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크라쿠프 썰렁한 민박집 6인용 도미토리룸에 혼자 누워 있자니 청승맞기 짝이 없어, 난로 두 줄 시뻘건 적외선이 어느 짐승의 눈이었어도 반가울 뻔했다. 유리창으로는 그보다 훨씬 높은 데서부터 달음박질했을 비가 저마다의 길을 택해 떨어지고 있었다. 오들오들 타인의 온기가 보태지지 않은 침대를 걷어차고, 일찌감치 시외버스터미널로 떠나기로 했다.
마침 출발까지 5분도 남지 않은 버스가 있다며, 창구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매표소로부터 대각선, 잽싸게 몸을 날렸다. 숨을 헐떡이는 아무라도 있었으면 쑥스럽지 않았을 텐데, 오래된 금전출납기를 사이에 두고 버스 기사와 여행객들이 평화로이 거래 중이었다. 아무렴, 시시때때 출발하는 자코파네행이라 달릴 필요까지야…. 티켓을 받던 기사가 웃었다. 인생사 알고 보면 바보짓인 게 이뿐인가요, 마주 웃었다.
빈자리를 찾다 눈 마주친 여행객 옆으로 앉았다. 초대하고픈 기분은 아녔겠지만, 눈이 얽히면 관계도 얽히기 마련이었다. 배낭을 치우며 홀로 여행객이냐 묻길래 되받아 물었더니, 건너편을 모호하게 손가락질하며 피앙세와 함께랬다. 딱히 약혼자와 떨어져 앉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둘러보지 않았지만, 얼핏 봐도 만석. 아침 7시 10분발 버스에도 이 많은 사람이 몰렸다는 점이 놀라웠다.
“삶을 견딜 수 없을 때 항상 자코파네가 있다.”는 폴란드 속담처럼 거기 앉은 대개의 삶이 견디기 힘든 건지 금세 유리창은 뿌얘졌고, 누구에게랄 것 없는 호기심을 지우듯 윈도우 브러시가 부지런히 오가는 동안 차도 쉼 없이 달렸다. 체온이란 그런 걸까. 더할 나위 없는 숙면 끝에 눈을 떴을 땐 옆자리 남자의 어깨를 빌리고 있었다. 창밖 누런 얼룩소가 풀을 뜯느라 상관하지 않은 게 참말 다행이었다.
겨울을 이끌던 비가 산을 넘지 못하는 사이 자코파네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기지개를 폈고, 이들을 맞은 침엽수들도 덩달아 기운을 차렸다. 툰드라 산맥을 오르기엔 안성맞춤인 날씨, 자코파네행 연인과 함께인지 어떤지 옆자리 남자는 숱한 여행객에 섞여 망설임 없이 로컬 버스에 올랐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멀지 않은 숙소로는 나 홀로 떠났다.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애타게 혼자의 시공간을 좇은 듯도 하고, 측량할 길 없는 발길에 낙엽이 섞여들었다. 다시 기댈 데 없는 몸은 한 자락 바람에도 오싹해졌다. 그래 봤자 몇 십 분, 낙엽 태우는 냄새가 이끄는 대로 샛노란 숙소에 멈춰 섰다. 두둑한 장작더미에 벌써 훈훈해질 무렵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을 쓰다듬던 낙엽이 툭, 배웅을 마쳤다.
#2 바다에서 태어나 산에서 지내는 호수
기세 좋게 산을 오르던 로컬 버스가 멈추자 다시, 겨울을 잔뜩 물고 오던 비가 질주했다. 입장료와 함께 우비 값을 치르며 질척대는 흙탕길에 운동화가 낭패일 거라 예감했으나, 비에 젖은 제주 오름 맨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던 찰진 흙의 감촉이 떠올라 마차를 뒤로 하고 걸어 오르기로 작정했다.
이런, 위도가 다르단 걸 깜빡했구나. 흙길도 내밀한 숲도 아닌 아스팔트 멋없이 뻗은 산길은 원하던 트레킹 길이 아녔다. 그래도 두 필 말이 끄는 마차 두어 대 정도가 나란히 지날 만한 산길 오르는 우측으로는 의혹에 찬 산이요, 좌측으로는 계곡 물소리 거센 야성의 땅이었다. 한마디로 몇 십 폭, 인간에게 허락된 까만 아스팔트를 벗어나면 아무렇게나 뾰족하니 성미 대단한 산.
크라쿠프 민박집에 캐리어를 두고 여기 자코파네 숙소에 배낭마저 부려놓았기 망정이지, 아침 편의점 간이식으로 떼운 배로 모험 활극을 펼치게 생겼다. 누구에게 배고픔을 동냥할 수도 없고, 지나온 길을 돌아다봐야 때를 알고 떨어지는 아까의 낙엽들뿐이었다. 그때 유모차에 올라 산을 오르는 아이의 손에 쥐어진 초코바가 눈에 들어왔다. 쩝, 둘러보니 아이의 부모보다 한참 어린 커플도 보였고, 단체 여행 온 학생들과 연세 지긋한 어르신 내외 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행렬을 이뤘다. 폴란드 제일 높은 타트라 산맥 카스프로비산 포장도로를 통하면 두어 시간 만에 해발 1,395미터 모르스키에 오코(Morskie oko) 호수에 닿는다는 걸 알고 떠난 사람들이었다.
네댓 명이 고른 길을 이탈하여 거친 산으로 덤비길래 거기 합류했다. 문명의 길로 오르는 사람보다 20분 빠르게 호수에 도착한다는 팻말을 지나자, 울퉁불퉁 산길이 가팔랐다. 다시 문명의 길과 합쳐졌을 땐, 마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전나무와 너도밤나무 울창한 숲의 위엄찬 경고를 맞닥들였다.
거기로부터 30여 분만 더 오르면 호수가 있다는 건 바람이 말해 주었다. 그 높은 곳에 다다라서야 처음 나타난 레스토랑에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주머니 곳곳에 눈요기하던 초코바를 쟁였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저돌적인 바람과 달리 만년설 갸웃한 산자락에 숨어 지내는 유순한 모르스키에 오코를 만났다. 산을 담고 묵직해진 하늘을 담고 바위와 언저리 기웃대는 사람들을 담고도 찰방찰방 까불대지 않는 호수. 그래도 최대 51m 수심의 호수라니 섣부른 침입은 곤란했다. 안내문에는 수영을 금한다 쓰였는데, 사람과 야생동물이 먹을 수는 있는 맑은 물이랬다.
“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빙하는서서히 물과 미세하게 매달렸던 빙하 지반의 바위 입자로 채워진 분지를 조각했다. 수천 년 동안 미세한 입자들은 씻겨 나갔고, 오늘날 호수는 최대 15미터의 가시성과 함께 깨끗한 물을 자랑한다.…"
표지판 설명대로라면 마지막 빙하기 지각 변동으로 바다 지형이 융기해 생긴 호수라는데, 이건 U자형 호수 모양으로 확인할 수 있댔다. 오래 전 여행가들이 발견한 이 호수가 ‘바다의 눈(Eye of the Sea)’이란 폴란드어 '모르스키에 오코'로 명명된 이유겠다. 그렇다면…, 조만간 된서리 맞고 눈 덮혀 동면에 들 호수는 태곳적 바다를 꿈꿀까, 아니면 꽃향기 취하다가도 폭풍우 휘몰아치면 정신 사나울 산과 더불어 살아가길 바랄까. 호숫가 한 바퀴 돌고 나면 그 답이 구해질까, 어떨까.
#3 절뚝거리는 반쪽
여기 호수처럼 속 깊고 아량 넓은 친구가 있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된 건지 그녀에게 확인할 바 없지만, 처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알뜰히도 챙겼던 그녀는 나의 수호천사 같았다. 때 아닌 두발 단속에 밤마다 교장 사택 초인종을 눌러댄 진범을 모른 척했고, 고3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부산까지 영화를 보러 다닐 때는 가방을 맡아 주고 알리바이도 마련해 주었다. 밤새 공부하자 모였다가 대단치 않은 소음에 도둑이 들었다 난리법석을 피우느라 함께 시험을 망치기도 했다.
일탈도 일상도 함께였던 친구가 고향 근처 전문대에 입학하면서, 서울 소재 대학교로 오게 된 나와는 뚝 떨어지게 됐다. 당시 학보를 주고받는 게 또 유행이어서 이로써 안부를 대신했고, 먼저 취업한 친구 덕에 언감생심 스테이크를 썰고 명품 스카프도 둘러멨다. 졸업 즈음 대학병원에서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골수 검사로 까무러치기까지 밤을 새워 옆을 지켜준 친구. 그녀는 그 후 아버지의 강제 귀향 조치로부터 도망할 때 반 달치 봉급을 털어줬다.
서로의 길이 달랐고 삶의 형태도 조금씩 변해갔지만, 비밀 단짝을 관둔 적은 없었다. 바쁠 때면 뜸하니 살아갔어도, 쥐도 새도 모를 우리끼리의 비밀은 우주만큼 쌓여갔다. 무슨 부부 연도 그리 비슷한 때 맺었는지, 각자의 결혼식 사진에 그리운 얼굴들 박지 못했다. 그보다 더하다 말할 처지가 못 되는 많은 이의 들러리가 되었으면서도, 남기지 말아야 할 기억처럼 어쩌다 보니 그리됐다.
꽃 피던 시절도 옹이진 시절도 나누다 마흔, 늦된 엄마로 쌍둥이 백일상을 준비하던 초겨울 낮으로 불길한 전화가 왔다. 그리고 친구가 입원했다던 병원으로 친언니가 문병을 대신한 지 1주일 만에, 그야말로 통곡할 전화가 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마음속 큰 벽 하나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젖을 물던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새벽 기차를 오르다 그해 첫눈을 맞았다. 친구의 마지막 편지였겠지만, 무슨 문자인지 눈물에 녹아내려 통 알아보지 못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친구만큼 속 깊은 남편이었으나, 아이를 낳고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고 같은 세상을 바라본다 여겼는데, 살붙이고 살수록 아리송한 사람이었고 가지면 가질수록 먼 사람이었다. 나 또한 실수를 해도 품어주던 친구처럼 굴지 않았고, 바꾸려 들고 못되게도 굴고 악악대던 날이 많았다. 사랑은 고사하고 밉지 않으면 다행인, 행복감과 불행감이 비례 없이 엮이는 들쑥날쑥한 생활을 여태 살아왔다.
내 고단한 삶을 자백하러 고향을 찾았을 때, 친구는 창원시로 번지수 바뀐 진해 천주교 공원 묘원의 양지 바른 곳에 누워 있었다. 재갈 풀린 망아지처럼 떠들었던 우리의 비밀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 어쩜, 한 품에 들어오던 네 봉긋한 가슴 같더냐. 고스란히 품어봤지만, 아무렇게나 자라 성묘를 기다리는 풀들이 얼굴을 찔러댔다.
“딸각, 딸깍”
모르스키에 오코를 돌며 그 친구를 과거형으로 떠올린다는 건 쓸쓸한 일, 내려가는 길에는 기분 전환 삼아 마차를 타기로 했다. 실랑이를 벌이던 옆의 4인 가족 중 아빠만 도보로 내려가고, 남은 가족이 가까운 자리로 올라앉았다. 아까만 해도 따가닥 따가닥 목가적으로 오르던 마차가 내리막길이어선지 담요를 깔고 덮어도 온몸이 쨍쨍 얼어붙을 정도로 속도를 냈다. 말똥 냄새도 무지하게 구렸으나, 옆자리 꼬마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별것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갈라섰던 부부는 하산 길에서 다시 만났다.
각자의 방법대로 함께해도 될 것을, 따져보면 친구와 나는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았는데 남편에겐 참견이 비일비재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와 세월을 덧입으며 달라지던 나를 그대로 수용했던 친구와 달리,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이기보다 원하는 모습을 요구한 게 문제였을까. 따로따로여도 늘 좋았던 친구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 곁을 두고 살지 않아서, 부부 간 싸움이 잦았던 걸까.
오후 4시, 진창에 더러워지고 무거워진 운동화를 벗고 새 부츠를 장만했다. 여행 내내 땀내 나는 발을 보듬었던 운동화를 차마 버리지 못해 쇼핑백에 담아 거리로 나왔을 땐 이미 어둠에 침몰한 도시였다. 동물의 내장처럼 따뜻한 레스토랑으로 다시 들어, 이번엔 저녁을 주문했다. 문간에 둥글게 자리한 사람들이 잔을 들고 노래했다. 결혼 1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랬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볼 만큼, 한쪽으로 쌓인 화려한 선물 포장재마냥 모두가 빼입고 있었다. 우리 부부의 10주년은 갓난 쌍둥이 수발에 허접스러웠는데….
모처럼 서울 가족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곤한 잠에 들었을 때라 다음날로 미룬 채 숙소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른발이 새 신에 적응치 못해 절뚝거렸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안식처가 되어준 친구는 떠나버린 내 반쪽이었고, 나를 비운 그 절반 즈음에 물집 터지고 굳은살 박히면서 사모하는 마음 채운 남편은 지금의 반쪽이 됐다. 아무쪼록 바다에서 나서 산 아래 깃들어 산과 함께 살아가는 모르스키에 호수처럼, 지금의 반쪽과 더불어 남은 날 고요하게 살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