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그 옛날, 아들 낳은 엄마의 속고쟁이를 물려 입는 여자의 심정으로 은설은 임신에 성공한 동료의 남은 배테기를 받아 들었다.
“스마일. 여기에 스마일 표시가 뜨면, 그때 바로 딱! 이 배테기 진짜 좋아요. 쌤도 금방 성공할 거예요.”
“진짜 고마워요.”
그녀가 준 스마일배테기는 은설의 손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고장이 나고 말았다. 첫 달에도 상태가 좋지는 않은 듯했었다. 가임주기동안 매일 빈틈없이 배란테스트를 해서 ‘이날 즈음엔 스마일이 보이겠지’하고 은설이 예상했던 날에 배테기가 스마일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배테기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이상은 의미가 없는 시기가 될 때까지 스마일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두 번째 달에는 액정마저 고장 나버렸는지 아무런 표시도 뜨지 않았다. 역시, 기계는 믿을 것이 못되었다. 은설은 한 달에 열 개에서 스무 개쯤 쓰게 되는 배란테스터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다. 100개니까 최소 다섯 달은 쓸 수 있는 양이었다. 당장 다음 달에라도 임신이 되면 80개는 버리거나 남을 주게 되겠지만, 임신만 된다면 그깟 것쯤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생리주기가 되면 은설은 준수의 팔베개를 하고 그달에 행했던 임신을 향한 자신의 노력과 그것의 경과를 브리핑했다.
“저번 달의 실패 요인은 배테기 사용법 미숙에 있었어.”
“기계가 고장 나서가 아니고?”
준수도 여느 때처럼 은설의 넋두리를 성실히 들어주었다.
“스마일 표시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스틱을 육안으로도 확인을 했지.”
“아참, 우리 마누라는 궁금증이 많은 스타일이었지, 참.”
“근데 결과선의 색깔이 대조선만큼 진해진 건지, 더 진해질 수 있는 건지, 서서히 흐려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
“얼추 다 임신이 될 수 있는 날이었겠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린 둘 다 노산이잖아. 오늘이 그날인가 내일이 그날인가 고민하는 사이에 찰떡같은 타이밍을 놓친 거 같아.”
“남자도 노산이라는 게 있어?”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 20대 초반보다는 못한 상태지, 지금?”
준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는데.'
은설은 잠시 그에게 미안했다.
“물론 의학적으로 남자도 노산을 얘기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
“이미 상처받았어.”
“미안.”
이럴 땐 그냥 빠르게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게 상책이었다.
의도치 않게 말로 주게 되는 소소한 상처들. 1년 간의 치열한 신혼기를 보낸 끝에 준수도 은설도 이점에선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배테기를 너무 드문드문 사용한 것도 문제였고.”
“한 번만 해도 되는 거 아냐? 어쩐지 이걸 왜 100개나 샀나 했네. 몇 개나 해야 되는데?”
“최소 생리 끝난 2-3일 후부터 배란이 완료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가급적이면 오후에. 기왕이면 오전과 오후 두 번씩.”
“꽤나 귀찮은 거군.”
“정확한 배란시기를 알려면 이 정도 수고쯤은 감수해야지.”
매일 챙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매일 같은 시간대를 유지하면 테스트하는 것은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오후라면 퇴근 후에 어렵지 않게 테스트할 수 있지만, 오전 테스트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매일 오전 같은 시간에 공강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엔 쉬는 시간에 30명의 여교사가 이용하는 두 칸짜리 화장실 중 한 칸을 5분 정도 독점을 해야 했다. 칸이 비어지기만을 줄지어 기다리는 소리가 북적북적 들려올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공용 화장실을 차지하는 일은 마음이 더 고되었다. 아무도 뭐라고 나무라지 않았지만 가책이 느껴졌고, 아무도 눈을 흘기지 않았지만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설은 대형휴지걸이 위에 편평히 놓고 배테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어서 5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순전히 이 문구 때문이었다.
안 보이게 챙겨 간 종이컵에 소변을 받고, 3초간 담갔다 뺀 배테기를 적당히 포장해서 주머니에 숨기고 뒷정리를 한 후에 자리로 돌아오면 이미 5분이 지나 있었다. 아니, 드넓은 본교무실 안에서 다른 이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순간을 캐치하여 남모르게 배테기를 확인하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2교시 쉬는 시간 중 5분간, 여교사 화장실 두 번째 칸은 오롯이 은설의 것이어야만 했다. 아기를 만드는 일 앞에서 은설은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달 생리가 터지고 말았을 때, 은설은 마음보를 못되게 먹어서라고 자책했다.
혹은 기를 쓰며 시간대를 맞추어 배테기를 사용한 것이 오히려 크나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은 아닌 지 반문했다. 은설은 생리를 시작했으니 일주일 간은 당신도 휴가라며 준수에게 이번 달의 임신 실패 결과를 알렸다. 준수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허탈한 마음을 서로 위로할 때 은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게도 이것이었다.
“설명서에는 없는데 정확한 테스트를 원하면 최소 2시간 정도는 물도 마시지 않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대.”
“설명서에도 없는 걸 은설 씨가 어떻게 알아?”
“다른 여자들 블로그에서 봤어. 나 매일 아침에 물 한잔씩 마시고 1교시 들어갔는데, 그것 때문에 호르몬 농도가 낮아졌을 수도 있어.”
이날, 준수에게 넋두리를 하면서, 은설은 자신이 자발적인 '배테기의 노예'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임신이 될 때까지, 아니면 100개의 배테기가 다 없어질 때까지.
이런 상태로 은설은 넉 달을 더 보냈다.
술도, 커피도, 초콜릿도, 과자도, 온갖 식품첨가물도 거의 다 끊어낸 순수한 몸상태를 만들고, 엽산은 두 통을 다 비웠다. 배란테스트기는 두 달 만에 50개를 썼다. 그리고 이틀에 한 번씩 새벽마다 쟁기자세를 했던 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설은 임신을 하지 못했다.
이번 달은 왠지 임신인 것 같아서 잘 먹고, 임신이 아니어서 속이 상해 또 먹으며 야금야금 붙은 살은 어느새 5kg이 넘었다. 은설이 준수에게 난임센터엘 가봐야겠다고 말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매달 반복되는 이 악순환을 끊어버리고 싶어!”
난임센터를 통해 임신을 준비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준수를 설득했던 한마디였다. 그렇게 해서 알아본 수많은 산부인과 중에 고른 곳. 집에서 가깝고, 출퇴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다닐 수 있는 거의 유일했던 곳. 출산까지 이어질 것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선택의 여지없이 다닐 수밖에 없었던 곳.
그런데 그곳에,
그 난임센터에,
은설의 주치의 자리에 류현준이 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