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

- 선택된 인간

by 차거운

1. 영화 <콘클라베>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

문화 산업은 사회적 변화의 기미를 참으로 민첩하게 포착한다. 이른바 타이밍을 잘 맞춘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 <콘클라베>의 개봉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시기와 잠깐의 퇴원과 선종의 상황들과 맞물려 연로한 교종들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관심사로 떠오르는 교종 선출 과정을 주 서사로 하는 이 영화가 개봉되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이와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두 교황> 역시 가톨릭의 수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본다.

영화 <콘클라베>를 보면서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같은 영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뒤의 두 작품이 흥미 위주의 상상력이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비추어 공격적으로 보인다면 이 영화의 경우는 어느 정도 과장적이고 극화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생각할 만한 거리들을 안겨주는 것 같다.

우선 세상은 왜 콘클라베 개최와 그 결과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일까? 물론 현재 지구상에 14억 가까운 사람이 가톨릭 신자라는 통계가 있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권에 걸친 여러 국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바티칸이 하나의 독립된 종교적 국가를 이루는 현실적인 정치체이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치체로서의 바티칸이 아닌 윤리적 종교적 측면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이 더욱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과 권고 등이 발표될 때마다 그 영향은 적지 않았고 많은 논쟁과 후속적인 논의가 뒤따랐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 끝나는 차원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차원의 영향력 때문에 사람들은 가톨릭 수장의 존재와 그 언행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여행을 가서 수령이 오랜 나무나 건축물을 보면 저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오랜 유적이나 선사시대의 암각화와 같은 것도 그렇다. 그리스의 신전들, 로마의 카피톨리움 언덕과 콜로세움 등과 같은 장소들도 마찬가지다. 문화적인 요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2천여 년을 떠돌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종교를 바탕으로 보전했던 유대인이나 네로를 비롯한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견디고 콘스탄티누 이후 국교가 되어 서구 문화의 한 축이 된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054년에 동서 교회가 분리되고 1517년 이후의 신구교 분리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로마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살아서 자신의 유산을 지켜내고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때로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살아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대로 교회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제 새로운 목자를 뽑기 위해 영화에서처럼 콘클라베가 열리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방향이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 하고 평가를 하고 누가 차기 교종으로 선출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종이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사람들만의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오래된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언제나 성령이셨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새 교종이 탄생하기를.


2. 영화 <콘클라베>를 바라보는 안과 밖의 시선

우선 이 영화에 달린 자막의 용어적인 측면을 생각해 본다. 예전에 가톨릭 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교회 내에서 공식적으로 작성된 경우가 아니면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익숙하지 않고 용어의 경우에도 개신교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 영화의 경우 가톨릭적인 용어에 충실하게 작성된 것 같아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딱 한 군데가 이질감을 느끼게 한 것 같지만.

서사적 흥미를 제고하기 위해서일 수는 있겠지만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콘클라베에 참석한 전 세계 추기경들이 권력과 주도권을 쥐기 위해 이합집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가톨릭 신자로서 불편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쓴 약을 삼키듯 곱씹어 보게 된다. 사실 우리가 인간인 탓에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고자 하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 교회의 역사에서 그런 모습을 보기도 한다. 지금도 인간의 약점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많은 책임을 진 사람은 더 엄격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진보적이니 보수적이니 하는 평가들은 일반 사회의 그것과 같은 것일까. 교회는 곳간 안에서 옛것도 꺼내고 새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 교회는 낡았으되 새롭고 자신이 물려받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지만 늘 새롭게 변화해 간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때로는 논쟁적일 수는 있지만 교회는 돌로 된 심장이 아니라 살로 된 심장을 간직하고 있다.

권모술수를 쓰는 사람과 성적 탈선을 한 사람이 영화에는 나오고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택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교회는 완전한 성인들로 구성된 실체가 아니다. 지상을 순례하고 있는 교회는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으며 구성원 각자의 죄에 대하여 자신은 물론 연대적인 책임감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그렇게 모인 교회에는 분명히 성령이 활동하고 계신다.

이 영화가 어쩌면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세상이 기대하고 있는 바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에 카불에서 온 추기경이 하는 말은 서두에서 추기경단의 단장의 연설과 맞물려 괄호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한다. 모든 과정은 지나가고 하얀 연기가 피어난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믿는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우리는 모두 그분의 눈길 아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처럼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여전히 희망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희망 속에서 새로운 교종을 기다린다.

지난달에 제주 올레길을 걷다가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를 지났다. 곡절 많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하느님을 만나 살던 한 여인의 삶을 떠올렸다. 황사영 백서를 쓴 사람의 아내로서 아들까지 추자도에 내려놓고 한평생을 무슨 희망으로 살아갔을까. 그녀의 삶을 사람들은 동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믿음 깊은 자의 눈으로 보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임을 믿는다.


제주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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