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문벅스로 가는 길에 은설은 로드샵에 들러 노세범 파우더를 사고 이런저런 테스터들로 화장을 고쳤다. 화장품 파우치는 이상하게도 꼭 이런 날만 챙겨 나오지 않는다.
'파우치를 챙겨 나오지 않아야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문벅스 4층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은설은 화장품 파우치와 예정에 없던 만남의 상관관계를 생각했다. 부질없는 공상이지만 시간을 빠르게 보내기는 안성맞춤이었다.
‘잘 보이게 1층에 앉을 걸 그랬나. 아니야. 알아서 찾아오겠지. 중1도 아니고. 정신 차려! 나는 류현준의 담임이 아니라고.’
핸드폰 액정에 커다랗게 6과 3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현준이 문벅스 4층의 마지막 계단 위로 올라섰다. 180cm? 아니 그 보다 조금 더. 중1 여름까지만 해도 은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던 키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현준을 보며 은설은 그의 모습이 낯설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오래 기다렸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아냐. 그냥, 너무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는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할 거 같아서..”
“뭐 좀 마실까? 뭐 좋아해? 사이다?”
현준이 던진 농담을 은설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은설이 ‘피식’하고 웃자 현준도 긴장했던 마음이 약간은 풀리는 듯 따라 웃었다.
“커피는 안 마실 거고. 생과일주스?”
“티 종류 아무거나. 따뜻한 게 마시고 싶네.”
현준이 곧 무난한 잎녹차 두 잔을 가지고 올라왔다. 은설이 잡기 편하도록 손잡이 위치를 조절하여 탁자 위에 놓는 손놀림에서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삼십 대 중반 남자의 에티튜드가 묻어났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은 은설이나 현준 모두 마찬가지였다.
“네가 의사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공부 열심히 했나 보네.”
은설이 가볍게 칭찬하며 먼저 침묵을 깨었다.
“민국대 의대 가려고 미친 듯이 공부했지. 너 만나려고. 근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네가 없더라고. 매년 신입생 들어올 때마다 네가 있나 찾아봤었어.”
여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기억 속 현준이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장면이 은설의 눈에 아른 거렸다. 한편으론 그 무렵 급작스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설의 일신을 맡아 줄 친인척을 찾아 전국을 전전하느라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전학만 5번을 했었다. 고2가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빚을 정리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온 식구가 함께 모여서 지낼 수 있을만한 집 다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정신을 차리고 고3 일 년 동안 공부한 결과가 서울 안의 그냥 그런 4년제 사범대학이었다.
“교과서만 공부하고도 민국대 의대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수재는 아니어서. 고등학교 올라가니 벅차더라고. 적당히 성적 맞춰 사범대 갔지, 뭐.”
“그랬구나.”
현준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것만 같아 은설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 말 믿고 민국대 의대까지 갔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근데 중1 때는 너 공부 잘 못했었지 않나?”
철없던 시절의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민국대 의대를 다녔다는 현준에게 은설은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좀 더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면 나도 의대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며 묻어두기만 했던 상처가 다시 살짝 벌어지는 듯했다.
“맞아. 그래서 과외니 학원이니 엄청 해댔어. 나도 수재는 아니니까.”
“집이 좀 살았었지, 참.”
은설이 녹차가 담긴 종이컵 끄트머리를 손톱 끝으로 꾹 누르며 밉살맞게 말했다. 현준의 뒤편 창밖으로 어느새 저녁 어둠이 내렸고, 까만 거울이 된 창문에는 세상 둘도 없이 못 생기고 초라한 것만 같은 은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현준을 두 번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은설은 자세를 가다듬기로 했다. 20년 전 현준이 기억하고 있는 단정했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참, 학교에 소문이 돌지 않았어? 수지 기억나? 나랑 항상 붙어 다니던. 옆집 살아서 우리 집 사정이 어려웠던 거 다 알고 있었거든. 못 들었던 거야?”
“듣긴 들었는데. 그래도 기다렸어, 네 연락.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그런 것들 나올 때마다 몇 번씩 너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
“sns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추억 속의 옛 친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그랬구나.”
추억 속의 옛 친구라는 말을 던지고 은설은 현준의 표정을 살폈다. 가만히 컵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준의 시선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섭섭한가? 아무 느낌 없는 건가?'
은설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현준이 예전의 착하고 어리숙했던 그 아이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로에겐 첫사랑이었고, 풋내가 날 지언정 ‘내겐 네가 가장 소중하다’며 둘만의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었는데.
“결혼은, 언제 한 거야?”
현준이 물었다. 아마도 가장 궁금한 것을 묻는 듯했다.
“3년쯤 전에. 소개팅으로 만나서 1년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어.”
현준이 묻지도 않았는데 은설은 남편과 만난 이야기를 자신도 모르게 주절거렸다. 그리고 먼저 물어주어 고맙다는 듯이 냉큼 현준에게 되물었다.
“너는? 결혼했어?”
“했었어. 지금은 혼자 살고.”
“아, 그래.”
미처 예상치 못한 현준의 대답에 은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녹차 티백만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와이프가 어땠길래, 왜 이혼했냐고 묻고 싶다. 아, 이 천박한 궁금증!’
기분이 묘했다. 분명 은설도 이미 결혼을 했지만 - 심지어 아기를 갖고야 말겠다며 현준에게 진료도 받았지만- 나를 참 좋아하던 그 아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결혼을 했다니, 그것이 왠지 모르게 섭섭하다가 또 이혼을 했다니, 마치 빼앗겼던 사탕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왜 산부인과 의사가 됐어? 20년 만의 재회 장소로는 좀 충격적이었어. 하하.”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은설은 생각이 난다고 여과 없이 내뱉은 자신의 입 대신 허벅지를 꼬집었다.
“의사가 되긴 했는데 적응이 좀 힘들었어.”
“왜?라고 물어봐도 되나?”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아프고 괴롭거나,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진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오는 그런 과를 찾다 보니, 어쩌다 선택을 산부인과 쪽으로 하게 됐어.”
'어쩌다'에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듯했지만 은설은 더 묻지 않았다.
잠시 머문 침묵을 쫓은 것은 현준이었다.
“병원, 바꾸지 마.”
“응? 아, 그건 생각 좀 해보고. 이미 진료를 한번 보긴 했지만 너한테 계속 진료를 받는 건 아무래도 민망해.”
“나, 잘해.”
“?”
“난임시술 성공률이 60%가 넘는 의사는 국내에 몇 없어.”
“그 정도면 아주 잘하는 거니?”
“평균이 30-40%니까.”
“그렇구나. 고민은 해볼게.”
“그냥 의사일 뿐이라고 생각해. 그럼 편할 거야.”
그냥 의사일 뿐이라는 현준의 말이 은설은 왠지 섭섭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늘 남편하고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내가 김치찌개 끓여준다고 했거든. 삼겹살 많이 넣고.”
은설은 최대한 단란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30대 중반의 기혼녀가 된 첫사랑의 뾰로통해진 마음은 그리 표현되는 모양이었다. 현준이 열어준 문벅스의 무거운 철문을 다소곳이 나오며 은설은 명랑히 인사했다.
“첫 대면이 좀 난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만나 반가웠어. 좋은 의사선생님 되길 바라.”
은설이 먼저 청한 악수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 현준은 은설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악수는 다음 진료 때 진료실에서 하는 걸로.”
“뭐야. 생각보다 집요한 면이 있네. 원래 이랬나, 류현준?”
“변했어. 너 만나겠다고 의대 가려고 공부하다 보니까. 집요해지더라.”
은설이 내밀었던 손을 좀 더 높이 들어 투덜거리는 반 아이를 달랠 때처럼 현준의 팔뚝을 톡톡 도닥이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가. 난 이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남편 픽업 기다릴 거야.”
“진료받으러 남편하고 같이 와. 어차피 남편도 검사를 해야 더 정확히······.”
“아서아서. 아직은 나 혼자 먼저 좀 다녀보고.”
“그래, 그럼 진료는 계속 나한테 보는 걸로.”
현준의 독려가 계속되니 은설은 그것이 반은 장난인 것처럼 들렸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다시 중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듯이 느껴져 오히려 조금은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헤어질 일만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맞이한 편안함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장난을 맞받아쳐줄 정도의 여유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반가웠다.
'어쩌면 마지막 만남이겠지.'
마지막 인사가 이러한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은설은 생각했다. 현준에게 지긴 싫다는 듯이 장난스레 현준을 돌려세우며 등을 떠밀었다.
“이제 그만 좀 헤어지자고, 응?”
생각지 못한 은설의 터치에 현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20년 전과 다르게 은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현준의 탄탄한 상체 근력에 밀려 은설이 나부끼듯 중심을 잃었다.
“어멋!”
“조심!”
“헙!”
“·····해.”
그때는, 20년 전에는, 고작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 시절에는 보는 이가 없어도 남부끄러워 시도조차 못했던. 첫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