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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i Kim Dec 21. 2023

임산부, 부모님을 모시고 도쿄로(1)

이 여행, 정말 괜찮을까?

임신 5개월차.

안정기에 접어들었겠다, 배는 나왔지만 몸은 무겁지 않다! 피곤함도 입덧도 덜해졌고 에너지는 만땅. 이쯤 되면 남들 다 가는 여행 한번 가줘야하는 거지?

라는 마음으로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신랑과 함께 간 태교 여행이냐고?

그것도 좋았겠지만 내가 호기롭게 선택한 여행은... 

신랑을 두고 부모님과 함께 가는 효도 여행!


"그래도 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엄마 아빠의 걱정을 고집으로 덮어버리고 3박4일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신이 나서 부모님과 즐길 만한 여행지, 투어를 고르고 교통권과 디테일한 여행 정보까지 머릿속과 휴대폰 메모장에 콕콕 집어넣은 뒤 디데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 나는 잊고 있었던 거다.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는 효도 여행은 결코 태교 여행이 될 수 없음을...


#1. 싱가포르

부모님과 함께 간 첫 해외 여행은 작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였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친오빠와 새언니, 조카를 보기 위해 떠난 거라 부담감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 떠난 여행에 + 각종 코로나 시국의 복잡한 절차가 겹쳐 공항에서부터 나는 꽤 큰 스트레스에 빠졌다.

'엄마는 대체 이걸 왜 못하는 거야. 아빠는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하는 거야. 내가 없으면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온갖 짜증을 내며 비행기에 올랐다. 어쨌든 비행기에 탑승했으니 수라바야로 날아갈 일만 남았다, 싶었다.


수라바야행 직항이 없었기에 싱가포르에서 2시간 환승이 있었다.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제설 작업으로 비행기가 결항되고 하루를 싱가포르에서 머물러야 하는 사태가 온 것이다.

싱가포르에서의 체류는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에 하루동안 수하물도 공항에 묶여 있고, 각종 코로나 보안 절차까지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해결해야 했다.

여차저차 코로나 보안 절차를 마치고, 싱가포르 공항을 나와 항공사에서 제공해준 호텔로 이동했다.



엄마 아빠는 갑작스러운 싱가포르에서의 1박을 무척 신기해하며 담뿍 즐기셨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더불어 우리 세 가족과 여행 경로가 같다는 이유로 항공사에서 묶어준 한 인도네시아 청년의 상식을 벗어난 도 넘은 행동 때문에... (1박을 공포에 떨며 보내야 했던 이 이야기는 스킵하도록 한다.)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하루를 보내고, 수라바야 공항에서 오빠와 조카를 보자마자 나는 눈물부터 왈칵 터져나왔다.

아. 부모님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 부담감은 이제 끝이다!

그 이후 열흘 동안 어디로 가는지, 지금 이 도시의 이름은 무엇인지,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따위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나는 오빠가 이끄는 차에 올라 수라바야와 발리를 실컷 즐기다 돌아왔다.


#2. 오사카와 교토

부모님과 함께 떠난 두 번째 해외 여행은 올 4월, 벚꽃 시즌이 살짝 지난 뒤의 오사카-교토.

일에 치여 일정을 제대로 짜지 못했고, 허겁지겁 엄마와 둘이서 오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예순이 넘은 엄마를 데리고 하루 15km가 넘는 도보 여행을 감행한 것은 완벽한 실수였다.

동선을 거지같이 짜는 바람에 똑같은 길을 몇번이나 되풀이해 지나갔던 것이다.

엄마도 나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 호텔로 돌아오는 길엔, 오사카 길거리 한복판에서 웃음을 빵 터뜨렸다.

한국에는 널린 게 식당인데 오사카 시내에는 왜 이리 밥집도 눈에 띄지 않는지.

결국 너무 힘들어 식당엔 가지도 못하고, 음식 배달을 시키는 일에도 실패하고, 대충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사와 호텔에서 저녁을 때웠다.

참 어처구니 없는 하루였지만 엄마와 여고생처럼 길거리 한복판에서 폭소를 터뜨린 그 순간만큼은 필름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다음날 엄마와 나는 교토에서 하루 늦게 도착한 신랑과 합류했다.

신랑이 있으니 어디서 뭘 먹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짐이 무거워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어찌나 마음이 편하던지.

역시 마지막 하루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마음껏 즐기다 돌아올 수 있었다.




이쯤이면 알 수 있듯 나는 원체 상세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편이 아니다.

머물 곳, 교통 편, 하루에 둘러볼 곳 정도만 큼지막하게 계획한 뒤 밥을 먹는 일이나 남는 시간의 활용은 그때 그 순간의 '뜻밖의 즐거움'에 맡긴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아하고 더군다나 긴 웨이팅이 있는 곳이라면 포기하기를 먼저 선택한다.

그럼에도 마음이 불안하다거나 부담감 같은 건 없다.

화살표가 없는 목적지, 우연한 발견이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나이 든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에선, 그런 공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부모님과 함께할 때는 더더욱 탄탄하게, 더더더욱 구체적으로, 거기다가 부모님의 선호와 취향까지 고려해 여행 계획을 짜야함을...


똥이든 된장이든 찍어 먹어봐야 아는 나는

이 깨달음을 두 번이나 겪었음에도

이번 겨울 또 한번 '뜻밖의 즐거움'이 선사해줄 낭만에 빠져

똑같은 혼란을 느끼고 말았다.


아, 정말이지 임신한 몸으로 부모님을 이끌고,

탑 오브 시티 도쿄를 여행하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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