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저들 중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자신이 난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난임 전문 병원의 회전문을 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난 몇 달간 누적된 피로 탓에 주기가 약간씩 틀어져서, 혹은 운 나쁘게도 타이밍이라는 것이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아 답답해서, 빌어먹을 배테기가 매번 불량인 것 같아서, 아니면 노산 문턱에서 괜스레 드는 조급함을 해소해 보고자 출산까지 이어질 것을 고려하여 동네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산부인과를 먼저 찾는다. 은설처럼.
어느 산부인과든 난임이 전문이라 내세우는 의사가 한 명쯤은 있으니까.
의사가 묻는다.
“결혼하신 지는?”
“2년 반 정도 됐어요.”
“임신 시도하신 기간은요?”
“8개월이요.”
“아직 난임 클리닉 오기는 이른데? 12개월 이상은 시도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오지 그래요?”
“나이가 있어서요.”
“아.”
의사가 차트에 적힌 은설의 나이를 한 번 더 힐끔 보았다.
“아직 노산은 아니신데?”
“그렇게 될까 봐요.”
의사는 더 묻지 않았다.
친언니가 5년 만에 아이가 생겼었다는 가족력이며,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일주일쯤 미뤄지기도 하는 생리주기에 대해 말을 하려 은설이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의사가 먼저 간호사를 호출했다.
“이은설 님, 처치실로 옮기실게요.”
나긋했지만 피곤을 감추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간호사가 은설을 이끌었다. 진료실 한켠 커튼 뒤, 어두컴컴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그것.
굴욕의자 위로.
간호사는 친절하게 탈의 방법을 알려줬다.
“속옷까지 다 탈의하시고요. 이 치마만 입고 진료대에 앉으시면 돼요.”
가볍게 올라간 간호사의 말끝과 다르게, 진료용 치마를 움켜쥐고 있는 은설의 시선이 무겁게 떨어졌다.
‘어떡하지? 터진 부분이 앞인 거야, 뒤인 거야?’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고 세 걸음쯤 걸어 나가는 동안 은설의 머릿속에서는 후회와 자책과 분노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 나이를 먹도록 산부인과를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왜 그렇게 무지한 길을 택했을까.’
1년 전쯤 직장 근처 병원에서 임신 전 검사를 받아본 적이 한 번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 겨우 한 번 입어봤을 뿐인 진료용 치마 착용법을, 안 그래도 이런저런 고민으로 복잡한 은설의 뇌가 기억할 리 만무했다.
‘아니야. 기억해 내야 해. 기억해 내야 해. 생각해 낼 수 있어, 이은설!’
기억을 짜내고 또 짜내니, 이곳 것과는 사뭇 달랐던 그 병원의 검사용 치마 모양이 은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그럴 수 있어. 병원마다 다르게 생긴 거라면 모를 수도 있지. 나의 질문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은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호사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이 치마는 어디가 앞인가요? 전에 다니던 병원 거는 그냥 통짜였는데.”
간호사가 한 번 씨익 웃더니, 더욱 친절한 목소리로 은설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 트임 있는 쪽이 앞이에요.”
앞이 트여 있거나 그냥 통짜이거나, 굴욕의자에 앉을 때 엉덩이까지 걷어 올리는 것은 같았다. 좀 더 전문화된 의료용 의류처럼 보이는 이 치마가 은설에게 한 번 더 굴욕감을 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
방석처럼 깔려 있는 종이 위에 살며시 엉덩이를 붙이고 기다리니 간호사가 냉큼 와서 은설의 다리 위치를 잡아 주었다.
“자, 여기에 다리 거치 하시고요. 다리에 너무 힘주지 마시고요. 편아안히. 이제 의자 올립니다.”
의자가 올라가니, 영락없이 해부 실험을 앞둔 개구리 자세였다.
은설은 강렬했던 임신 전 검사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이가 아닌 누군가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만 같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기계로 폭력을 당하는 것만 같았던.
애써 여의사를 골랐지만, 밀려드는 고통과 뱃속까지 까발려지는 듯한 창피함은 피할 수 없다.
“자, 힘 빼시고 다리 모으지 마세요.”
무릎 너머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하지 마세요. 자, 심호흡 한번 하시고, 후-하- 이렇게.”
“후-하-”
은설은 질 초음파 기계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설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거부하기로 한다.
“힘주면 아파요. 릴랙스. 잘했어요.”
뭘 잘했다는 건지 생각해 보려는데, 검사가 끝났다고 했다. 기계에서 뽑혀 나오는 사진을 주욱 뜯어 들고 의사는 냉큼 책상으로 돌아갔다.
“옷 갈아입으시고 나오세요. 그건 그냥 두시면 돼요. 제가 치울게요.”
깔고 앉았던 종이를 주섬주섬 주우려는 은설을 간호사가 말렸다.
‘부끄러워서 그냥 내 손으로 치우는 거예요.’
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은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간호사의 명을 따랐다.
“별다른 이상은 안 보이는데? 내막도 괜찮고 깨끗해요.”
의사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렴요. 나의 생리는 20년 넘게 개근 중이니까. 이상이 있을 리 없지.'
긍정적인 검진 결과를 듣자 구부정했던 은설의 어깨에 탄력이 생겼다.
“여기 동그란 것들, 좀 큰 거 두세 개 보이네요. 나머지는 도태되고 이중에 하나만 제대로 클 거예요.”
“아, 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내 몸의 일부인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경쟁.
평생을 두고 배출되는 400개의 난자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인간의 반쪽들은 경쟁을 해야 한다. 또 그중 타이밍 좋게 배란된 녀석 한둘만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적을 누린다.
'어려운 일이었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게.'
초음파 사진 속의 난포들을 보며 은설이 짧은 감상에 빠져있는 사이, 의사는 진료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닷새 있다가 한번 더 오세요. 난포가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숙제 날짜 잡아드릴게요.”
“네? 검사 끝이에요, 선생님? 저 난임검사는 더 안 하나요? 검사 항목이 꽤 많던데요.”
“지금은 굳이 안 해도 돼요. 난포 자라는 속도가 항상 일정하지 않거든요. 더뎌지다 빨라지다 하니까, 하루 이틀 차이로 타이밍이 안 맞아서 임신이 안 됐을 수도 있어요.”
“마음이 급해서요.”
“아직 임신 시도한 지 8, 9개월 밖에 안 됐잖아요. 통상 12개월은 지나야 난임으로 봐요. 5일 있다가 오세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의사였다.
비록 월급쟁이 의사이긴 하나 불필요한 검사는 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래 믿자! 의사를 믿지 누굴 믿겠어. 나는 난임검사 따위 필요 없는 여자인 거야.'
"그럼 닷새 뒤에 뵐게요."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땐 의사도 은설도 가벼운 목소리였다.
아직은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듯이.
닷새 뒤, 의사는 난포가 2cm 이상 자랐음을 확인하고 말했다.
“내일 한 번, 이틀 후에 또 한 번. 그렇게 하세요.”
은설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선생님, 내일 언제 해야 하나요? 아침이 나을까요, 저녁이 나을까요?”
의사가 당황한 듯 고민하더니 이내 무덤덤하게 답했다.
“편하신 시간에 하세요.”
남편과의 잠자리 시간까지 의사의 컨펌을 받으려 했다는 부끄러움이 은설의 얼굴에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머저리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어.'
어리석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은설의 입이 제멋대로 변명 아닌 변명을 뱉어냈다.
“난자가 24시간 밖에 못 산대서 여쭤 본 거예요."
다행히 의사가 은설의 마음을 헤아렸다.
“난자가 24시간밖에 못 살아도, 정자는 이틀에서 길게는 7일까지 살아요. 큰 차이 없어요.”
은설은 전보다 조금 더 친절한 목소리로 성의껏 설명을 해주는 의사가 고마웠다.
기분 좋게 다음에 뵙자는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은설은 남편 준수와의 채팅창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내일, 그리고 이틀 뒤.'
그리고 마치 용한 점쟁이로부터 합방일을 택일받은 마님처럼, 스케줄앱을 열어 하트 이모티콘을 입력했다.
세상 더 가질 것이 없는 듯한 마음으로 2주를 보낸 후, 은설은 다시 생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속 깊이 가라앉은 돌멩이처럼 소파에 반쯤 몸을 뉘어 핫팩을 배에 얹어둔 채로.
은설의 눈은 TV를 응시하는 듯 보였지만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은설의 심장 언저리에서는 처음 임신을 시도했던 그달의 감정이 복기되고 또 복기되기를 반복했다.
헛웃음으로 풀어내려 했던 실망.
당혹스러우리만치 크게 다가왔던 좌절.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며 반쯤은 정신을 빼놓고 살았던 2주.
그러다 생리가 시작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겨워 병원을 찾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병원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한 방에 해결될 줄 알았던 임신이 되지 않았다.
침잠해 있던 은설이 느닷없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배 위에 올려놓았던 핫팩을 소파 위에 ‘푹’ 소리가 나도록 내리꽂았다.
'한 번도 이상이 있다고 느껴본 적 없는 난소와 자궁인데, 대체 왜 임신이 안 되는 거야?!'
은설이 무언가 결심한 듯 씩씩하게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서 야근 중인 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잘 들어. 이제부터 전쟁을 선포하겠어. 아니, 자기 말고! 임신과의 전쟁! 나 말리고 막 그러지 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하고 말 거야. 후-. 근데 섣부른 마음으로 도전할 일은 아닌 거 같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딱 한 달만 실컷 놀게. 딱 한 달 실컷 놀고, 그다음부터는 오로지 임신에만 올인하겠어!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