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혈액형처럼 MBTI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단순 네 가지 조합이었던 혈액형과 다르게 MBTI는 16개나 되는 타입으로 생각보다 맞히기 쉽지 않다. 나는 O형에 ENTJ인데, 많은 사람들이 나의 혈액형과 ‘E’라는 부분까지는 곧잘 맞히곤 한다. 누가 봐도 확신의 O형에 확신의 E이기 때문이리라.
자기소개나 발표가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나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 일은 대부분 즐거운 일이었다. 시골개 같은 성격이라 새 사람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고 그 과정에서 웬만큼 빌런이 아니면 다 좋은 경험이지 혹은 새로운 인간 유형을 알았다는 배움으로 넘기고는 한다.
발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은 성취가 있었다. 행사나 술자리에서 MC를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러쿵저러쿵 길게 말했지만, 결론은 나는 외향인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I가 되는 순간이 있으니, 시댁에 방문할 때이다.
나는 왜 시댁이 어려운 걸까. 사랑과 전쟁이 심어준 일관된 이미지 때문에? 네이트판에서 읽었던 미친 시댁썰들 때문에? 결혼한 선배들이 들려주었던 돌아버릴 것 같은 에피소드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할머니 었지만 엄마에게는 호된 시어머니 었던 할머니와 K-효자의 대표 주자인 아빠 때문에? 원인을 찾자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사회가 심어준 오묘한 프레임과 여기저기서 접한 도시괴담 같은 에피소드가 나의 에티튜드를 시댁 한정 극 소심이로 만들어버렸다.
실제로 유부녀 11개월 차가 되어 살아보니 별게 없었다. 시댁에 가면 차려진 밥상을 먹고 귀여운 강아지를 안고 논다. 잠은 호텔에서 잔다. 추석은 시댁으로, 설날은 우리 집으로 간다.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지도 않고 나도 직접 연락하지 않는다. 솔직히 동거하는 것 같다. 연애의 장점과 결혼의 장점을 모아놓은 모양새이다. 아직까지는 그러하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봐도 나만큼 편한 케이스는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편하지 않다. 올해 회사에서 부서를 옮겼는데, 몇 달 안되었지만 놀랍게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따지고 보면 회사 사람은 남이요, 시댁 식구는 가족인데 말이다. 뭔가 이상하다.
이번 주말에도 1박 2일로 시댁에 들렀다. 시댁에만 가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말씀하시는데 귀를 기울이거나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시아버지도 확신의 대문자 E형이라 우리 부부가 내려가면 친척들을 다 불러 모아 대규모 저녁식사를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덕분에 이번 주말 시댁 방문 때에도 나 포함 9명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는 사이다나 홀짝 거렸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별다른 말을 하거나 대화에 끼지 않고 어른들이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다소 과장된 이미지. 요즘은 회사에서도 이정도는 아니다!
사실상 제2의 회식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는 고과권자가 7명이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평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웬만한 말은 삼키고 식탁에 휴지가 부족하거나 앞접시가 더 필요하지는 않은지 살펴보기만 했고 헤어지고 나서는 호텔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에도 초반에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있지 않은가. 이 또한 가족이 되는 과정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만 한편으로는 영영 가까워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같이 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에는 평판이 신경 쓰이고, 평판을 관리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편하게 있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시부모님도 바라는 게 있을 것이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자주 연락하는 곰살맞은 며느리, 주말에 곧잘 들러 식사를 같이 하는 며느리, 딸처럼 같이 쇼핑도 하고 수다도 떠는 며느리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역할을 할 자신도 의지도 없다. 나는 연애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할 수 없는 행동은 시작을 말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초반에 상대의 기대치를 올려놓고서 충족시키지 못할 때 발생하는 갈등은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길게 늘어놓았지만, 처음부터 오바쌈바 하지 않고 할 도리만 하겠다는 것이다.
남편도 여기에 동의하고 나도 그에게 필요 이상을 바라지 않지만, 간간이 이래도 되나 하는 자기 검열과 비슷한 감정이 든다. 그래도 내가 큰며느리인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혹은 동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대충 상호 간의 결은 맞춰야 하지 않나?라는 식의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그렇지만 MZ세대 며느리답게 하고 싶은 대로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는다. 자식의 행복이 최고의 효도라고 우기면서.
시간이 지나면 이와 같은 심리적 거리감이 줄어들고, 실수를 걱정하지 않고 술찌질이지만 얼굴이 벌게지도록 술을 마시며 어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까? 그보다, 그렇게 하고 싶은 날이 올까? 학생은 16년, 회사원은 10년을 해서 익숙하고 빤한데 며느리는 11개월 차라 어렵고 고민만 많다. 솔직히 이 글을 쓰는 것도 감정을 정리하고 -내가 왜 이리도 시댁에서 낯을 가리는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을 가다듬기 위함이다. 안타깝게도 오히려 생각이 더 꼬이면서 의욕이 하락하게 되었지만. 사람과 친해지며 얻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갈등이 생길 때도 있는 것을 알아버린 탓인 걸까. 아직까지는 제2의 집보다는 제2의 사무실 같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디즈니 만화 영화 ‘뮬란’의 명곡 reflection이 있다. 그 노래에서 뮬란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세상에 맞게 꾸며낸 모습을 한 자신과 진정한 나 자신에 대해 노래한다. 언제쯤 나의 E성향이 시댁에서도 편하게 빛을 발할까? 아무튼 올해는 어려워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