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익숙하지만 처음 뵙겠습니다.(1)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현준과 미주의 눈이 마주쳤고, 이내 미주가 은설의 뒤통수로 시선을 내렸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현준이었다.

“미주야.”

“선배.”

“제주도에 있는 거 아녔어?”

“1박 2일 일정이었어요. 혜진이 내일 일찍 갈 데가 있대서 오후에 올라왔죠. 선배는 여기서 약속 있었나 봐요?”

잠자코 있던 은설이 미주의 말에 찬찬히 몸을 돌려 미주 쪽을 바라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눈은 이미 다들 마주쳤는데, 미주는 서 있고 현준과 은설은 앉아 있어 인사를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는데 마침,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서빙을 하는 직원이 길을 막고 서 있는 미주를 스치듯 치고 지나갔다.

“잠깐 앉을래?”

“아, 응.”

‘잠시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그만 길을 막고 선 꼴이 되어 얼결에 합석을 하게 된 것처럼!’




미주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상황이 꽤나 흡족했다.

반지하 통창을 통해 코 언저리까지만 보였지만 한눈에 봐도 틀림없는 현준이었다.

현준을 알아보자마자 미주는 근처에 주차를 하고 오겠다던 혜진에게 재빠르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현준 선배가 레스토랑 안에 있어. 주차하고 5분만 차에 앉아 있다가 와줘.]


미주는 현준에게 따로 식사자리를 가질 만큼 가까운 여성 지인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번화가의 캐주얼한 레스토랑에서, 아무런 긴장감이 없는 얼굴을 하고, 현준이 마주 앉아 편안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여자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이은설. 틀림없어.”

현준의 생일 무렵 은설과 재회한 현준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언젠가는 한 번쯤 자신도 그녀와 마주치리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필이면 오늘이네.”

이혼도 기념을 한다면 바로 오늘이 그 날일 터였다.

할아버지 생신이라 식구들이 모두 모여 내일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혜진에게, 오늘까진 함께 지내 달라며 사정을 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이런 날, 이은설과 철없어 보이는 웃음까지 지어가며 식사를 하고 있는 현준을 보니 미주는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찰진 묵덩이 같은 분노가 울컥울컥 하고 솟아올랐다.




레스토랑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반지하에 낸 통창 안쪽 풍경 역시 조금씩 조금씩 아래쪽으로 뷰가 열렸다.

“뭐야, 저 촌스런 핑크 블라우스. 소매에 붙은 저 프릴은 언제 적 유행인지 생각도 안 나네.”

직접 스타일링 한 듯 균형이 맞지 않게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칼도 어설퍼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웃느라 들썩이는 어깨선의 흔들림도 과장되어 보였다.

“유부녀 주제에 선배한테 뭘 어떻게라도 해보겠단 거야 뭐야.”

미주의 걸음이 점점 우락부락해졌다.

당장이라도 판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레스토랑 문을 박차고 들어간 미주는 홀 들어서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없이 음식을 서빙해 나르는 직원들.

삼삼 오오 앉아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

여럿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듯 왁자한 6인석 테이블과 나온 음식들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3인석 원탁이 미주의 시야로 한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곳에서 성질 나는 대로 난리를 피우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그저 우연히 같은 레스토랑으로 밥을 먹으러 왔을 뿐인.

전부인일 따름이었다.

이혼한 날을 기리지 않아 화가 난다며 따지는 것도,

이혼했지만 수절하지 않고 다른 여자나 만나고 다닌다고 주먹을 행사하는 것도,

내 전남편에게 꼬리 치지 말라며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것도 모두 다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레스토랑 입구의 계단을 찬찬히 내려서는 자신을 보면서 휘둥그레한 눈을 끔뻑이는 현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달려가 핸드백으로 저 뾰족한 턱주가리를 한 대 날려주고 싶을 만큼 다시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째서 당신은 또 그런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 나를 보고 있는 거야.'

미주는 마치 고전 희비극 속의 분노한 여주인공처럼 의연하고 단단한 표정을 지으며 찬찬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레이저 같은 시선으로 현준을 응시하며 레스토랑의 홀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들킨 자의 당혹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표정을 지으며 얼음처럼 굳었던 현준이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미주를 먼저 불렀다.

“미주야.”

낮고 안정된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고 미주는 자신이 이곳에서 무얼 더 어쩌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긋이 제주도 일정을 묻는 그에게, 더구나 저 이은설이라는 여자 앞에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여유, 여유······. 만만치 않은 전부인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 줘야 돼.’

손님보다 조금 더 늦게 귀가한 안방의 주인처럼.

미주는 무릎과 허리에 힘을 주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늘어뜨리니 자연스레 가슴팍이 펴지며 자세가 당당해졌다.

키 크고 늘씬한 몸매를 한껏 살려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 대회에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폼을 잡고 서서 현준의 앞에 섰다.

“선배는 여기서 약속이 있었나 봐요?”

실은 은설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너를 주시하고 있으니 너도 나를 돌아보라고.

이윽고, 은설이 미주를 돌아보며 방긋 웃어 보이는 미소와 함께 목례를 했다.

‘뭐야······.’

미주는 조금 당황했다.

“잠깐 앉을래? 은설아 괜찮지?”

“응. 괜찮지, 그럼.”

은설이 자신이 앉은 의자를 조금 옮기고 빈 의자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들어 동그란 테이블 한편을 비워주었다.

미주도 은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인사해, 이 친구가 이은설이야.”

“아, 그래요? 안녕하세요?”

“은설아, 이쪽은 한미주. 와이프였던.”

“안녕하세요?”




미주가 먼저 도발을 했다.

“선배한테 이야기 종종 들었어요. 꼬꼬마 중학교 때 첫사랑이시라고.”

“애기 때죠, 뭐. 저도 기사 통해 종종 이름 뵈어서 그런가 미주 씨가 낯설지 않네요.”

미주가 살포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들었다.

‘한방 먹이려다 두방 먹었네.’

근래 미주의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르내린 기사는 현준과의 이혼과 관련한 가십들이었다.

미주는 은설이 이혼한 전부인이라는 자신의 처지와 현준이 평소 자신에 대해선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한꺼번에 비꼰 것이라 생각했다.

“일전에 꽤 유명한 의학학술지에서 상도 받으시고 그러셨잖아요. 주산기 심근증 관련 연구로. 토론 수업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자료 찾다가 기사 본 적 있거든요."

“아, 네.”

"논문을 읽은 건 아니고 기사에 발췌된 부분만 보긴 했지만 수업 때 아주 유용히 활용했었어요. 모르시게 제가 도움 받아서 그런가 많이 반갑네요.”

은설이 연예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미주를 추켜세우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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