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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는 당겨졌다

가장 사랑했던 조직을 배신한 남자

by 저스틴두잇

내가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사람이 싫거나 회사가 싫어서는 아니다. 단지 내 시간이 아까웠다. 운이 좋아 좋은 회사에 들어왔고 고연봉을 받으면서 이름만 들어도 좋은 회사라고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라는 게 문제였던 거 같다.


어릴 때부터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걸 너무 좋아했던 나는 회사에 대한 만족보다는 답답함이 컸고 "그래 이쯤이면 되었어"라고 말하기에 나는 너무 젊었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한하다고 믿었던 나는 '만족'을 택하기보다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일에 내 시간을 쓰고 싶었다.


물론 결정적인 한 방도 있었다. 평소 의미 없는 보고서 양식과 윗 분들의 반응에 걱정이 많았던 과장님이 퇴근 시간에 나를 불러 의미 없는 회의를 1시간 넘게 한 그 순간 확신을 가졌던 거 같다. 줄이 어떻다느니, 글자 크기가 크다느니, 이렇게 쓰면 윗분들이 안 좋아한다느니, 같은 이야기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수없이 반복하면서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는 순간 생각했다. 이게 내 미래구나. 내 시간이 앞으로 이렇게 쓰이는 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구나.


되돌아보면 내가 참 철없었다고 느껴지지만 그날, 그 순간 나는 견디기 힘든 분노를 느꼈던 거 같다. 얼마나 표정이 안 좋았으면 퇴근하려던 선배들 조차 내가 사고 칠까 봐 퇴근을 못하고 옆에서 일하는 척하면서 듣고 있었다고 한참 뒤에 알려줬었다. 그날 내가 선배들의 예상과 달리 잘 참았던 것은 사실 그 순간 퇴사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인체는 신비롭다. 그 결심 뒤로 나의 회사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평소 머리 아프다는 표현을 써본 적도 없던 내가 회사 다니는 내내 두통에 시달렸는데 퇴사를 결정한 다음날부터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팀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스스로 사표를 썼고 퇴사 일정까지 완벽하게 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조직에서 기대하고 실망하며 내 미래가 어둡다느니 어줍지 않은 한탄을 하며 머리 아파해야 할 일 자체가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임원들의 결정을 볼 때도 "아~ 그러시군요?(고생하세요 저는 나갑니다)", 윗사람 눈치 보며 퇴근을 못할 때도 "네! 저도 할 일이 남아서 더 있다 가겠습니다!(어차피 며칠만 하면 되니까~)", 규정 가지고 장난치며 정치 놀이하는 상사를 볼 때도 "필요한 일이죠! 그럼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알아서들 하시고요)"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나왔고 어떠한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결국 이 조직을 배신할 사람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에 알리기 전 약 3개월 동안 나는 가장 행복한 회사 생활을 보냈고 상사들로부터도 가장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야근도 불사하며 열정을 쏟으며 노력할 때는 건방진 사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키는 것만 하며 바보처럼 시간을 보냈더니 그 조직에 딱 맞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인정을 받게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조직을 배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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