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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배테기의 노예(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현준과 헤어진 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은설은 다시 한번 내내 지난 9개월 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배테기의 노예가 되어 살았던 시간들도 생각했다. 그런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되지 않은 임신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난임시술 성공률이 60%가 넘는 의사라면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 할아버지라도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매번 굴욕의자에 앉아 류현준을 만나야 한다니.

'민망해.'



“아우, 죽겠네.”

은설은 버스 손잡이 고리를 붙잡은 팔에 얼굴을 비벼대며,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지껄이고 말았다.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설의 가방을 톡톡 쳤다.

“내가 무릎이 불편해서. 가방이라도 나한테 맡길래요, 아가씨?”

“아니에요, 괜찮아요. 딴생각하다가 혼잣말한 거예요.”

“애유, 젊은 사람이 무슨 큰 고민이 있길래 그런 소리가 나올까?”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특유의 오지랖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은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말투가 부드럽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은설은 지금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냥 무슨 일을 좀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요.”

아주머니가 은설의 가방을 슬그머니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며 다독이는 말을 했다.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 나이 먹고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말이에요. 할까 말까 고민될 땐 하고 후회하는 게 나아요. 최소한 미련은 안 남거든. 세상 그렇게 겁내면서 살 필요가 없더라고.”

나긋이 웃어 보이는 아주머니의 눈매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은설은 아주머니의 조언을 10년 전쯤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머니 아드님이나 따님은 좋겠어요. 현명한 어머님이 계셔서.”

은설도 마주 웃어 보이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주머니의 딸이 되어 난임클리닉 의사가 하필 첫사랑이었던 남자라 진료를 받을까 말까 고민 중이라 말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아주머니는, 은설의 등짝을 후려쳤다.

은설의 찬사에 아주머니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설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음을 직감했다.

“나 싱글이야, 아가씨.”

“어머! 죄송해요, 언니.”

은설이 사과 끝에 짧은 농담을 붙였고, 아주머니가 호탕하게 웃으며 흔쾌히 은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은설은 30년 후쯤 준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을 상상했다.

‘어느 아가씨가 조금 전의 나처럼 실수를 하기도 하겠지. 어쩌면 오지랖 넓은 아저씨가 그럴 수도 있고.’

어느 누군가가

“할머니, 할아버지. 보기 좋으세요. 부모님이 다정히 지내셔서 자제분들이 참 좋아하시겠어요.”

라고 말하면, 은설은 아마도 자신이

“우리는 자식이 없어요.”

라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괜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니까.

은설보다 좀 더 융통성이 있는 준수는 지긋이 웃으며 아무 말 않는 경우가 많을지도 몰랐다. 있지도 않은 자식에 대해 묻는 질문이 지겨워서 어쩌면 심술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불임부부예요. 시험관시술만 10번 넘게 했는데 안 생겨서 20년 전에 포기했어요. 호호.”

이렇게 말해, 상대를 일부러 더 난처하게 만들며 골탕 먹이려고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이도 저도 다 귀찮아 그냥 자식이 있는 척하든지.

“아유, 요즘 애들이 뭐 바빠서 부모 신경 쓰며 사나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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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상상의 끝에서, 은설의 마음 한켠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제껏 이런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이 든 자신과 준수를 떠올리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식들과 손주들로 북적이는 어느 한 날을 그렸으므로.

'뭐야, 다 가식이었네. 이은설.'

은설은 지난 독서모임에서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했다. 은설에게 아이 소식을 대놓고 물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이선생은 왜 아직 애가 없어? 괜히 미루지 말고 얼른 낳아서 얼른 길러. 그게 남는 장사야."

결혼을 하면 이내 아기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았다.

"아이 없이 지내는 결혼 생활이 오히려 더 둘 사이를 충만하게 할 수도 있어요."

아기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한 어느 작가의 에세이집을 언급하며, 은설은 생각 없이 아이 소식을 물어오는 이들을 향해 맵게 쏘아붙였었다. 그리고 지구단위로 인구수를 생각했을 때, 세상 모든 부부에게 출산을 강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되물었다.

"아기 낳는 일은 이제 개인의 선택이지, 인생의 필수 덕목은 아니지 않나요? 지구를 위해서라도."

이 날은, 은설이 이제껏 살면서 가장 지적이고 우아한 목소리를 냈던 날이었다. 은설의 이성이 분명 이리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은설의 본능이 선택한 것은 아기를 낳는 쪽이었고, 은설로 하여금 둘 보다는 셋이나 넷이 되어 복닥거리며 사는 미래를 꿈꾸게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갈망은 은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욕구에 가깝게 은설의 뇌리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은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고민을 하는 와중에 자신이 그저 '세련됨'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량하게라도 지키려 했던 '세련된 이성'이 뜻대로 되질 않으니 은설은 미칠 지경이었다. 은설의 본능이 자꾸만 현준만 한 실력을 갖춘 의사를 만나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며 마음에 분탕질을 해댔다.

“나는 이성이라는 것을 지닌 사람이잖아. 어떻게 류현준에게 아기를 만들어 달라 할 수가 있느냐고.”

1차적으로는 민망함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현준에게 진료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예의가 아닌 듯했다. 말하자면 현준은 첫사랑이었던 여자에게서 ‘다른 남자와 아기를 만들려고 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를 좀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 셈이었다.

“어떻게 그 아이에게 그런 수모를 겪게 할 수 있겠어.”

은설이 만화 속 마음씨 아름다운 공주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은설의 머릿속에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가만, 류현준이 먼저 그랬잖아.'

진료를 지속할 것을 먼저 요청한 건 현준 쪽이었다.

그토록 애틋하게 찾아 헤매었던 첫사랑에게 아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그랬다.

현준이 먼저 그랬었다.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더러 자기한테 꼭 진료를 받으라고 우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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