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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Nov 05. 2019

모험이 끝나면 닿을 그곳

_ 여행 20일째, 그단스크 1

#1 대륙의 끝으로

무진장 해 좋은 날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고 보면, 세상 그렇게 불공평해 보일 수 없다. 어릴 적 배달 간 엄마를 기다리며 가겟집 쪽창으로 동네 아이들 재미난 꼬락서니를 훔쳐볼 때도 그랬고, 벚꽃 축제를 맞아 퉁탕퉁탕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울려대는 확성기 가락 따라 발가락 까딱대면서 교실에 붙박혔던 고3 때도 그랬다. 그리고 간만 쨍한 이날 창밖 소들처럼 초원을 어슬렁대기는커녕 기침마저 조심스러운, 졸음 가득한 그단스크행 기차에 갇혀 있자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 초였다면 창밖 끝없는 초록 양배추밭에도, 감자나 사탕무 등이 심어졌거나 밀을 거두어 진 속을 뒤집었거나 했을 시커먼 땅에도 감탄했을까. 넓디넓은 평원을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되감듯 바라보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수직의 도심에 질렸던 눈은 이제 한결같은 지평선에 신기할 것 없다 하품했고, 위도가 달라지는 조짐인지 객실의 파리하니 시신 같은 얼굴들 때문인지 수시로 몸이 떨려왔다.

식당 칸으로 옮겨 조간신문을 읽 활기를 마주하니 급하게 허기가 져, 갓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한달음에 먹어치웠다. 그때부터 창으로 호호 입김을 몰아 산과 새를 그려넣었다. 공을 들여본들 진짜 새가 날까마는 식당 칸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끝났으므로 객실을 피해 생기 있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필요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중대한 볼일인 양, 시답잖던 창 밖 풍경에 손가락 그림을 더했다. 얼룩덜룩 창문으로 갸름하니 동글한 얼굴에 안경을 씌워봤다. 동안 많이 자랐을까? 어디 아픈 덴 없을까? 아이들 얼굴에 마음이 닿자, 공연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작년 어느 주말, 아빠를 기다리던 녀석들과 북악산 스카이웨이 걸었던 날이었다. 그때 단풍은 어찌나 곱던지, 가지가지 열매를 물어대는 통에 더뎌지는 산행이 즐거웠다. 저건 팥배나무, 붉은 산수유, 그건 모르겠고, 그건 할머니가 도토리~. 그렇다고 팔각정까지 오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무료함을 참지 못하던 녀석들이 분발한 덕에 두어 시간 후 정상에 다다랐다. 어디서 주운 나무막대기인지 여기저기 찔러보던 녀석들에게 컵라면과 달달한 주전부리로 선심까지 썼다. 그리고 되짚어 내려가더니, 쌍둥이는 그제야 힘들다 난리를 쳤다. 올라올 때처럼 뭐라도 물어주면 좋으련만, 도시 전망도 별 볼 일 없며 한마디 쏘아붙였다.

“모험이 끝났잖아요.”

그러게. 이곳 풍경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어마하게 떨어진 그곳의 소소한 하루들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아이들 말마따나 모험이 끝나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직 헤어지기로 작정한 애인의 편지처럼 속만 시끄러울 회사 업무 메일은 열어보지 않았건만,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부풀어 근심으로 점차 그 정체를 바꾸었다.



#2 해적선의 모험

“빠아앙!”

그단스크 중앙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질주하는 차들의 경적 이번 여행에서 처음 겪는 거리 소음이었다. 중앙역 작은 가게에 들렀다 무뚝뚝한 할머니를 겪고 항구도시 특유의 억센 분위기를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덕분에 잔뜩 비 쏟을 듯 험상궂어진 날씨에는 초연해졌다.

한국 그 많은 항구도시 하나쯤 사귀었길 바라며 이정표를 살펴봤다. 127km로 최고 가까운 러시아 칼린그라드로부터 상트페테부르크,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과 함께 멀리 3,968km 떨어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까지 그단스크의 자매도시는 많았지만 반가운 이름은 없었고, 거기 이정표도 한국인에게 무심하긴 매한가지란 걸 확인할 뿐이었다.

리적으로 내 태생과 먼 그단스크. 대륙에서나 폴란드에서나 중뿔나게 북쪽이친어서인지, 여행서나 폴란드 대사관이나 이곳 정보에 박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지였던 단치히의 현재이자 동유럽 철의 장막을 최초로 걷어낸 자유연대노조운동의 발원지여서 뭔가 찾을 듯 기대했는데, 대륙의 끝에 닿는다 해서 섣불리 실망하기 싫었는데….

여행자에겐 홀리데이나 마찬가지인 월요일, 2차 세계대전박물관은 휴관이었고 솔리다르노시치 박물관은 구시가지로부터 한참 멀었다. 역사박물관도 문을 닫은 오후, 하릴없이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관광안내소에서 추천한 해적 갤리선을 타러 모타바 강변으로 나아갔다.

도시 제일 자랑이라던 크레인이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중세시대 화물을 나르고 선박 돛대를 세우던, 유럽에서 가장 큰 목조 크레인은 멀리서 봐도 거인의 팔뚝 같았다. 흔들흔들, 그것처럼 기름때 절은 블랙펄호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이킹의 롱십이어야 옳을 듯한 발틱해 연안에서 영화 <캐러비언의 해적>에 나오는 종횡무진 해적선이라니 어쩐 일인가 싶어도, 그 배를 타겠다는 모험가들은 꽤 많았다.

배는 방금 본 크레인을 지나고 한창 부유했던 도시의 곡물창고였던 비스파스피흐슈프 섬과 오워비안카 섬을 지나, 여러 나라가 탐했던 발틱해로 서서히 나아갔다. 수문식 도크가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갑판 위 구경꾼의 볼을 사정없이 때렸고, 노비포르트 항구 즈음까지 양쪽으로 도열한 조선소 공장들은 사나운 매연을 뿜었다. 2008년 한국을 위시한 아시아 조선업에 밀려 이곳 조선소가 문을 닫니 마니 떠들던 뉴스가 진짜였나 싶을 만큼 거대 선박과 크레인이 시야 가득이었다. 조선소 전기공 출신이었던 바웬사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일까, 아무래도 독일어 같은 영어 가이드가 별반 궁금하지 않은 이곳 조선소 회사 이름을 단속 없이 읊었다.


“왓? 내릴 수 없다뇨?”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베스터플라테 공원에서 몇몇 사람들이 올라타는 동안 나를 비롯한 두엇은 널빤지를 건너지 못하도록 제재를 당했다.

“이게 마지막 배예요.

내 뒤를 이었던 두 청년은 쉽게 납득하고 되돌아 2층 갑판으로 올랐다. 이게 아닌데, 선체 만드는 공장을 보려고 찬바람에 매연까지 참아가며 왕복 1시간 해적선 투어를 선택한 게 아닌데….

“여기까지 오는 편도 티켓과 왕복 티켓을 함께 팔았잖아요?

“당신 티켓을 보여 줘요.”

왕복 티켓이에요. 하지만  위령비를 보러 왔다구요!”

“그건 돌아갈 때 볼 수 있어요. 시즌마다 마지막 배편이 다르고, 오늘은 오후 3시 승선이 마지막 타임! 지금 여기서 내리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돌아와야 해요. 미리 말하는데, 이곳은 대중교통이 흔치 않아요. 내리길 원해요?”

협박일까, 친절한 설명일까. 구글맵을 켜보니 시내까지 20분, 우버를 사용할까 싶은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좀 있다 전화할게. 지금….”

“엉엉~. 나 열나서 토했어. 엄마가 빨리 와주면 좋겠어. 엉엉~”

“병원은? 아빠는 뭐하시니?”

“목감기래. 아빠는 지금 엉엉~, 자고 있어. 엉엉~”

작은아이가 따끔거 목구멍으로 울음을 토했다. 기댈 곳을 찾아 더듬거릴 때 엄마는 너무 멀고 아무 보탤 손 없어 미안했다. 아빠를 깨우라 하곤 냉장고에 있을 비상 해열제를 챙겨 먹이라 이르는 동안 배는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회항하는 배 우현으로 모습을 드러낸 27미터 붉은 벽돌 원통형 노비포르트 등대는 발트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대 중 하나이기도 하고, 1차 세계대전 후 자유시였던 이 도시를 호시탐탐 노렸던 독일 전함이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가공할 역사 전쟁터였다. 승무원의 설명대로 배의 좌현으로는 당시 독일 나치의 공격에 저항하다 희생됐던 폴란드군 위령비가 나타났으나, 엄마의 자리로 급선회한 마음은 무감해졌다.  

다시 시커멓게 그을린 산업 지대로 들어섰을 때, 마도로스 모자가 잘 어울리는 백색 수염의 기타맨이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노랫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어느 틈에 해빙이 찾아왔고, 해적선 모험은 수확 없이 끝났다.     



#3 모험의 끝을 향해

밤은 한낮의 영광과 근심 모두를 삼켰고, 대해를 향해 유람선을 띄웠던 모타바강도 먹빛이 됐다. 가로등 점점이 켜져 화장을 마친 가게들은 구경꾼을 유혹했고, 잠들었는지 어쨌는지 무소식인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나는 근심도 못 이길 굶주림을 해결하러 강변 레스토랑에 들었다.  

발틱해에 면해 있는 그단스크는 9~10세기 역사에 등장한 이래 13세기 한자동맹에 참여하여 무역항으로 번성을 누리면서 폴란드 해양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곳을 독일 튜튼 기사단에게 빼앗겼다 15세기에 온전히 되찾은 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때 남쪽에서 이슬람 세계를 끌고 오던 오스만 제국을 막아낸 얀 소비에스키 3세의 활약 덕분이랬다. 브로츠와프로 이어지는 앰버 루트에서 알 수 있듯이 천만 년 바다를 견뎠던 소나무 송진이 석화되어 노랗게 빛나는 천연 호박은 발틱해 연안 도시의 진짜 보물로, 그단스크는 이 보석과 함께 대륙의 곡물과 청어를 팔아 부를 누렸다. 그런데 폴란드군이 그토록 목숨 바쳐 항전했던 도시는 이제, 석탄과 시멘트 들을 팔며 예전만 못한 눈치였다.

 

도시 가이드를 훑는 와중 넙치구이가 차려졌다. 청어는 아녔으나 쫀득하니, 한낮에 휘투루마투루 지났던 구시가지 넵튠 분수가 떠오르는 맛이었다. 독보적으로 뾰족한 첨탑 건물은 구시청사로, 가까이 넵튠 분수는 항구도시 표상인 삼지창 든 포세이돈의 다른 이름이었다. 넵튠 분수가 있던 드우가 거리는 과거 귀족들의 거주지여서 거리 곳곳에 표식을 남겼는데, 연회장 혹은 법정으로 쓰이다 18세기 곡물 거래소로 쓰였던 아르투스 코트가 그랬고 1609년 도시 시장을 지낸 이와 부유한 상인이자 문화 스폰서였던 그의 아내에 의해 세워진 골든하우스가 그랬다.

메인 요리에 달려 나온 야채 스프는 건물들을 사이에 두고 드우가와 수평으로 뻗은 마리아카, 즉 호박 거리처럼 속을 파고 들수록 인상적인 맛이었다. 부유한 상인과 금세공업자들의 집이 모여 살았던 그 거리에서 호박 액세서리도 황홀했지만, 갤러리이거나 호텔이거나 호박상이거나 레스토랑이거나 한 건물들이 흰 수리와 조개와 불가사리와 청어 등 스크라피토 멋지게 장식되어 감탄했다. 전후 무너진 집들을 어쩜 그렇게 품위 있게 재건했을까 생각할 즈음, 레몬이 잠긴 그자네 비노 그러니까 글뤼바인이 나왔다. 마치 호박길 깊숙이, 유럽에서 가장 큰 벽돌 성당이라는 성모 마리아 성당처럼 붉고 따뜻했다.

취기가 바짝 올라 나선 강변 건너편으로, 경박한 불빛의 앰버 스카이가 빈 물레를 돌리듯 돌고 있었다. 그걸 타봤자 공사판이 도시 전망의 전부겠다 싶을 만큼 여기저기 퉁탕거리는 도시의 밤. 동유럽에 민주화가 물결친 이래 이곳 많은 사람들은 서유럽으로, 이곳보다 더 먼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북한인들은 이곳으로 제각각 취업 이민을 떠나온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었더라?

발만큼 오락가락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흐느적흐느적 숙소 가 길, 그단스크의 밤은 밥과 술과 하루 이야기를 나누는 생활이 즐비하여 인양된 보물선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모험을 떠날 때와 좀 다른 좌표일지라도, 나의 종착지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하는 일상일 거란 생각에 다다랐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조약돌을 또 하나 챙긴 나는 흔들흔들 모험의 날을 마저 항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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