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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사랑, 그게 뭐라고(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병원 잘 다녀왔어?”

준수가 저녁거리로 사 온 초밥을 내려놓으며 은설에게 다정히 물었다. 병원에 다녀온 날은 몸도 마음도 조금 더 다정히 안아줘야 한다. 이 정도는 눈치껏 할 줄 아는 센스 있는 남편이라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준수는 은설의 가느다란 어깨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응.”

“뭐래?”

“똑같지 뭐. 저번처럼 난포 터지는 때맞춰서 숙제할 수 있게 날짜 잡으려고 가는 거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며칠 있다 또 가야겠네?

“딴 데 가보려고. 의사가 바뀌었더라고.”

“왜?”

“그만뒀대.”

“그렇군. 새로운 의사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의사가 중학교 동창이더라고.”

“그럼 더 좋은 아냐?”

준수가 아깝다는 듯,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 은설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세웠다. 설득해 보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눈빛이 은설을 부담스럽게 했다. 준수의 시선을 피해 은설이 초밥이 놓인 식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초밥 포장을 풀어서 먹기 좋게 식탁 위에 차리며 은설이 말을 이었다.

“민망해. 친구한테 별별 모습 다 보여야 하잖아.”

“안 친했었어?”

“연락 끊겼다가 의사랑 환자로 우연히 만난 거긴 해.”

“잘 됐네. 이 참에 다시 친하게 지내. 의사 친구 둔 거를 복으로 생각해야지.”

“복씩이나.”

“친구면 좀 더 신경 써서 잘해줄 거 아냐. 하다못해 예약 못 잡고 가도 어떻게 진료 사이사이 좀 봐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 병원 원래 예약제 아니야.”

동창 의사 따위 있어봐야 쓸모없다는 투로 은설이 말꼬리를 붙잡았다. 준수가 초밥 두세 개를 연달아 입에 넣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대화의 기선을 다시금 준수 쪽으로 기울게 했다.

“아는 의사 찾아 일부러 먼 병원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제 발로 다니던 병원 의사로 들어왔는데 이 좋은 찬스를 왜 일부러 버려?”

“찬스일 거 까지야.”

“혹시 진료받아보니 친구 실력이 별로였어?”

“잘해. 잘하는데······.”

“그럼 왜?”

은설은 차마 그 중학교 동창이 남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떤 병원을 고를지 상의하며 준수가 남자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거부감이 은설만큼 있지는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남자동창에게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다고 하면 준수의 기분이 언짢아지지는 않을까 은설은 그것을 걱정했다. 더구나 현준은······.

'중1 때였잖아. 그게 뭐라고 준수 씨한테 말을 못 하냐, 이은설.'

준수가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은설의 입술이 계속해서 미세하게 들썩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은설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초밥을 밀어 넣으며 입술을 진정시켰다. 연거푸 두 덩이를 밀어 넣고 우적거리는 동안, 은설은 자신도 모르게 20여 년 전의 나루중학교로 돌아가 있었다.



S#1 1998년 여름, 나루중학교 1학년 3반, 점심시간


왁자하게 떠들며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모여 앉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좀 놀게 생긴 개구쟁이 서넛이 포크숟가락만 들고 교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교실 맨 앞 책상에서 자기처럼 아직 2차 성징이 시작되지 않아 보이는 자그마하게 생긴 남자아이 둘과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는 어린 현준.

그리고 교실 맨 뒷자리 책상에 자기처럼 키 크고 성숙하며 아주 모범적으로 생긴 여자아이들 네댓과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는 어린 은설.

개구쟁이 1 : 야 이 새끼 반찬 졸라 맛있게 생겼다.

덩치 큰 개구쟁이 무리가 어린 현준과 자그마한 친구들의 어깨 위를 올라타듯 짓누르며 반찬에 달려든다.

개구쟁이 2 : 소시지 열라 많이 싸왔네. 야 우리도 좀 나눠 먹을게.

어린 현준 : (못마땅한 듯)야! (이내 약간 쫀 듯이)하나씩만 먹고 가.

개구쟁이 3 : 야 좀 작작 먹어. 다 먹으면 얘넨 맨밥 먹냐.

개구쟁이 4 : 김치랑 멸치랑 남았어. 다 안 먹었어.

어린 현준 : (분노에 찬 표정. 하지만 더 말 못 하고 참는다)······.

C.U 어린 현준과 자그마한 친구들의 초토화된 반찬통 밥도 몇 숟가락씩 사라졌다.

울분으로 일그러진 현준의 얼굴.

멀찌감치 떨어진 자신의 자리에서 현준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아주 모범적으로 생긴 어린 은설.



S#2 다음 날, 점심시간


E. 점심시간 종소리

어린 은설 : 얘들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는 어린 현준의 무리에 다가온 어린 은설.

어리둥절한 표정의 어린 현준의 무리들.

어린 은설 : (미소 지으며) 우리랑 같이 먹자.

S#3 같은 날. 점심시간. 학교 정원 한적한 곳의 벤치

어린 은설 : 여기까진 안 올 거야.

은설의 역시나 성숙하고 모범적인 친구 1 : 맞아 귀찮아서라도 안 올 거야.

은설의 또 역시나 성숙하고 모범적인 친구 2 : 야, 너네 반찬 진짜 맛있게 생겼다. 그 메뚜기떼들 약간 이해가 되려고 해.

깔깔거리며 웃는 여자애들.

어린 현준과 자그마한 친구들은 어색해하면서도 맞장구치듯 함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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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 사이좋게 도시락을 나눠 먹는 아이들.

그러나 선뜻 여자애들 반찬에 손을 대지 못하는 남자애들.

어린 은설 :(현준의 반찬을 집어 먹으며) 이거 엄청 맛있네. 야, 너도 내 거 먹어봐. 울 엄마 참치 볶음 엄청 맛있어.

은설이 매너 좋게 자신의 반찬통을 남자애들 앞으로 밀어준다.

은설을 따라 여자애들이 너도나도 자신의 반찬 자랑을 하며 남자애들에게 먹어보라고 권한다.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감동하는 어린 현준과 자그마한 친구들.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소풍날 같이 아름답게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는 은설과 현준의 무리를 발견한 개구쟁이 메뚜기떼들.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붙은 포크숟가락을 무시무시하게 들이밀며 다가온다.

개구쟁이 1 : 야 이 새끼들 여기서 계집애들이랑 같이 숨어서 먹고 있네.

개구쟁이 2 : 야 너네 그러다 큰일 나! 고추 떨어져. 크크크크.

어린 현준과 자그마한 친구들의 표정이 굳는다.

이때 벌떡 일어나 개구쟁이들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는 어린 은설.

어린 은설 : 야! 계집애들이랑 숨어 먹는 거 아니고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먹는 거거든!

개구쟁이 3 :야, 네가 저 새끼들이랑 언제부터 친했는데?

어린 은설 : 처음부터 친했다, 왜! 언제부터 친했는지 네가 무슨 참견인데?

개구쟁이 4 : 잘됐다. 우리도 얘네랑 친하니까. 너네 거도 우리가 좀 나눠 먹을게.

어린 은설 : (귀가 찢어질듯한 고함소리로)야!! 먹고 싶으면 너네도 멀쩡하게 다 들어있는 도시락 가지고 와서 정식으로 끼어서 먹어. 아니면 반찬 하나당 백 원씩 돈 내고 먹어!

서슬 퍼런 어린 은설의 고함에 움찔한 개구쟁이들.

실은 너무나도 진지한 목소리로 돈 내란 말을 하는 은설의 말이 진심 같아서 한발 물러선다.

개구쟁이 1 : 야 더럽고 치사해서 안 먹어. 반찬 좀 나눠 먹는 거 가지고 돈타령이야.

덩치 큰 개구쟁이 메뚜기떼들이 마음이 상한 티를 팍팍 내며 물러가고.

어린 은설과 어린 현준의 무리들이 그들을 쫓아낸 은설을 우러러본다.

어린 은설 : (약간 민망한 듯 다시 앉으며) 후, 나도 돈 얘기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은설의 또또 성숙하고 모범적인 친구 3 : 아냐 , 잘했어. 그 얘기해서 간 거 같아.

어린 현준의 자그마한 친구 1 : 며칠은 안 오겠지.

어린 현준의 자그마한 친구 2 : 응. 다시 오긴 오겠지만 그래도 며칠은 기분 나빠서 안 올 거 같아.

어린 현준 : (잔다르크를 바라보는 샤를처럼 은설을 빤히 바라본다)

C.U 눈알에 하트가 그려진 어린 현준의 얼굴.

E. 어린 현준의 심장 뛰는 소리. 두근 쿵! 두근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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