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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억, 백만 가지 모양으로 폭발하는 불꽃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한 달간의 휴가를 마치고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은설의 주치의는 병원에 없었다.

“어머, 안내 못 받으셨어요? 선생님 지난달에 그만두셨는데.”

접수처의 간호사가 당황한 듯했다. 아마 안내 과정에서 누락된 모양이었다.

은설은 병원장과 한판 대거리를 하고 멋지게 병원 문을 박차고 나가는 주치의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느라 고군분투했을 간호사와 원무과 직원들을 떠올렸다.

동병상련.

은설의 이해심이 바다처럼 넓어졌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예약을 따로 안 해서 안내를 못 받은 거 같아요.”

“저희 병원은 원래 예약제가 아닌데. 진짜 죄송해요. 안내 문자라도 넣어드렸어야 했는데…….”

맞다. 은설이 이 병원을 택한 이유는 집에서 가깝고 난임센터 진료가 예약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직장인을 위해 아침 7시 30분에 첫 진료를 시작했다.

간호사가 두 가지 대안을 황급히 제시했다.

“새로 오신 선생님께 진료 보시겠어요? 아니면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 하긴 하는데 ‘심영광 선생님’으로 담당을 옮기셔도 되고요.”

“아, 그 심영광 선생님이요?”

‘삼신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의사였다. 유명한 만큼 진료를 보려는 사람이 많아서 아침 진료시간에 맞춰 와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게 뻔했다. 은설은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출근길은 꼬박 1시간이었고 이번 학기 시간표는 일주일 중 5일이 1교시 수업이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께 진료 볼게요.”

“잘 생각하셨어요. 젊으신데도 실력 있는 분이에요. 병원에서 큰돈 들여 대형 병원에서 모셔왔어요. 건물 앞에 플래카드도 걸었는데, 보셨어요?”

“아아!!”

말꼬리를 올려 알은체를 했지만 사실 병원 건물에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일하는 난임 여성의 아침일상은 세심하게 주변을 살펴볼 만큼 여유롭지 않다.



새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의사라 그런지 대기가 없었다. 은설은 바로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젊네.’

마스크를 쓰고 책상 앞에 앉은 의사의 머리숱이 풍성했다. 무언가를 발라 단정히 넘긴 머리칼은 유행하는 스타일로 컷이 되어 있었다. 의사는 은설의 차트를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았다.

‘꼼꼼한 사람인가 보네.’

보통의 문진 시간이 3분을 넘지 않는데, 벌써 5분을 넘어섰다. 긴 침묵이 어색했던 은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이 생리 시작한 지 딱 12일째 되는 날이에요. 지난번 선생님이 오늘 꼭 오라고 하셔서요.”

“아, 예.”

의사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상체를 펴더니 말했다.

“이은설 씨, 안쪽 진료실로.”

무표정하게 기다리던 간호사가 활짝 웃으며 은설을 안내했다.

“쪼오끔 특이하시지만, 그래도 실력 있고 좋은 분이에요. 다크호스!”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설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면서 병원을 옮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앞이 트인 치마를 입고 굴욕의자에 앉으니 간호사가 의자의 높이를 조절했다. 남자 의사로 바뀌어서인지 진료용 가림막을 정리하는 간호사의 손길이 더 꼼꼼했다.

‘아, 새로 온 의사도 전처럼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다니!’

근거 없이 판단해 버린 자신을 자책하며, 그냥 접수대에서 돌아섰어야 했다고 은설은 후회했다.

준비가 끝났다는 간호사의 말과 함께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다행히 가림막 덕분에 생각보단 마음이 차분했다. 그리고 다른 의사들보다 부드럽게 진행된 질 초음파 진료 솜씨에 은설은 놀랐다.

‘그래, 제일 민망한 첫 진료도 끝냈는데, 포기하긴 아깝지.’

의사는 능숙하게 진료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환자를 배려한 매너 있는 진료가 무엇인지를 아는 의사였다.

‘저 사람이 의사이지 남자인가, 내가 환자이지 여자인가. 민망함은 그저 나만의 것일 뿐이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고. 십수 년을 공부했고 또 매일 수십 번씩 치료하는, 인간이 지닌 장기 중의 하나. 자기 전공 분야. 딱 그렇지 않겠어? ’

진료가 퍽 마음에 들었던 은설은 '남자 의사여도 괜찮은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옷 갈아입으시고 나오시면 돼요.”

“네.”

가림막을 치워줬을 때는 처음처럼 간호사와 은설만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있는데 밖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닷새 뒤에 다시 오세요. 그때 합방일 잡읍시다.”

“네에.”

양말을 주섬주섬 신으며 은설이 목소리를 길게 빼어 대답했다.

환복을 마친 은설이 안쪽 진료실을 빠져나왔을 땐 다시 의사와 은설 둘 뿐이었다. 밖에선 다음 순번의 환자를 애타게 찾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진료 때 봬요."

은설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다시 의사를 바라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의사는 은설의 예상보다 더 젊었다.

'어쩌면 또래일 수도 있겠는데. 요즘은 의사도 저리 훤칠하구나.'

뜻밖의 외모에 은설은 어쩐지 다시 부끄러워졌다. 살짝 떨군 은설의 시선 안으로 하얀 가운 위 파랗게 새겨진 의사의 이름이 들어왔다.

‘류현준? 현준이라. 자주 듣는 이름이네. 1반 강현주, 3반 박현준, 작년에는 말썽쟁이 강현준, 대학 선배 중에도 김현준이 있었지. 그리고……, 어?’

진료실 밖을 나서던 은설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시선을 급히 책상으로 내렸다.

“혹시... 나루중학교 1학년 3반 12번 류현준?”

무언가를 끄적이던 의사의 손이 펜대 위에서 얼어붙었고, 아주 천천히 일어서며 의사가 말했다.

“아, 그……, 안녕?”

둘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말. 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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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께끼를 당한 여자 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은설이 작게 소리쳤다.

“야, 너……. 너 왜 거기 있어?”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 은설의 입술이 중학생 시절 현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스쳐 갔다.

'류현준, 너무 오랜만, 야반도주, 흐지부지 끝났던, 내 키가 더 컸었는데, 멋있어졌네, 성공했네, 오늘 내 옷 완전 초상집 문상 패션, 주치의?, 초음파! 아, 창피해.'

몇 초 동안 빤히 서로를 응시하다 은설이 먼저 시선을 거두어 돌아섰다.

"잠깐만!"

진료실 밖으로 나가는 은설의 어깨를 급히 잡으며 현준이 물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오늘 저녁 6시 반에 사거리 문벅스.”

은설이 망설이는 사이 현준이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하게 둘의 만남을 확정 지었다.

“기다릴게. 올 때까지.”

다음 환자를 찾았는지 간호사가 방긋 웃으며 진료실로 들어왔고,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현준은 진료 책상 앞으로, 은설은 수납창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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