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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배 Jan 08. 2022

바보 여행

제주도 올레길 &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며

새해에는 코로나 19가 잠잠해질 줄 알았다. 위드 코로나 시대 해외여행의 빗장이 풀리리라 기대했다. 첫 여행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다. 함께 걷는 이들이 있어 서둘러 예약을 마치고 기대반 걱정반 2022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결국 항공권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와서 만들었다는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일행 중 산을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한라산 백록담도 함께 오르기로 했다.


인생을 살며 여러 가지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다. 작년 그 중 하나인 헌혈 100회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아직 진행중인 일이 세계 모든 나라 땅 밟아보기이다. 여름, 겨울 휴가를 이용해 부지런히 발자국 찍었지만 아직 50여 개국 밖에 가보지 못했으니 약 25%에 머물러 있다. 


여행을 갈 때 사실 그 나라 역사, 문화책을 부지런히 읽고 가는 편이다. 현지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나라의 공기를 마시고, 음식을 맛보고,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애쓰는 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글로 작성하곤 했다. 물론 순식간에 망각의 저 편으로 날아가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아내는 이런 내 여행방식을 늘 못마땅해했다. 그냥 눈으로, 몸으로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마음에 담는 여행 방식을 권하고는 했다.


이번 제주 여행은 우연찮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서 4.3 항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뿐 더 이상 제주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깊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 국내라는 안도감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어차피 아는 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서 그저 제주라는 풍광만 바뀌었을 뿐 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게다가 일행중에 정말 사진도 잘 찍고, 여행기도 잘 쓰시는 분이 계시니 더더욱 나는 기록을 남길 생각도 없었고, 이른바 글감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다니는 여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열심히 올레 길을 걷거나, 한라산을 오르거나 또 푸짐한 점심과 저녁을 먹고, 간단한 뒷풀이 후 쓰러져 자고 다시 그 일상이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책 한 권 달랑 들고 갔으나 특별히 책을 펼쳐볼 시간 여유도 없었다. 스마트폰이 있지만 뉴스를 따라잡을 여유도 없었다. 

photo by 이수철박사님

참 여유가 많을 듯한 여행이었는데 부지런히 걷고 또 걷느라, 제주 풍광에 취하느라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머리와 마음을 비운 여행이었다. 비웠다기보다는 정지당했다는 느낌이 어쩌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비우는 행위도 없이 그냥 딱 멈춰버린 듯한 상태로 그렇게 5박 6일 제주 일정이 끝이났다. 바보가 된 느낌이지만 그냥 나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뭔가 애써서 버둥거리지 않은 느낌이다. 물이 흘러가듯이 시간 흐름에 날 맡기고 있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옛 여행 습관을 떨치지 못하고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을지 불안이 들고, 그 방식을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이런 바보 여행도 나름 괜찮지 않나 싶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끝없이 경쟁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우쭐하고 상처 받는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이라는 여행길도 그냥 흘러가도 괜찮은 것 아닐까? 꼭 무언가를 이루지 않더라도 흘러감 그 자체도 귀한 삶이 아닐까? 바보 인생도 그냥 나쁘지 않지 않을까? 그런 뒤늦은 깨달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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