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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Nov 06. 2019

벌써 갱년기라니, 거짓말이면 좋겠어

_ 여행 21일째, 그단스크 2

#1 되고 싶은 무엇

만날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걸 알게 된 둘째아이는 대중없는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고열로부터 해방됐다. 한편, 직장 후배의 안부 문자에 돌아갈 날이 코앞이란 걸 실감한 나는 석연치 않은 감정에 부쩍 초조해졌다. 그단스크 중앙역에서 50km 달려 말보르크역까지, 몇 시 몇 분에 도착하겠단 약속이 새겨 있지 않은 이날 기차표처럼 아무 날 아무 시 귀환 티켓이면 좋으련만. 사흘 후면 또 다시 지구 저 너머 삶을 시침 뚝 떼고 살아가야 한다.

오전 9시 6분, 로컬 열차는 남루했고 어지간히 덜컹거렸다. 마침 옆자리 왁자한 학생들의 수다가 대단했는데, 말보르크 성문 앞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체험학습을 할 참이지만 교실 밖이어서 무척 들떠 보였다.

그래, 학교 밖은 언제나 즐거웠지. 고3 수험생이 되기 전 초조했던 그 겨울, 낙동강 철새를 보러 갔던 기찻간도 저들처럼 짹짹거렸지. 금기된 많은 것을 함께했던 악동들은 당시 어른들 눈엔 시간 모르고 날아온 제비떼 같았을 게야. 엄동설한 같던 고3이 들이닥쳐 급히 교실로 귀환했을 때, 오직 친구만 낙오된 게 안타깝지만 말야.

언변 좋고 넉살은 더 좋던 그 친구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끌려갈 주제를 면하려 선배가 물린 방송국 스크립터 자리를 꿰차고 분발하는 척할 때였다. 어찌 알고 신천역 근처 회사를 찾아왔는지 1층 수위실에서 다짜고짜 전화를 넣은 그때는 본사에 마스터 필름을 넘겨 한갓진 날이었고, 유선전화기 줄처럼 배배 꼬여버린 하루의 끝이었다.

당시 여의도 본사는 간판스타급 손석희 씨와 백지연 씨의 가세로 더 소문 난 MBC 노조 쟁의 중이어서, 대자보 너울대는 기둥을 돌아 공정방송의 외침을 비켜 편성국으로 오르자면 자연 낯이 뜨거웠다. 그래봤자 정규직도 노조원도 뭣도 아니었지만 사측에 빌붙었다는 과민함은 어쩔 수 없어 신천시장을 배회하다 느지막히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야단을 작정한 선배를 맞아야 했다. 그리하여 일보다 도망칠 구실이 절실했기에, 그 친구를 둘러싼 불신과 의혹의 소문은 다 잊고 반갑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술잔을 한두 번 부딪고 며칠간 쪽잠으로 헤롱거렸던 내게 친구는 실실 웃음을 풀었다. 그리고 실없는 얘기 끝에 눙치듯 제 자리를 부탁해 왔다. 강남 몇 집 과외비를 추렴할 때보다 못한 임금에, 프로그램이 결방되면 조연출의 제량껏 부풀린 진행비에서 잔푼어치 할당받지 않는 한 국물도 없는 계약직이라 말했다. 아무려나, 그런 것쯤 상관없다던 친구는 좀 더 노회한 웃음을 지었고 허둥지둥 적절한 자리가 나면 소개하겠다 약속하곤 혼자가 됐을 때, 작가가 PD가 성우가 그 무엇이 되겠다며 당장의 아무 일에라도 덤볐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들 사이 무얼 되길 바라는지 모르는 얼굴은 나 혼자였다.


손석희 씨가 포승줄에 묶였을 무렵 새록새록 밤을 잘 지샌 덕인지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정치드라마 팀으로 옮겨갔다. 행정 부서의 소품 지원마저 남다른 대접을 받던 팀이었지만 여전히 스크립터, 기차를 몰아갈 화부가 모자라 간이역에서 궁금증을 못 참던 아무나를 태운 듯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역할이었다. 친구가 앙망하던 대스타들의 대본 리딩 때도, 덕소와 민속촌과 스튜디오를 오가던 촬영 때도, 역사를 휘저었던 정치인 인터뷰 때도, 오랏줄에 묶인 사람처럼 답답한 건 여전했다. 곤경에 빠지면 뒷문 열어줄 마음 넉넉한 선배는 생겼으나, 마음 쏟을 연인을 찾지 못한 사춘기 소녀처럼 안절부절하던 스스로를 속이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지역 뉴스에 등장했단 소식이 전해졌고, 별 유쾌하지 않은 사건으로 주목받던 친구는 일찌감치 남동생들의 엄마 노릇을 해야 했던 집안 사정이 참작되어 벌금형으로 풀려났다는 소문도 덧들었다. 거짓말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던 친구의 사는 방식을 납득할 순 없었지만 근성만으로 살아낼 미래가 아니어서 함께 씁쓸했고, 건강을 핑계로 방송국을 그만두면서 사회 초년생인 우리끼리의 약속은 애당초 예상했듯 허망한 일이 되고 말았다.


동안 열차 내 학생들의 목소리는 노면을 달리던 바퀴소리에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잠 들어도 찌든 채인 어른들과 대조적으로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깔깔깔 한 덩어리로 웃는 저 아이들이 세상 나서기 전에 되고 싶은 무어라도 품어야 할 텐데, 남일이 아니란 듯 다시 초조해졌다.

#2 말보르크성이 지켜낸 것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말보르크 성은 20헥타르 평평한 지면에 축성된 세계 최대 중세 고딕성이어서 반나절 돌아다닐 생각이었건만,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쉽게 속내 드러내지 않는 사람처럼 고집스럽고 단단한 층층의 벽돌이 멀고 멀었다. 단단한 각오로 매표소에서 신청한 오디오 가이드와 더불어 로우 캐슬-미들 캐슬-하이 캐슬 순으로 나아갈 텐데, 역사는 거꾸로 증축되었다 했다. 해자도 풀밭이 되어버린 마당에 그걸 따지는 건 불필요했고, 줄을 잡아당기면 제아무리 날랜 사자라도 뼈가 으스러질 만큼 뾰족하니 육중한 철문이 내려오는 건 영화에서나 보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하여 해자였던 풀밭 지나 망루 또 해자였던 풀밭 지나 망루인 첩첩 요새를 29.5즈워티, 한화 1만 원에도 못 미치는 입장권으로 요새를 함락하기로 했다.


노가트 강변 요새에서 제일 먼저 만난 로우 캐슬은 과거 대형 무기고와 마구간과 곡물 창고와 양조장 등이 위치했던 곳으로, 현대 차량 수백 대가 지나도 될 만큼 넓직했다. 최대 3,000명을 수용하던 성, 그 안에서 복작댔던 인생들이 무엇을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마시던 그 많은 삶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시 망루와 해자와 성벽을 거쳐 성경에 종종 출현하는 참포도나무 열매 주렁주렁 그려진 그물형 천장의 홀을 지나면 미들 캐슬의 뜰이 나온다. 여기 미들 캐슬은 서유럽에서 방문한 기사들이 머물던 곳이어서 작은 침실과 병든 기사들을 위한 진료소와 대형 응접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대형 응접실에서는 모두들 해보듯 바닥에 난 금속 구멍에 손을 대보았는데, 장작을 때 켜켜이 돌이 데워지고 그 돌을 덮고 있던 바닥의 구멍으로 열이 퍼지면 1주일도 거뜬히 지낼 수 있다던 중세식 난방 시스템은 다 지난 전설처럼 차가웠다.


작은 뜰을 두고 높다란 하이 캐슬은 요새의 요새여서, 공포를 자아내는 가고일이 새겨진 은밀한 복도를 지나다녀야 했다. 문을 열면 당시 성주를 중심으로 한 고관들이 중요 정책을 결정했다는 챕터 하우스. 등받이가 가장 높은 성주의 자리에 앉은 관람객을 중심으로 하나둘 국정을 논하는 기사가 되어보듯 벽으로 둘러진 의자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한 채 쑥스러운 웃음을 나누었다.

하이 캐슬의 뜰 북서쪽엔 요새의 수도원 부엌이 있었다. 중세의 식탁에는 견과류, 건포도, 무화과, 아몬드 등과 수입 과일을 아낌없이 차려 부를 과시했다는데, 지금의 식탁에선 딱딱한 빵과 과일과 치즈 등 많고 많은 모형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래도 독일, 헝가리,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와인뿐 아니라 몇십 종류의 맥주를 구해 마실 만큼 풍요로운 시절을 보냈다는 건 부엌의 규모로 짐작할 만했다.

돌아나오는 길 장미는 활짝 폈는데 이들을 돌봤던 수도사들은 무덤으로 남았으니, 어떤 요새라고 시간을 막아낼까. 말보르크성도 입구 내걸린 사진처럼 1945년 연합군의 폭격에 골조만 남았다 재건되었다. 요새의 요새였다는 하이 캐슬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기 성 마리아 성당의 새로 덧댄 하얀 내벽은 상처 후 새 살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알려진 대로 십자군 원정은 속셈 제각각이었던 왕과 교황과 군인과 수도사 들이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뭉친 이래 9차례나 이뤄졌다. 그 중 3차 때,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공작이 중도 귀국하며 남겨진 독일인 병력이 성지 순례를 오던 그리스도 교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결성된 게 튜턴 기사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단으로 몰렸던 템플 기사단이나, 그리스도교도를 위한 진료소 건설을 앞세워 로도스 섬으로 옮겨간 후에도 이슬람 배를 노략질하며 해적이 되었던 병원 기사단처럼, 쓸모가 다하고 버려졌던 튜튼 기사단도 살아가기 위해서였겠지만 한층 영악했나 보았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이곳 이교도 정복을 요청받아 왔던 그들은 할 일을 마치고도 돌아가지 않은 채 이 지역을 점령키로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이끈 야기에워 왕에 의해 그룬발트 대전이 벌어지고, 이곳으로 오던 길 기마상으로 서 있던 카지미에쉬 왕이 이끌던 13년 전쟁이 끝난 1457년, 거의 150년 만에 폴란드가 이곳을 되찾은 다음에도 요새의 주인은 여럿 바뀌었다. 프로이센령이 되었다 잠깐 폴란드령이 되고, 히틀러에게 넘어갔다 다시 폴란드에게 넘어오기까지 요새의 겉모습은 그렇다 치고 속도 많이 바뀌었다.'

그단스크와 가까워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 역사 전시실 기록을 의역해서 읽었으나, 그들이 지키려고 한 대단한 무언가는 쉬이 내줄 게 아닌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늦은 점심 이름부터 호기로운 ‘고딕’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폴란드 마지막 왕의 세프로부터, 그러니까 14세기부터 내려오던 레시피대로 만든 요리를 대접한다니 기대가 컸다. 우선 따끈한 스프와 참깨빵이, 뒤이어 잡곡 튀김옷 입혀진 슈니첼과 감자, 비트, 방울다다기양배추 등이 올려진 접시가 순서대로 차려졌다. 우리가 추구하고픈 많은 생각이, 지키고자 하는 여러 삶이, 결국 먹고 사는 문제로 귀착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3 되어야 하는 무엇

소폿행 기차는 1량에 28좌석이 갖춰진 작은 열차였다. 군무를 추듯 까딱까딱 62km, 이미 저녁이 다 와버린 소폿에 내렸을 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단스크로 돌아갈 때는 도시고속철도라는 SKM을 탈 거라 다행이랄까, 예약할 필요 없이 자주 다닌다 해서 곧장 시내로 향했다.

이곳 선원들을 위한 표식이었다는, 거의 50미터 높이의 성 조지 성당 탑이 100년도 지난 지금의 여행자에게 이정표가 되었다. 이를 끼고 우회전하면 몬테 카시노 거리. 과거 왕실의 휴양지답게 그리고 대통령의 여름 별장답게, 거리는 갈수록 사람들로 북적이고 용도 다른 가게들로 붐볐다. 유명세를 타던 '삐뚤어진 집'은 외관 말고 별 볼 일 없어 곧장 직진했더니 바다로 쭉 뻗은 하얀 데크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을 지나 무료 개방중인 데크엔 사람보다 왕기러기떼와 잿빛 까마귀떼가 임자로 노릇하고 있었다. 1827년 개인으로부터 마련된 작은 부두는 이제 총 515.5미터, 거꾸로 기역자 모양의 마리나소포트는 유럽에서 가장 긴 목조 부두로 1987년과 1999년 소폿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만큼이나 유명했는데, 정작 나는 그 끝에서 출렁일 발틱해를 만나러 왔다.

수평선도 삼키어 경계가 사라져버린 밤의 발틱해. 기척해봤자 아는 체 하지 않고 무슨 말을 건네도 들을 생각 없는, 오래된 친구의 무소식 같은 까만 바다 앞에서 나 홀로 한 뼘 두 뼘 마음속을 들여다봤다. 들락날락 파도에 변성하는 바윗돌처럼 사회생활 처음부터 지금까지 생각은 많이 달라졌으나 삶의 무게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사회생활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오리무중이었던 나는 먹고 살아야 해서 그리해 놓고 기사단처럼 고상한 뭔가를 추구한다 살았던 건 아닐까.

이제 돌아가면 되고픈 뭔가가 아니라, 되어야 하는 것에 삶을 내주어야 한다. 여행을 떠나며 마음먹은 일이면서도, 회사 사물함 이름표를 떼어버릴 때를 생각하면 착잡해지는 심정을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자라는 아이들의 한때를 지켜야겠다 작정했을 때 저 바다 썰물 빠지면 혼자 뒹굴 소라껍데기 같은 처지겠다 싶어 아연했으니, 마음 둘 뭔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서였나, 막 결혼한 회사 후배가 내 세대 행복 지참금처럼 여겼던 아이를 갖지 않겠다 선언할 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쌍둥이 낳고 잠깐이겠다 싶었지만 단절된 경력을 되살리기 어려웠고, 재취업에 나섰을 땐 최적의 자리 찾기가 과욕이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리고 벌써 갱년기, 거짓말이면 좋겠지만 자신의 추구를 저버리지 않던 후배들에 비하자면 젊음도 기회도, 그 무엇보다 열정이 예전만 못했다. 아이들만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여기저기 떠돌면 어떤 마음 하나 생겨날까 계속 추궁했지만, 야단스러운 바닷바람에 이날도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 쌍둥이 임신 때처럼 부푼 달이 떴고, 그때 품었던 감사가 떠올랐다. 이후 삶을 견인하기 적당한 마음일지 어떨지, 두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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