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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Nov 04. 2019

인생은 리얼리티와 판타지 그 어디쯤

_ 여행 19일째, 크라쿠프 2

#1 숲속 나무집에서의 꿈

'허풍선이 아버지와 달리, 유리구슬 눈을 가진 마녀 따위 믿지 않는 아들은 사실을 다루는 기자다. 그러니 시종일관 말도 안 되게 낭만적이고 번드르르한 모험 일색 아버지의 과거사에 신물이 날 수밖에. 하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아버지의 삶은 거짓이 아닌 성싶고, 마침내 아버지의 장례식 날 그 드라마를 함께한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조문객으로 등장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진실로 다가오는데….'

문득 영화 <빅피쉬>의 줄거리가 떠오른 건 자코파네 숙소의 벽마다에 걸린 액자들을 보면서였다. 액자 속 흑백 사진에는 처음 지어진 모습대로의 숙소가 덧문이나 이층 유리문이 달리지 않은 날것으로, 누구의 몸을 보듬기 어려웠을 그 목조 건물 앞에는 과거 시점에서 잘 차려입은 일가족이 나란히 서 있었다. 또다른 사진에는 갈색 곰과 회색 늑대가 활개쳤을 숲으로 사냥을 나섰던 어른들이 어제의 마부처럼 검은 가죽끈 세로박음질된 양가죽 바지에 양털 조끼를 입고  엽총을 둘러메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 도끼를 든 젊은이와 파이프를 물거나 탄총을 멘 콧수염 가지런한 어른들이 삶의 위험천만한 현장으로 떠나기 전인지 어쩐지, 잔뜩 멋을 내고 포즈를 취한 사진도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숲에서 실종됐거나 야생의 희생양이 됐겠지만, 사진은 그 모두를 판타스틱한 숲의 정복자 혹은 생활자 즈음으로 남겨두었다. 하여 인생의 얼룩일랑 드러내지 않은 일련의 가족사진은 판타지일 수밖에 없었다. 까칠한 현실일랑 암전시킨 채 영광된 순간만 조명한 가족 연대기가 갖는 내러티브, 이 점이야말로 전후 신산한 가장의 일상을 우스꽝스러운 갱스터 노릇에 견주던 영화 속 아버지의 허풍과 맞닿아 있었다.

숲속 나무집에 비하면 우리집은 얼마나 삭막한지, 집 평수를 줄여 이사할 때 아이들 장난감은 물론이거니와 내 애정하는 책들과 소싯적 음악 깨나 듣던 남편의 오랜 LP판과 축음기, 부부의 결혼 액자 등 삶의 유쾌함을 우르르 몰아냈다. 그나마 박스에 묶여 살아남았던 부부의 결혼식 앨범은 발견자였던 쌍둥이로 하여금 제 부모가 어느 나라 공주와 왕자였겠거니 환상을 품게 했고, 함께 남았던 저희 성장 일기장은 단란한 가족의 한때를 떠올려 안도케 했다.  

그러니 가족사는 부풀려지고 윤색되어도 무방하겠다. 아무 해될 게 없는데다가, 어느 인생이고 시원찮은 뿌리로 여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일찍 돌아가셔서 많은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친정 부모님도 한때 자개장 깊숙이 금괴인 양 보관하던 보따리 하나 갖고 계셨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열어봤더니, 아리송한 한자들이 이씨 집안 어디까지를 나열하고 있는지 나로선 알아볼 수 없던 족보였다.


시아버님의 아버지 이야기는 시집 와서 참 많이 들었다. 새 식구가 들어오고 손주가 늘어날 때마다 시아버님이 풀어냈던 아주 윗대로부터의 이야기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물레질하듯 되풀이됐다. 솔직히 며느리들은 하품을 해댔으나, 아직 꼬마인 손주들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가 얼마나 많은 자손을 뿌렸는지 몰라 신통방통 내력에 재밌어라 했다. 부모의 이야기가 나의 일부가 되고 우리의 얘기가 아이들의 근간이 되고, 다시 그 뿌리가 다음 가지를 내면서 가족은 이어지겠지.

돌아가면 2미터 남짓 장신의 할아버지 위에 할아버지 위에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휘둘렀다는 무사의 칼에 잇대어 많은 이야기를 부리고 싶어졌다. 여지껏 박스에 갇혀 있을 가족사진을 우선 액자로 삼아 못으로 쾅쾅 박아야지. 어쩌면 이곳 식당 납작 깔린 가죽이 살아 있는 곰으로 둔갑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곳 몇 대에 걸쳐 내려온 비밀의 천연 요거트를 두고, 그 곰과 엄마가 대단한 실랑이를 벌였다는 허튼소리가 보태질지도 모른다.



#2 자코파네에서의 목가적 시간

한잠 자다 체크아웃 시간을 놓칠 뻔했다. 숲으로 오갔던 사람들의 땀을 주춧돌 삼아 기둥이 세워지고 마루 왁스칠 더해져 잘 가꾸어진 숙소가 무턱대고 포근해서 그랬을까. 히터 옆에 놓아둔 전날 젖어버린 양말과 운동화는 흙물이 빠지지 않은 상태로 바짝 말랐고, 산을 올라 노곤했던 몸은 아침을 먹자마자 퍼지더니 아름드리 커튼으로도 가려지지 않던 햇볕에 함부로 그을렸다. 그러느라 구바우프카 산으로 오르는 길이 왕창 늦어졌다.  

한적한 동네라 방심하던 차, 자코파네 조형물 커다란 공원으로 그때를 기념하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어제의 도심, 그러니까 크루포프키 거리에도 많은 관광객이 북적거렸다. 일직선 거리의 남동쪽으로 가면 전날의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에 닿았고, 그 북서쪽으로 꺾어 내리 걸으면 지하보도를 따라 올라 구바우프카 등산열차인 푸니쿨라를 탈 수 있었다. 이날은 북서쪽으로 향했는데, 일요일을 맞은 그곳도 관광객 행렬로 복닥대긴 마찬가지였다.

오래 기다린 데 비해 무지 싱겁게 산을 오르던 푸니쿨라는 해발 1,123미터에서 멈춰 섰다. 산등성이 놓인 캠핑용 의자에 앉으니, 어제 오른 타트라 산맥이 마주하고 있었다. 최고봉이 2,600미터라 했건만 거기서 보니 도긴개긴, 높이를 짐작 못할 만큼 멀고 멀었다. 가장 높은 데서 떨어진다는 비엘카 시클라바 폭포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가장 크다는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도 당연히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단속 없는 심전도 그래프처럼 오르락내리락, 화강암인지 석회암인지 하늘과만 구분된 겹겹의 능선은 무궁한 생명선 같았다. 알프스 산양이 뛰어다니고 때마다 짝짓기를 시도하는 마모트와 그들을 먹잇감 삼을 점박이독수리가 살아가는, 에델바이스와 스위스 소나무와 무엇이 될 홀씨까지 품은 거대한 둥지. 그곳과 이 산 사이 길을 내고 집을 올린 마을은 고작해야 몇 줌이어서, 숲속 나무집의 가족사에 비해 대서사극일 수밖에 없는 자연이란 현실 앞에 나는 더없이 겸허해졌다.


내려오던 길, 1993년과 2001년 두 번에 걸쳐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개최된 자코파네에서 3,000원가량의 저렴한 루지를 타지 못해 안달할 줄이야. 이날 산장 카페에서 요기할 때까지만 해도 스키를 탈 철이 아니라 문을 닫았겠거니 생각했다. 뒤늦게 개장한 매표소를 알아본 이는 머리 벗겨진 아저씨. 그가 끼일 듯 말 듯 루지를 타고 함박웃음으로 내려와, 기회를 놓친 하산행 푸니쿨라 승객들은 홀로 꿈을 이룬 그에게 다함께 박수쳤다.

산 아래 재래시장도 일요일을 맞아 예외 없이 붐볐는데, 양을 키워보지도, 만져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죄다 진짜 같은 양털 가죽 제품들이었다. 그쪽에서 올려다보면 산중턱 모락모락 김 오르는 오두막집, 산사람들인 구랄족이 키우는 양들의 것이랬는데 붉은 알 목걸이와 함께 눈요기로 그쳤다. 대신 나무주걱과 도마와 구랄족이 만든다는 훈제 양젖 치즈인 오시치펙은 딸기잼함께 넘치게 샀다. 주섬주섬 이곳 삶을 거둔들 자코파네를 떠나는 아쉬움이 가시진 않아 밍기적대다가 오후 1시, 즈음하여 출발하는 크라쿠프행 버스에 올랐을 때 목가적 판타지를 씻어내겠다는 듯 하늘이 우르르쾅쾅 비를 쏟았다.     



#3 크라쿠프에서의 현실

뭘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시간. 원래대로라면 숙소에 들러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구시가지를 제대로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날씨처럼 오락가락하는 마음이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때 지난 불만을 변상하겠다며 이날 저녁을 대접하겠다던 청년 사장의 늦은 연락 때문이었다. 그치가 주방을 얼쩡거릴 때 부실한 방문 안에서 부스럭거리긴 뭣해서 숙소로 가던 발길을 돌려 시내로 향했다.

차라리 여대생을 따라갈 걸 그랬다. 도로 정체가 심해 자다 말다 어디가 어딘지 헤롱댈 때, 어느 정류장에선가 올라탔던 옆좌석 동행자 얘기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크라쿠프 야기엘론스키 대학 졸업반이었다. 그러니까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시작과 끝>이란 시집으로 내 인생에 훅 들어온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까마득한 후배였다.

“흐음, 맞아.”

어쩐지 심드렁했다. 폴란드를 흥겨워하는 이방인에게 당장에라도 나고 자란 이 도시를 벗어나 파리에서 직장을 구하고 싶다던 폴란드 여대생은, 주변 친구들 대개가 저처럼 서유럽에서의 삶을 꿈꾼다 말했다. 그 로망의 근거를 묻진 못했지만, 대학 졸업장이 예전만큼 먹고 살 길을 보장하지 않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졸업하고 취직하면 여기저기 여행 다니고 싶어. 프라하, 잘츠부르크…, 흐흐, 바르샤바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인생은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오가는 시소 놀음 같은 걸. 그래도 무턱대고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싶었다.

“폴란드는 정말 매력적인 나라야.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은 맛났지. 그러니 다 잘될 거야.

“으음, 나도 치즈는 정말 맛있다고 생각해.”

엉성한 응원이 멋쩍을 무렵 크라쿠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고 부랴부랴 이날 샀던 오스치펙 한 덩이를 건넸더니 여대생은 손사래치며 되레 구시가지 현지 맛집을 소개해 줄까 물었다. 물론 그걸 마다하고 숙소로 가다 말았으니, 또 다시 배배 꼬이는 크라쿠프 여행길이었다. 청년 사장의 저녁을 거절할 걸 그랬나, 여대생이 소개한 맛집에서 짠 골롱카를 만난다면 저녁 한식 차림이 아쉬웠으려나… 하고 만약을 되풀이하다 어느새 구시가지에 당도했다.

지난날 부리나케 걸었던 시장광장으로 걸어갔다.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웠던 두 사람,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와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으로도 이름난 타테우시 코시치우시코 장군이 각각 동상으로 그리고 사후 200주년 기념전 플랜카드로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이들이 꿈꿨던 세상이 폴란드 여대생에게 닥친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지 어떨지 몰라도, 불 밝힌 시장광장은 목숨을 걸 만큼 아름다웠다!

저녁 7시의 숙소엔 함께 방을 쓸 아가씨와 민박 사장의 지인이자 이곳 대학 교환학생(말하자면 아까 폴란드 여학생과 동창뻘 되겠다)으로 와 있다는 남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이란 것 외 공통점이 별로 없던 기묘한 조합에 젓가락 부딪는 소리만 크던 식탁은 몇 차례 술잔이 오가며 시끌벅적해졌다. 젊은이들의 많은 꿈이 오갔고, 와중 민박집 청년 사장의 이야기가 독보적이었다. 뉴질랜드 이민 가족으로서의 삶에서부터 2011년 대지진을 겪은 이래 돌고 돌아 한국 미용제품 무역업 계획까지, 그의 일대기는 원대한 꿈을 향해 뻗어갔다. 숙박업에 좀 더 열정을 쏟아야 종잣돈을 거머쥘 텐데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다음날 이른 기차 때문에 조식을 안 먹겠다 했고 아가씨는 늦도록 자겠다 하여, 술이 불콰해진 청년 사장은 더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흥겹던 두 남자가 떠난 숙소는 음식찌꺼기 어룽진 식탁과 설거지거리 수북한 부엌 개수대 등으로 다시 복학생 자취방 같은 정취로 돌아갔다. 지글대던 고기와 막 지어진 밥과 된장국에 잠깐 지워진 냄새였다.

보다 못해 개수대로 나선 나는 년 사장의 삶이 리얼리티보다 판타지로 기운 것 같다며 혼자 따져대다, 인생 다음을 찾겠다 꿈꾸던 여행길에서 냄새 나는 물컹한 수세미를 쥔 현실을 내려다봤다. 현실은 꿈보다 재미 없고 꿈꾸는 시간은 현실의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해질 터, 나의 삶도 판타지와 리얼리티를 오락가락하는 청년 사장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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