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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Oct 24. 2019

이후의 삶이 궁금해졌다

_ 여행 14일째, 프라하 2

#1 여행을 나누다

꿀꺽꿀꺽 목울대 바쁘게 흑맥주를 들이고 있는 이곳은 스트라호프 수도원, 어젯밤 프라하 주재원으로 있던 후배와 만난 곳이다. 변했다 해도 여전히 매력적인 프라하, 돌아다니지 않고는 못 배길 멋진 도시여서 여행의 출발 때와 좀 다른 느낌으로 사흘을 지냈다. 그러니까 길 위의 삶에 몸이 적응하고 마음이 뒤따라, 서울집 시계는 안중에도 없이, 마셔도 마셔도 다음 잔이 아쉽다는 듯 프라하의 낮과 밤을 탐했다. 오가다 만난 앞자리 친구도 매한가지 마음이어서,  순간만큼은 야경 기막힌 프라하를 함께 사귀기로 했다.

어떤 점이 좋았어요?”

한두 가지라야 말이죠, 여기 눌러 살아도 좋겠다, 잠깐 생각했어요.”

"무엇이 그렇게 흔들어댔을까?"

"암튼 한동안은 프라하에 붙들려 살 것 같아요."

그리하여 서로의 여행듣는 밤으로 출발다.



#2 나의 어제 이야기

“포비든, 포비든(금지, 금지)!”

고리를 걸 틈도 없이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제복 입은 아줌마가 두툼한 손바닥을 펼쳤어요.

“잠깐 기다려요!”

요의를 참아 소름 돋은 팔로 배낭을 뒤졌으나, 웬걸, 매번 같은 자리 챙겨 넣던 지갑이 없지 뭡니까?

“쏘리, 쏘리.”

프라하 카드로 무료인 지하철을 이용하느라, 숙소에서 약 1시간을 건너 프라하 시외 오파토브역에 도착할 때까지 지갑을 숙소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거죠. 앙칼지게 쏘아붙이던 한국 아줌마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옷매무새를 수습하며, 화장실 이용료를 내라는 프라하 아줌마한테 우는 소리를 할 수밖에요. 급했거든요. 그때 짤랑짤랑, 바지 주머니에 동전이 들어 있었어요. 3유로를 지불하고 치졸한 싸움을 끝냈죠.


프루호니체 성은 포기했냐고요? 1시간에 두 대 꼴로 다닌다는 버스가 떡 하니 눈앞에 멈춰 서는 바람에 망설일 틈이 없었어요. 게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루호니체 성 공원의 가을이 대단해서 지갑 따윈 잊어버렸죠.

프라하 대다수 건축물처럼 그 성도 주인이 바뀌면서 고딕이었다 르네상스였다 다시 고전주의 양식을 덧입었는데, 1885년부터 씨 뿌리고 모종한 백작의 노력으로 1,600종 다양한 식물들을 살필 수 있댔어요. 하여 오크나무, 코토네사스테스트 나무, 모래주머니나무, 그야말로 이름만 훑어도 이국적인 공원을 멀리멀리 쏘다녔습니다. 꽃길이 되었다 오솔길이 되었다 산이 되었다 어느새 길마저 뵈지 않는 공원을 가을바람처럼 쏘다니다, 사는 것만큼 변덕스러운 길의 처음에 당도했습니다.

“I've lost my wallet.”

주머니돈으로 성 입장료를 내고 나니 돌아갈 차비가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흰 거짓말을 부렸는데, 하교하던 초등학생들로 붐비던 버스여서 기사가 마음을 넉넉히 쓰더군. 다행히 다시 오파토브역, 숙소 가는 도중 무심결 비셰흐라드역에 내렸어요. 도시의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곳, 프라하 탄생 신화의 기원지이자 국립묘지가 있는 곳이거든요. 물론 과욕인 건 금세 드러났죠. 산책 후 점심도 거른 상태라, 야트막한 오르막으로 허기가 몰려왔어요.   

“한국인이세요?”

아이고 죽겠다 우는 소리는 속엣말이었는데, 한국인은 용케 한국인을 알아보더군요. 사진을 잘 찍던 그분은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건축인 성 마르틴 로툰다와, 11세기부터 두 첨탑을 겨루며 함께 세월을 까맣게 태우고 있던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을 찍느라 바빴어요. 저야 애시당초 생각했던 곳으로 갔죠. 묘지 입구의 지도로 짐작컨대, 가까이 48번이 드보르작의 묘였고,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9번 스메타나의 묘와 6번 네루다의 묘를 각각 만날 수 있겠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드보르작의 묘는 높다라니 금방 눈에 띄었는데, 그의 명성만큼이나 헌화는 많았으되 그의 삶을 증언하는 한 줄이 안 보여 갸웃했어요. 이제 축구공이며 바이올린이며 망자의 삶이 간결하게 새겨진 묘들을 순차적으로 지나 오벨리스크 같은 세 기둥 나타나요. 여기서만큼은 “가족을 잃고 청각을 상실하는 불행에 굴하지 않고 <나의 조국>을 완성한 스메타나는 체코의 국민 음악가다.”라든가, “예술적 사상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인간이다.” 등의 깨알 같은 묘비명을 기대했는데, 화강암 위 오선지를 넘나드는 음표뿐이었. 음악이 전부였던 삶의 적나라함, 그 앞에서 망연해졌답니다.


“엽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장소라니까요.”

동행에 이끌려 ‘높은 성’이란 뜻만큼 광활한 비셰흐라드에서 파노라마를 찍고, 파리 에펠탑을 본떴다기엔 외람된 페트리진 전망대에 오를 때였습니다. 동행 덕분에 빵과 우유는 마련했으나 유료인 엘리베이터까지 바라긴 염치없는 데다가 죽음 앞에 섰다 와서인지 무욕(無欲)해져숙소로 돌아가자 싶었죠. 그때 동행이 등을 떠밀어 기어이 199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블타바 강 위 레기교와 카를교, 마네스교, 체홉교 4개의 다리가 나란히 놓인 해질녘 프라하는 돈을 주고 살 만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원경(遠景)처럼, 자질구레한 삶의 주름을 지운 채 멀리서 바라보니 구불구불 제 인생도 나름 길을 가고 있더군요. 그래서 생각해 봤죠. 과연 그 마지막은 어디일까? 어떤 시그널로 남을까? 씨앗 뿌린 자일까 열매 맺는 자일까, 혹은 느낌표일까 말줄임표일까. 고단한 길일지라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앞으로의 삶이 점점 궁금해지더군요.



#3 맞술 친구의 이날 이야기

어쩌다 보니 카프카를 쫓아다닌 하루였어요. 생전의 카프카와 프라하가 우호적이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재 프라하 이곳저곳에서 관광 기념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그를 피하기란 신기(神技)에 가까운 노릇이니까요.

첫날 구시가지 광장에 들르셨다니, 성 니콜라스 성당을 기억하시겠네요? 그곳을 바라보고 좌측 후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종종 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층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현지인들과 윗층을 경이롭게 올려다보는 여행객이 대조적인 그곳은 카프카가 태어난 곳, 카프카 하우스랍니다. 워낙 풍파가 잦았던 프라하였으니, 거기도 그 시절 것이라곤 대문짝밖에 없다지만요.

생가는 아쉬웠지만,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었어요. 천문시계탑을 바라보고 좌측 미누타 하우스에서 성 니콜라스 성당 맞은편 오펠트 하우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가가 머문 집은 대여섯 군데쯤? 카프카 연구자가 아닌 바에야 일일이 가볼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카프카 아버지의 가게였다던 구시가지 광장 골스킨스키 궁전 1층은 들러볼 만했어요. 물론 카프카의 서점으로 변신한 그곳에서 저는 까막눈 신세였지만요.

 

구시가광장 틴 성당 아주 뒤쪽으로 그가 다녔다는 초등학교도 있고, 화약탑에 이르는 첼레트나 길을 따라가면 독일문학을 배우다 법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가 다녔던 프라하 카렐대학도 찾아볼 수 있다던데…. 저는 프라하 성 내, 막내 여동생이 그에게 작업실로 빌려줬다는 황금소로 22번지에 갔답니다.

허리도 펴기 힘들던 파란 대문 안 그 조그만 집에서 그는 벌레도 되고 까마귀도 되었던 걸까요? 부유한 집안에 보험공사 관리로 은퇴할 만큼 직장생활도 순탄했음 직한데,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글쓰기에 몰입했다는 게 범인인 저로선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대가다운 열정일지, 생래적 고독감에 대한 예민함일지 어떨지. 

카프카 박물관은 가보셨죠? 황금소로에서 네루도바를 따라 내려오다 발렌슈타인궁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대번 눈에 띄더라구요. 전 학생이라 120코루나만 내고 그의 친필 편지와 그 편지를 나눈 여인들을 죄다 만날 수 있었답니다. 사생활을 온통 드러낸 그녀들에께 박물관 전시가 바람직했을까 싶다가도 지는 읽을 수 없었고, 실존을 고민했던 그보다 표상으로 남은 카프카만 만나다 보니 점점 본전 생각이 나더군요. 하하하, 제 짧은 식견 탓일 겁니다.

그의 묘는 비셰흐라드가 아니라, 구 유대인 공동묘지에 있다죠? 굳이 거기까지 가긴 그렇고, 스메타나의 길과 마사릭의 길로 이어지는 강변을 거닐었어요. 카프카는 그 길을 산책하면서도 끊임없이 번뇌에 빠져들었다던데, 그러기엔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었.

현듯, 뭘 그렇게 어렵게 사나 싶더라구요. 그리고 곧장 발길을 돌렸어요. 위대한 예술가가 되긴 글러먹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극심한 배고픔이 느껴졌거든요. 이제 배도 부르고 가게는 문을 닫을 시간이니, 마지막 잔을 비우기로 해요. 마지막은 다음의 시작점일 뿐, 각자의 다음 여행을 위해 그리고 이후의 삶을 위해 나 즈드라비(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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