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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Nov 08. 2019

인생은 요요처럼

_ 여행 22~23일째, 바르샤바

#1 바르샤바에서의 첫째 날

비 내리는 거리를 달려 일찌감치 돌아온 호스텔 휴게실에 사전을 뒤적이며 공부하던 소녀가 있었다.

“여행 중이니?”

“아니, 여기서 일하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왔어. 엄마랑 함께 살려고. 그래서 폴란드 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해.”

“대단하네. 폴란드 글자는 난해하던….”

“난 라트비아 인이라 어렵지 않아.”

“그럼 여기 사진의 글이 뭔지 알 수 있겠?”

폴란드를 다니며 찍어둔 사진들 속 몰라봤던 글자를 확대시켰다. 소녀는 그까짓것쯤이야, 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고마워. 이 정도 실력이면 여기서 뭐든 잘해내겠네.

“호호, 고마워. 내 꿈은 뮤지컬 가수야.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춤도 잘 추고 싶어.”


소녀좋아하는 뮤지컬을 이야기하는 동안 맡겨둔 빨래가 다 됐다. 룸으로 올라가려다 이번엔 컵라면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두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몸집 좋은 젊은이와, 아빠라기엔 젊은이와 전혀 닮은 데 없는 중년 남자였다.  

“네.”/“네.”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문화과학궁전을 지나 분수대 건너편 상가 건물 내 숨바꼭질하듯 앉은 이 호스텔은 개업한 지 1년도 안 되는, 한국인 드문 곳. 반갑고 궁금해 내처 합석했다. 여행하는 사이 많이 뻔뻔해졌다.

“두 분은 어떻게…?”

“오늘 여기서 만났어요, 댁처럼.”

연장자인 분이 눈치껏 오해를 풀었다.

“그럼 오늘 바르샤바 도착이겠네요?”

“네.”/“네.”

나도 그랬다. 아침부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조식을 거른 채 부랴부랴 그단스크 중앙역에 갔더니, 전날보다 웅성대는 아침 역사가 범상치 않았다. 전광판 예약 기차명 옆으로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떠 있어 옆사람에게 물었더니 ‘지연’이랬다. 지난 드레스덴 사건이 떠올라 바짝 긴장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약한 기차가 다시 1시간, 2시간 무한정 지연되더니 표는 무용지물이 됐다. 가까스로 바르샤바 가는 임시 기차표를 얻었고,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바르샤바에 도착해 촌뜨기처럼 헤매다 이곳 호스텔을 간신히 찾아온 게 아주 오래 전 일만 같았다.

혼자 여행 다니세요?어떠셨어요? 후루룩~.”

저녁을 먹었어도 한국의 맛은 공감각적으로 매혹적이었다.

“그럭저럭 다닐 만했어요. (꿀꺽) 그나저나 두 분은 한국에서 바르샤바로 곧장 오셨어요?”

“후루룩 쩝쩝, 아뇨. 저는 블라디보스톡에서부터 출발해서 오늘로 8일째예요.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답하느라 바쁜 청년은 미국 유학생이었다.

“사진학과를 졸업하긴 했는데, 요즘 이쪽으로 아마추어가 워낙 많아 딱히 무얼 해야 할지 고민되더라고요. 읍읍읍, 하아. 그래서 여행을 나섰어요. 인생 길 찾기랄까요? 부모님께 손 벌리기 송구해서 망설이던 차에 아빠가 다녀오라 돈까지 쥐어주시길래, 유럽 오는 제일 싼 표를 구해 떠나왔죠. 후루룩.”

돌아가는 비행기는 오픈 티켓, 부모님 주머니를 터는 입장이라 호스텔을 전전하며 한 끼만 제대로 먹자는 정신으로 세상 일주 나섰다는 청년은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불안해했다. 그래도 만날 기회가 적어도 나보다는 많을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쪽도 혼자 여행중?”

연장자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우연찮게도 나와 동갑내기인 아저씨는 브로츠와프의 한국 대기업 지사장을 지내다 최근 퇴직하셨는데, 지인들도 만나고 유럽연합 내 급성장하는 폴란드에서의 신사업도 구상하며 자유여행을 다녀볼 작정이랬다. 크라쿠프 민박집 청년 사장이 폴란드의 가능성을 역설하며 사업을 구상할 때 콧방귀를 뀌었는데, 괜스레 술김에 떠벌린 소리가 아녔나 보다.

“폴란드는 몇 년 전 중국 같아요. 2010년만 해도 중국 베이징에 가면 웃통 벗고 일하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죠. 그곳을 3개월에 한 번씩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갈 때마다 변화하는 속도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거든요? 지금 여기가 딱 그래요.”


나도 이곳 호스텔 매니저의 태도에 적잖이 놀랐다. 여태껏 지나온 여느 도시, 어느 숙소의 매니저보다 노련했기 때문이었다.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이 곳을 찾느라 애먹었다 입을 떼자, 그녀가 답했다.   

“대신 조용하잖아.(그러니 입 닥치고,) 4박 이상이면 빨래가 무료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이에 해당되지 않아. 여기 열쇠, 캐리어는 들어줄 테니 잠깐 기다려.”

그녀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 리셉션층에 함께 꾸진 휴게실을 둘러봤다. 신축 호스텔답게 게스트용 컴퓨터도 신형, 이름을 써놓은 음식물은 퇴실 후 바로 버려져 냉장고도 거의 새 것, 식기세척기 설치된 개수대도 쓴 바 없는 듯 깔끔했다. 그리고 마실 나갔다 돌아오던 길, 어느 건물 꼭대기에 빛나던 두 네온사인이 전쟁으로 무너졌던 바르샤바가 일국의 수도로 말짱하게 수습되다 못해 급변하고 있음을 일러줬다.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의 빨간 로고, 그건 바르샤바가 어느 모로 보나 자본주의를 맘먹었다는 시그널이었다.


“어떻게 여행 오셨어요?”

아까의 시간을 돌이키느라 넋이 나간 내게, 한국인 연장자가 질문했다.

“저, 저요?”

뭐라고 답해야 될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을지, 잠깐 머뭇거렸다.

“출판 쪽에서 일하고 있는데, 음, 회사 안식년이라….”

두 사람한테 꼬치꼬치 물어놓고 막상 수건돌리기 술래가 되고 보니 말문이 막혔다. 여행의 처음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 혹은 왜 여행을 떠났는지 잠깐 난감해졌다. 쫓기다시피 떠나왔을 뿐, 나는 여행의 처음에서 한 치도 나아간 게 없는 것일까.

딴 생각에 빠져 이들과의 대화가 헛돌다, 이날 국립박물관 외 간 곳도 없으면서 단체 수학여행객에 떠밀려 피곤했다며 방으로 올라왔다. 돌아갈 때가 되고도 충분히 쉰 것 같지 않고, 손아귀 꽉 차게 움켜진 마음도 없고…. 비는 내렸지만 해갈하기엔 충분치 않은, 가뭄의 끝만 같았다.      



#2 바르샤바에서의 둘째 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세요, 마담.”

트램 손잡이를 붙들고 휘청대는 동양인의 갈 길을 알려주던 할아버지는 영어가 유창했다. 그는 와지엔키 공원도 좋지만 쇼팽박물관을 꼭 다녀가라며, 그보다 바르샤바에 왔으니 음악회 관람이 필수라 강권했다. 마침 그날 저녁 당신 친구가 피아니스트를 지내는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니 공연이 있다며, 지도에 공연장 위치까지 표시해 주셨다. 저녁 무렵 공연에 벌써부터 신나 있던 할아버지는 버스 좌석 넘치는 몸매만큼 품위 있어 보였다. 저리 살아가도 괜찮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원 내 미술관은 오후에 개장하고 오전에 도착한 어린이들이 키즈 영화관으로 쏠려 들어갔다. 공원을 산책하고 식물원을 지나 주말에나 야외 공연이 있다는 쇼팽 동상을 마주하고 섰을 때, 꽃을 든 아저씨가 시간을 물어봤다. 초조한 그는 아닌 게 아니라 5분이 멀다 하고 행인마다에게 시간을 묻고 쇼팽 동상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기다리는 사람 오지 않던 공원은 가을마저 떠나버려 휑뎅그렁했고, 쇼팽의 피아노 소곡이라도 기대하며 눌렀던 벤치 부저는 고장 나 쇳소리만 났다. 직진해 당도한 빌라노프 궁은 철통 방어 중, 철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완장 찬 기자단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카메라 기자 아무에게나 물었더니 그날은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가 있어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을 거랬다. 그렇게 반나절이 속절없이 흘렀다.

 

“니혼진데스까(일본인입니까)?”

소장곡이 총 300여 곡에 이른다는 쇼팽 박물관, 유리관에 앉아 이어폰을 끼거나 전자 악보책을 넘기면 익히 들어봤던 피아노곡이 혹 몰라도 쇼팽의 선율이겠거니 들으며 금세 행복해지던 곳. 이곳에서 비슷한 때 입장해서 박물관을 돌던 할머니가 출구에서 말을 건넸다.

“이이에, 강꼬꾸진데스요(아뇨, 한국인인데요).”

고작 몇 개월 배운 일어였는데, 여행지 요모조모 쓸 데가 많았다.

“혹시 음악 관련한 일을 하세요?”

곡을 들을 때, 피아노 앞에 섰을 때, 부지런히 움직이는 할머니의 손가락을 봤기에 내가 여쭸다.

“호호, 전 음악을 엄청 좋아할 뿐예요. 딸아이를 보러 왔다 함께 여행다녔는데, 오늘 걔가 떠났네요.”

따님은 자신의 또 어린 딸아이 때문에 급히 파리로 돌아갔단다. 그래서 혼자가 되어 적적해진 일본 할머니는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 쇼팽의 곡을 자주 연주했다며 참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이때는 둘 다 서툰 영어로 대화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아세요?”

이리 갑자기 물으신다면….

“아뇨. 피리는 잘 불어요.”

어쩌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전 요즘 다시 피아노를 배운답니다. 치매 예방에 아주 좋아요. 한 번 배워 보세요. 음악이 우리 삶을 얼마나 우아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일본 할머니가 점찍어둔 일식집이 있댔고, 허기지면 손발이 떨리는 나이라서 마다할 처지가 못됐다. 덕분에 연어도 맛있게, 미소 된장국도 맛나게 먹었다. 정작 당신은 일본만 못하다며 많이 드시지 않았지만. 돌아가면 당신의 치매 걸린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부터 가야 한다는 일본 할머니는 피아노를 꼭 배우라 또 한 번 권하셨다. 흰머리가 제법이셨지만, 헤어지는 뒷모습에 격이 있었다. 저리 살아져도 좋겠다.  



#3 여행의 마지막 밤

홀로코스트를 세상에 처음 알린, <비밀 국가 이야기>의 저자 얀 카르스키 동상.

다음 행선지는 폴린 유대인 역사박물관이었다. 혹여 일본 할머니가 동행하자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괜한 짓이었다. 한숨 자고 그리 가겠다며 일본 할머니는 당신 숙소로 돌아가셨다. 그녀 개인이야 잘못이 없겠지만, 엄연히 일본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나라를 유린했던 제국주의 전쟁의 장본인이었다. 그곳에 전시된 홀로코스트 현장을 함께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겠다.

바르샤바 게토 지역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폴란드까지 이동하고 이동하면서 분별됐던 유대 1,000년의 삶이 거하게 펼쳐져 있었고, 나는 좀처럼 마주하기 힘겨웠던 20세기 진실까지를 긴박하게 쫓아다녔다. 당시 전시실 밖은 대통령을 맞느라 잠시 소요가 일었는데, 아침나절 빌라노프 궁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이유가 여기 개관기념행사 때문이려나 물어보려다 오래 전 도시가 침묵했듯 내 입도 무거워졌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바르샤바 유대인만도 36만 명, 그들을 기리기엔 지나치게 시끄럽고 화려했다.


“레이디스, 젠틀맨~.”   

18시 정각, 이번엔 스무 명 내외 객석이 자리한 작은 음악회. 잠코비 광장 뒷골목으로 잡아끄는 손을 따라가면 ‘타임 투 쇼팽’으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보타이에 슈트 멋진 노신사가 이곳 쇼팽의 도시에 온 여행자들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아주 뒷자리 앉은 어린 친구에게도 찾아줘 고맙다고 말했다. 정작 꼬마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부끄러운지 제 부모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마침내 진행자가 이날의 피아니스트를 소개하자, 진분홍 구두 파란 원피스를 차려입은 피아니스트가 그윽한 눈빛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묵직한 첫 음은 쇼팽의 ‘발라드 23번’이었다. 처음 공항에서 만났던 이탈리아행 친구와 자그레브행 친구부터 이날 쇼팽박물관에서 만난 할머니까지 숱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나름의 길을 떠났던 걸 떠올리다 녹턴이 지나갔다. 무어라도 되어보지 못한 채 어영부영 반백 살, 뒤를 보면 많이 늙었다 싶어도 앞을 보면 아직 젊은 나이, 이번 여행에서 찾아온 몇몇 생각을 배반하지 않는 한 작은 삶이라도 온전히 살아지겠지.

뒤이어 왈츠 몇 곳이 흘렀다. 사는 동안 너무 힘들어간다 싶으면 은근슬쩍, 손아귀를 벗어난 요요처럼 길 떠나야지. 일본 할머니처럼 피아노를 배우거나 놀이가 될 취미를 찾아가야지. 뭐, 그게 통하지 않는다 해도 삶은 경쾌한 속도로 흘러갈 테고, 그 박자에 맞추어 살다 보면 어느덧 저문 강가에 서 있으려나.


막간, 준비된 음료와 술을 마시며 내 뒤에 앉았던 한국 회사원들과 저녁을 약속했다. 이 여행 마지막 만찬이 될 터였다. 그리고 다시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자 마주르카, 파리로 망명한 쇼팽이 사랑했던 폴란드의 전통 춤곡이 장내를 휘감자 발가락 장단 맞추며 흥겨워졌다.

사람들은 제각각 부피 다른 결핍과 그만만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때로는 슬프고 화나는 일도 있지만 즐겁고 감미로운 인생, 나쁜 일은 지나가는 소나기라 생각해야지.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뚜렷한 약속 하나 품지 못해 아쉬웠지만, 집으로 향하는 조약돌 몇몇 움켜쥐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까짓것, 마음먹지 않고 살아가면 또 어떨까.  


작은 음악회는 쇼팽의 폴로네즈 제6번 ‘영웅’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비록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건 아니었지만, 이 작은 음악회를 위해 홀로 마음을 다해 준비했을 피아니스트에게 갈채가 쏟아졌다. 이는 그들과 나의 고독하지만 끝까지 가야 할 작은 여행에 대한 응원이기도 했다. 우리는 작고 소중한 저마다 삶의 영웅들, 나 또한 한 달 간 이별을 끝내고 나머지 삶을 마주할 배짱이 생겼다.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은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 우리 모두의 인생 여행에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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