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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사랑, 그게 뭐라고(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S#4 그날, 종례시간


후다닥 거리며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는 학생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짝이다.

곧, 담임이 앞문을 열고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출석부를 교탁에 던지듯 놓고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한다.


담임 : 오늘 짝 바꾼다. 양성평등 교육이념에 입각해서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번부터는 남자 여자 짝꿍한다.

학생들이 웅성거린다.

목소리 큰 몇몇 여자애들의 짜증 섞인 한숨소리도 들린다.


여학생들 : 아이, 여자끼리 짝하는 게 편한데..

남학생들 : 여자 짝 짜증 나요. (라고 말은 하지만 좋은 지 싫은 지 애매하게 실실 웃는 소리도 많이 난다.)

담임 : 시끄러워.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1번부터 50번까지 무작위로 자리번호표 뽑는다. 남자 짝이 걸리든, 여자 짝이 걸리든 늬들 운에 맡겨라.


잠시 후. 번호표 뽑기를 마치고.


담임 : (칠판에 번호별 자리 배치도를 대충 그려 놓고 뒤돌며) 자, 다들 자기 자리 확인했지? 이동!


C.U 35가 쓰여 있는 종이를 들고 있는 현준의 손.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이동하는 현준.

배정받은 자리에 서서 칠판과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칠판을 보고는 낮게 한숨 쉰다.

키도 작고 눈도 나쁜데 생각보다 뒷자리를 뽑아 아쉬움 가득한 얼굴.

체념하고 자리에 앉는 현준의 옆으로 여학생 교복 등장.

순식간에 상기된 볼.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는 현준.

방긋 웃으며 손인사를 건네는 은설.


어린 현준 : (의외란 듯, 놀란 듯) 어!!

어린 은설 : 안녕? 아 다행이다. 여자 짝 아닌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어린 현준 : ······.(은설에게 여자애 취급을 받은 거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표정)

어린 은설 : (현준의 기분을 눈치 못 챈 듯.. 방긋 웃으며) 사이좋게 잘 지내자!

어린 현준 : 으응.


몽타주. 어린 은설과 현준의 학교생활.

-앞자리 키 큰 학생 때문에 칠판 판서가 잘 보이지 않는 현준.

현준에게 자신의 공책을 내미는 은설.

은설이 지우개, 자, 샤프 등등을 바닥으로 떨굴 때마다 재빠르게 주워주는 현준.

방긋 웃으며 입모양으로 ‘고마워’하는 은설.

즐겁게 어울리며 교실 안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는 은설의 무리와 현준의 무리.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 은설.

오후 햇빛이 은설의 머리칼에 반사되어 부서지면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현준.


S#5 성적표 받는 날, 종례시간


담임 : 성적표 나왔다. 1등. 이은설. 박수!

학생들 : 오올!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수긍하며 손뼉 쳐준다)

어린 은설 : (살짝 미소만 짓고 다시 담담한 표정이 되려고 애쓴다.)

어린 현준 : (부러운 듯, 우러르듯 은설을 빤히 보다가 씁쓸해한다.)

담임 : 대표로 1등만 말했지만 성적 오른 사람들 다 수고했다. 떨어진 사람들은 분발해서 담번에 올리고. 알았지?

아이들 : 예!

담임 : 부모님 사인 받아서 내일 다시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종례 끝. 1번부터 신속하게 나와 가지고 성적표 받아서 집에 간다. 실시!


성적표 받기가 끝나고 하굣길에 함께 가려고 삼삼오오 모여 교실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

교실 뒷문 근처에서 자신의 무리들과 어울리다가 상체만 휙 돌려 현준에게 인사하는 은설.


은설 : (귀여운 동생에게 하듯이) 잘 가, 류현준!

현준 : (힘 없이) 어. 안녕.


쓸쓸히 앞문으로 빠져나가는 현준.

몽타주. 은설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현준.

- 수업시간에 현준에게 자신의 공책을 내미는 은설.

도로 밀어내고 애써 상체를 쭉쭉 늘이며 칠판 판서를 보는 현준.

현준의 관심을 끌려는 듯 일부러 지우개를 떨어뜨리는 은설.

한 템포 늦게 지우개를 주워주면서, 은설을 쳐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우개만 은설의 책상 위로 올리는 현준.

현준의 반응에 ‘얘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현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은설.

여전히 시선을 피하는 현준.


S#6 혼자 걷는 하굣길.


현준의 자그마한 친구 : 아 맞다!! 야 나 오늘 담임이랑 상담이야. (급하게 뛰어가며) 너 먼저 가.

어린 현준이 얼떨결에 인사도 못 나누고 친구와 헤어진 뒤 무심히 뒤돌아 가던 길을 마저 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등을 탁! 하고 친다.

앞으로 한발 밀리는 현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은설이 서 있다.

생각지도 않은 은설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현준.


어린 은설 : 야! 류현준!

어린 현준 : (당황해서)······ 왜?

어린 은설 : 나한테 왜 그래?

어린 현준 :? (어리둥절한 표정)

어린 은설 : 며칠 전부터 나한테 계속 삐쳐 있잖아. 내가 뭐 너한테 잘못한 거 있어?

어린 현준 : 그런 거 아닌데. 너한테 삐친 적 없는데.

어린 은설: 그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한테 잘못한 거 없거든. 근데 너 나한테 왜 그래?

어린 현준 : 신경 쓰지 마, 그냥.

어린 은설 :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니가 계속 나한테 인상 쓰고 있잖아.

어린 현준 : 인상 안 썼는데.

어린 은설 : 안 웃잖아.

어린 현준 : 안 웃긴 했는데 인상은 안 썼는데.

어린 은설 : 그게 그거지.

어린 현준 : 그게 왜 그게 그거······.

어린 은설 : (감정이 폭발해서) 안 웃잖아!! 안 웃으면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


갑자기 눈물이 터지는 은설.

별 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여자애를 울려 버려 미안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억울한 현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 일단 달래 보려는 현준.


어린 현준 : (어르고 달래듯)야, 왜 울어. 울지 마아.

어린 은설 : 네가.. 자꾸.. 안.. 웃으니까... 내가... 잘못···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은설.

마음이 약해져서 일단 사과부터 하고 보는 현준.


어린 현준 : 미안해. 내가 미안.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끼며 울다가 손목이 아픈지 신발주머니를 떨궈버리는 은설.

은설이 떨군 신발주머니를 주워 들고 벌서듯 옆에 서서 ‘울지 마’만 반복하는 현준.


S#7 놀이터


노을이 아주 붉게 물들어 있는 하늘.

그네에 나란히 앉아 빨대로 사이다를 쪽쪽 마시며 아무 말도 않고 있는 은설과 현준.


은설 : (망설이다가) 사이다 고마워.

현준 : 아니야. 그냥 목말라서 내 거 사는 김에 니 거도 산 거야.


둘 다 한참을 말없이 사이다만 마시다가.


현준 : 미안.(뜸 들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살짝 한숨을 뱉고는 말한다) 너한테 좀 쫄린다고 생각했었어.

은설 : 응?

현준 : 너는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그래서 네가 아니라 나 스스로한테 화가 좀 났었는데···내가 너한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줄은 나도 몰랐어.

은설 : 친구끼리 쫄리고 그런 게 어딨냐. 그런 걸로 친구 가려 사귈 만큼 나쁘지 않아, 나.


잠시 또 침묵.


은설 :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우리 주말마다 같이 도서관 가서 공부할까?

현준 : (은설의 뜻밖의 제안을 받고 좋아하는 티가 얼굴에 묻어나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

은설 : 왜? 나랑 공부하기 싫어?

현준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애들이 놀릴 텐데.

은설 : 왜? (하지만 왜 놀리는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곧) 그럼 애들한테 말하지 말고.

현준 : 애들이 보면 ······.

은설 : 아! 혹시 도서관에서 애들 만나면 우리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척하면 되겠다.

현준 : (솔깃한 제안에 볼이 상기되었으나 선뜻 ‘좋다’는 내색은 못 하고) 나랑 공부하면 너한테 도움이 별로 안 될 텐데.

은설 : (방긋 웃으며) 원래 다른 친구한테 가르쳐 줄 때 젤 공부가 많이 된대.

현준 : 부럽다. 나도 너처럼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크고 인기도 많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은설 : (현준의 말이 어떤 뜻인 줄 모르고 약간 시무룩해져서) 부러워할 거 없어. 난 그냥 딴 거는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공부하는 것뿐이야.

현준 :? (고개를 떨군 은설의 얼굴빛을 살핀다)

은설 : 너는 외동이고 너네 아빠랑 엄마랑 두 분 다 의사시라며? 학급일지 담임한테 사인 받으러 갔을 때 담임이 수첩 펼쳐 놓고 있어서 우연히 봤어.

현준 : ······.

은설 :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뭐든지 다 부모님이 시켜주실 수 있지.

현준 : (사실은 너무들 바쁘셔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살고 있으나 사실대로 말 못 하고) 응? 으응.

은설 : 우리 엄마 아빠는 그냥 평범해. (빵긋 웃으며 ) 나한테 사랑만 많이 줄 수 있어.(방긋 웃는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난다.)

은설 : 그래서 그냥 별 수 없이 공부하는 거야. 예중 간 애들처럼 미술이나 음악 전공하는 거는 꿈도 못 꿔. 돈이 엄청 많이 드니까.

현준 : ······.

은설 : 그냥 나 부러워할 것 없다고 하는 소리야. 공부야 나랑 같이 하면 되는 거고!


싱긋 웃는 은설의 얼굴에서 예쁘게 빛이 난다.

놀이터에 흩날리는 벚꽃 잎.


현준 : ······나 너 좋아해.

9-1.jpg


싱그러운 BGM 사이로 놀란 토끼눈이 된 어린 은설의 얼굴 클로즈업.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고백에 흠칫 놀라 살짝 아래로 떨군 얼굴이 귀부터 점점 새빨개지는 현준의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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