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록 풍요로운 정신의 풍경들
2024년 8월 1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카를로스 크루즈 디에즈의 작품 전시회를 보았다. 삼원색을 활용하여 다양한 빛의 감각을 표현하는 옵아트의 영역을 개척한 작가라고 소개가 되어 있었다. 광학 장치를 이용한 설치미술적 특성을 가미한 작품에서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와 같은 분위기도 있었고 관객의 시신경의 감각적 역동을 미리 계산하고 용의주도하게 제작하는 예술적 창작의 전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러한 다양한 예술의 영역들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나지막이 뜻 모를 가락을 읊조리며 돌아서서 스스로 생각해 본다. 세상은 얼마나 감각을 자극하는 정신적 산물들로 넘쳐나는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는 자세를 굳게 견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수많은 아름다움과 뜻깊은 정신의 기미들을 포착하지 못하고 둔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딱한 일일까.
대학 동기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잠시 공감할 기회를 가졌다. 서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맥락은 달랐지만 같은 하늘 아래 비슷한 관심과 고민을 하면 살아가는 처지라 심리적 복원의 속도가 놀랍도록 빠르다. 그 친구의 손에서 건네진 한 권의 책. 나희덕 시인의 책 <예술의 주름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나희덕 시인은 단정하고 속이 꽉 여문 과일처럼 은근하고 웅숭깊은 시를 오래도록 써 온 시인이다. 그녀의 등단작 <뿌리에게>를 기억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같이 읽기도 한 작품이다. 학교 현장에서 분석되고 가르쳐지는 시는 사람들에게 성가를 누리는 셈이기도 하지만 이리저리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낱낱이 분해되고 평가적인 도식으로 쾌도난마 식으로 해부되어 본래의 감성적 자유로움의 야생성을 잃어버리고 박제화될 위험이 있다. 모든 글은 정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고 홀가분한 감성적 경험으로 남아야 한다. 정답 없음. 이것이 모든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전제되어야 할 자세가 아닐까.
그래서 나의 해석은 당신의 해석과 다르고 나의 감각에 포착된 예술적 형상은 타자의 그것과 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당신의 이 그림을, 이 조각을, 이 춤을, 이 건축을, 이 시를, 이 행위를,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지. 또 당신의 감각을 통과한 이 형상들과 매재들은 당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희덕이라는 시인이 읽고 감각하고 반응한 다양한 예술 형식과 그 산물에 대하여 조용히 풀어놓는 감회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녀의 시를 읽는 것 못지않게 과즙이 풍성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처럼 개운하면서도 맑은 여운이 남는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거니와 삶은 얼마나 풍요로운 목소리와 빛깔들 소리들 형태들을 감추고 있는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맛볼 수 있는 혀와 만질 수 있는 손과 공감할 수 있는 심장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풍성한 이 세계의 진경이 드러날 것이다. 때론 아플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고 환하거나 어두울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인간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몸 담았던 예술의 영역과 그들이 가 닿았던 정신적 영역에 대해서 몇 가지는 알고 대부분은 잘 모른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세계를 함께 더듬고 공감할 수 있는 글쓴이의 문화적 감수성과 폭넓은 관심에 경의를 살짝 표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들의 이름을 나열해 본다. 아녜스 바르다, 토마스 사라세노, 류이치 사카모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황윤, 정영창,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 마리 로랑생, 케테 콜비츠, 시오타 치하루, 클라우디아 요사, 한설희, 고야, 자코메티, 글렌 굴드, 마크 로스코, 윤형근, 김인경, 뒤샹, M.C 에셔, 칸딘스키, 우스터 그룹, 김용준과 존 버거, 목수 김씨, 짐 자무시, 데이비드 호크니,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조동진, 장민숙, 이매리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