 관람차도 트램도 보이지 않았고, 국경을 달릴 버스 소리는 당연 들리지 않았다. 의논하고 의지할 어른이 필요했을 텐데, 마땅한 사람이 아니어서 참 미안했어.

‘도착했어요. 감사합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무사한 월경(越境)에 내가 감사했다. 오늘 일로 아가씨는 누름돌 하나 얻었을까. 그때 잠깐 망설였던 마음이 떠올라 부끄러워졌. 

우리집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고 청년이 되어가는 동안 그 젊은 생각을 오해하지 않는 어른들을 만나야 할 텐데, 아 미숙한 나에게 어른의 길을 알려 줄 누군가를 만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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