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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배당한 뇌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어느 순간부터인가 은설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임신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출정 전야에 마지막 술잔을 드는 전사처럼 실컷 놀겠다고 선언까지 했지만, 이상하게도 흥이 오르지 않았다. 딱 한 달만 실컷 놀겠다고 결심했는데, 너무 무리를 하면 생리 주기가 틀어지고 그 영향이 다음 달까지도 이어질 거란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남편과 각방을 쓰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혹시라도 임신이 될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태였다. 은설은 이것이 흥이 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무리하게 많은 약속을 잡아 몸이 피곤해지는 것도,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것도, 밤새 영화를 보는 것도 마음이 당기지 않았다.

'별스러운 일은 아니야. 이런 강박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잖아?'

사실, 남편 정수가 은설의 마지막 남자친구였을 때부터 은설의 머릿속에는 항상 ‘임신’이라는 화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행여라도 임신은 안 돼.
임신하게 되면 이참에 결혼해야 할까?
아직은 임신하고 싶지 않은데.
언제쯤 임신하는 게 좋지?
일이 너무 바쁜데 올여름은 지나고 나서 임신했으면 좋겠어.
슬슬 임신 준비를 해볼까?
임신 전 검사라는 게 있던데, 받아보는 게 좋겠지?
풍진 항체가 없을 줄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3개월 실컷 더 놀고 임신하면 되겠네.


임신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 은설에게 임신은 운이 나쁘면 걸릴지도 모를 ‘질병치레’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부정적인 상황으로 여겼고, 어떻게든 피해야 할 일이었다.

철저하게 피임을 했으면서도 ‘혹시나’, ‘만에 하나’를 상상하며 매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리를 기다렸다.

'축하해. 이번 달도 임신이 안 됐어.'

속옷에 묻은 생리혈은 마치 '내가 나에게 선사하는 장미꽃' 같았다. 실수라도 했던 달에는 변기에 앉아 검붉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기도 했다.

9개월 전, 임신을 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은설의 마음은 한결같이 그랬다.

'이제 됐다. 충분히 일할만큼 일했고, 놀만큼 놀았다. 그래, 임신하자!'

결심했던 달, 새빨간 생리혈을 내려다봤을 때 은설은 당혹스러우리만치 큰 실망감에 빠졌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낯선 감정이었다.



그 무렵, 은설과 가장 내밀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시도한 동료 교사들이었다.

그들과의 대화는 어떤 주제로 시작되든 결국엔 임신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쌤, 어떻게 됐어?”
“이번 달도 꽝이에요. 배테기 파란 줄 제일 진할 때 맞춰했는데… 아무래도 숙제하고 바로 샤워해서 그런 것 같아요. 쌤은?”
“나도 꽝.”
“뭐, 첫 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원래 건강한 사람도 첫 달에 임신될 확률이 25%밖에 안 된대. 보통 4개월 정도 걸린다던데?”
“지난달까지만 해도 임신됐을까 봐 노심초사했었는데… 어떻게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마음이 반대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 딱 반대였다.

임신일까 걱정이던 마음이, 이제는 임신이 안 돼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겨우 첫 시도였을 뿐인데도, 은설의 뇌세포들은 왜 임신이 되지 않았는지 분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임신이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어째서 나는 단 한 번도 가정해보지 않았던 걸까?'

함께 고민하던 동료들 대부분은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이 됐다.

은설만 빼고.



준수는 본능적으로 은설의 눈치를 봤다.

생리기간 동안은 이틀에 한 번 꼴로 퇴근길에 조각케이크며 슈크림빵 같은 것들을 사들고 들어와 은설의 품에 안기는 것에 열을 냈다. 이걸 먹고 제발 좀 웃으며 지내라는 듯이.

준수의 열의가 무색하게도, 은설은 좋아하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도 헛포크질로 생크림을 흐트러뜨리기만 하는 날이 점점 늘었다.

준수가 은설의 입에 케이크를 크게 떠 넣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달까지만 더 신나게 놀지 뭐. 훌쩍 여행 어때? 내일 아침은 동해바다에서 해돋이를 촤악-."

"이 밤에 지금 어디를 가자는 거야? 안 그래도 피곤한데, 주말까지 그러고 보내자고?"

위로를 위로로 받아들이지 못한 은설이 날을 세워 쏘아붙였다.

괜히 핀잔만 들은 준수가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케이크 위로 내려앉았다.

은설도, 준수도 더 이상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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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 대신 조각 케이크를 노려보던 은설은 문득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을 알아챘다.

동네 맛집으로 소문난 다크체리 쇼콜라 케이크.

이걸 사기 위해, 준수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과 반대 방향으로 15분을 걸었을 것이다.

은설은 미안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벌을 서는 것 같은 준수가 안쓰러웠다.

애꿎게 눈치를 보고 있는 준수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위선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목소리를 밝게 내려 애를 쓰면서, 이번엔 은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자기 말이 맞는 것 같아. 한 달 더 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뿐인데 말이야. 그냥 생리 시작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나 원래 시작하면 좀 예민해지잖아."

그제야 준수도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알아. 진짜로 화내는 거 아닌 거. 냉동실에 얼려둔 슈크림빵도 꺼내줄까?"
"아냐. 체중 조절해야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몸을 좀 더 만들어서 다음 달에 다시 도전해 보자."
"그래. 엽산도 열심히 먹고, 음식도 좀 가려 먹고. 나랑 카풀하는 쌤은 임신 준비 3개월 전부터 커피도 끊었대."

"그렇게까지 준비해야 돼?"
"난 엽산 챙겨 먹는 게 다잖아. 참, 엽산은 자기도 먹어야 한다던데?"
"남자도? 석 달 동안 매일?"
"왜? 먹기 싫어? 질 좋은 정자 생성엔 관심이 없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준수를 더 추궁할 마음은 없었는지 은설이 말을 이어받아 담담하게 자신의 다짐을 전했다.

“너무 준비를 안 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도전을 해서 임신이 안 된 거 같기도 해. 나도 커피랑 술 끊고 석 달 정도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할래.”

“마음을 가볍게 한다는 말이 참 반갑네.”

다정히 짓고 있는 준수의 미소에 힘을 받아서 한결 더 발랄해진 목소리로, 은설이 한번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체를 했다.

“뭐, 임신이 되면 되는대로 좋고 안되면 커피니 술이니 다 끊은 후에 임신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거 나름대로 좋고.”

“그래 잘 생각했어. 석 달 동안 주말마다 여행이나 실컷 다니자!!”

“매주? 흐음,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아.”

“왜?”

"아니, 자기나 나나 주중엔 야근하는 날도 많은데 주말까지 맨날 놀러 다니면 너무 피곤하잖아. 그러다 생리주기 틀어지면 배란일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지니까.”

은설은 순식간에 풀이 팍 죽어버린 목소리로 도돌이표처럼 되돌아 간 임신 걱정을 읊었다.

"에구, 바보야. 애기 바보야. 그럼 그냥 집에서 애기나 실컷 만들면서 보내자!"

푸념과 변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은설을 당겨, 준수가 곰인형처럼 폭신한 품 안으로 꼭 끌어안았다.

이때는 은설도 준수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번 달은 왠지 임신이 된 것만 같아서, 조신하게 몸 관리만 하며 보내는 날들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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