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으로 나아가라.
모든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고유한 서사를 간직한 책과도 같다. 그 책에는 여백이 많다.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그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타인의 이야기에서는 다채로운 조연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물들이는 배경이면서 자신 인생에서는 전경이 되기도 한다. 삶은 그렇게 다채롭고 풍요롭게 채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수렴하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2025년 4월 21일 로마가톨릭교회의 제266대 교종(교황이라는 명칭보다 이렇게 부르고 싶다. 그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강조하셨으므로.)이셨던 프란치스코가 순례자로 머물던 이 땅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가 세상에 머문 시간(1936-2025)은 88년 정도가 된다. 로마의 주교직(2013-2025)에 머문 지는 12년 정도가 되었다. 교종이 되고 난 뒤의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언제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세계인의 가슴에 우리 시대의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보다 더 강한 영감과 위로와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희망의 거인 사랑의 투사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신원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전투적인 무신론자도 있고 무속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고 불가지론자도 있고 유다인의 믿음도 있고 이슬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기독교라고 통칭할 수도 있지만 로마가톨릭교도, 동방정교도, 프로테스탄트교도 등으로 구별될 수도 있는 많은 종교인들도 있다. 종교적인 믿음이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한 이 세상에 진정 살아 있는 희망을 주고 있는지 모든 종교인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현재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맞물려 자신의 믿음이 진정으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고 절망스러운 눈앞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현상을 넘어 우리가 꿈꾸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종교인이 그런 비전을 지니고 살고 있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미래로 밀어가는 힘과 역동적인 활력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으며 사르트르가 그의 희곡 '닫힌 방'에서 언급한 대로 타인을 지옥이 아닌 나와 함께 저 피안으로 건너가야 할 이웃이자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포용적이고 공존적인 관점은 어떻게 열릴 수 있을까. 우리 인류가 몸만 성장한 어른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숙한 존재로 책임감 있게 세계를 가꾸어가려면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누군가(아마도 마르크스)가 그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종은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희망>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믿는다고 종교인들은 말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라고.
나는 지금 동영상 하나를 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2014년 한국을 사목 방문하셨을 때 명동성당 구내에서 성당 쪽으로 이동하시다가 교문에 매달려 환호하고 소리를 지르는 계성여고생들을 보시고 환히 웃으시며 다가오는 모습, 그리고 정제천 신부님을 통해 설명을 들으시고 학생들에게 강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아 손으로 쉬! 하는 동작을 취하시는 모습, 그리고 강복을 주시고는 빗속에 천천히 떠나시는 모습이 담겨 있다. 계성여고의 영어 교사였던 선배 선생님이 찍은 동영상이다. 이번에 희망의 순례 희년을 맞아 시월에 로마에 갈 예정인데 그때 혹시라도 교종을 뵐 수 있게 된다면 이 영상을 보여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쉽게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1967년에 세상에 태어났다. 교종보다는 31년 늦게 세상에 태어난 셈이다. 앞에서 얘기한 그 동영상이 촬영되던 시점에 나도 그 자리에서 먼발치로 교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 일생을 통해 물리적인 차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불과했던 그 경험은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친밀한 개인적인 교류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나는 교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살아왔다. 호르헤 마리아 베르골료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 2013년 이전에는 거의 몰랐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차라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면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작가라고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콘클라베를 통해 베드로의 후계자로 일하면서 나는 그분을 주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의 삶을 통해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가시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교회를 매개로 연결된 그런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도 그의 양들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관계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그에게서는 양들의 냄새가 났던 것이니 그는 하느님 백성의 착한 목자였던 것이다. 교종의 가르침처럼 사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자란다. 존 던의 시구 그대로 '그 누구도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닌 것이다. 오묘하게도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불가의 <유마경>에서 말하듯 '세상이 병들었으므로 내가 아프다'라는 원리에 해당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바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절실하게 알게 된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있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참 두렵고 막막한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고통을 견디는 것이 힘들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신 것을 기억한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시절을 겪은 그분의 경험에서 보면 고문당하고 육체적으로 존엄성을 훼손당하는 모욕을 겪고 순교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신 바 있다고 하듯 누구도 영웅처럼 고통에 직면하기 쉽지 않다. 나 역시 죽음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지난 부활절 메시지(우르비 엣 오르비)를 통해 생애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축복을 전할 때 이미 그분의 얼굴에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작별인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마지막까지 충실한 목자였고 진정으로 부활에의 그날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떠나셨다고 믿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마지막 모습도 그렇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그분들은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전과 같이 두렵지만은 않다. 다만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지고 있지만. 이제 나는 안다. 죽음이 최후의 말이 아니라 삶이 최후의 마침표라는 걸. 그것은 믿는 이의 표현대로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죽음이 내게 희망을 준다.
* 프롤로그
1927년에 침몰한 마팔다호에 승선할 뻔했던 교종의 조부모님과 아버지가 사정으로 인해 승선하지 못한 이야기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약 그 배에 문제없이 승선했다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문제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처럼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님이 흥남에서 철수한 빅토리호에 승선할 수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와도 비교할 만한 이야기다. 이렇듯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하나의 우주로서 그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믿는 이들은 이것을 섭리라고 부른다. 사랑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생명은 우주만큼 소중한 것이다. 나의 생명도 너의 생명도 모두 신의 눈길 앞에 환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1장 :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으리라
교종은 늘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외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짚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조부모와 아버지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국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좋은 일이지만 세계적인 불평등과 전쟁과 불의와 폭력 등으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의 희망을 찾아 끊임없이 이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환경문제, 전쟁과 폭력과 억압, 빈부격차와 사회적 인종적 차별 등 다양한 원인이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세상은 기술적, 경제적으로는 동시화 세계화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개방과 포용의 차원에서는 격리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다리를 놓지 않고 장벽을 쌓고 있다. 그는 예언자적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 점을 지적해 왔다.
* 2장 : 평화를 미워하는 무리와 너무나 오래 지냈네
전쟁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가장 잔인한 행위다. 전쟁을 위해 정치가들이 내세우는 명분들은 자기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민족과 영광과 영토와 생활권 등등. 삶을 위해서 삶을 철저히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그런 행위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시기를 지나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을 치러냈던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의 일반 민중들인 것이다. 교종의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서 돌아왔지만 이웃들 친지들 많은 사람의 희망찬 미래가 진흙탕에 묻혀 피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수천만 명이 죽어간 그 전쟁들의 참혹한 상황들을 화보나 자료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나치 독일의 만행과 스탈린의 공산체제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비롯해서.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지옥의 문과 그대로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은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불티가 남아서 꺼지지 않고 또 번져가는 산불과도 같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수없이 많은 세계가 소멸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우주이니까. 그는 전쟁과 폭력과 공격적인 모든 상황들에 대해 고발하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 3장 : 건강한 불안이라는 선물
오늘날의 정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나 두려움을 선동하면서 이루지 못할 약속을 제시하면서 당파적이고 단기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는 점점 협소해지고 사람들은 불안과 증오 등의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아무도 큰 지평을 갖고 더 멀리, 더 넓게, 더 깊게 관계의 그물을 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이간질을 하고 있다. 종교조차도 국경 앞에서 멈추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나의 인류라는 이상은 위태롭게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학명이 보여주듯 다 같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닌가? 분열의 덫에 빠지지 말라고 교종은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다.
* 4장 : 세상 끝자락에서
교종은 초촐리 신부님과 맺어진 끈끈한 유대와 가족 모두의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삶엔들 이런 인연이 없을까 싶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그 부모를 포함한 지역과 나라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자란다. 아르헨티나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함께 모여 가족을 형성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발전한 나라로 보인다. 어떤 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고유한 삶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의 좌표를 확인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좌표에서 출발해서 더 넓은 지펴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된다.
* 5장 : 사람이 많을수록 더 신나지!
교종은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외동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형제는 축복이지 않을까?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별 탈 없이 자랄 수 있는 많은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상황에 있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작년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때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을 지나칠 때 느낀 것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다녔던 태백의 초등학교도 어느새 분교 수준의 규모로 쪼그라들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흥성거리던 골목과 아이들의 목소리, 이웃들의 울고 웃던 일상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던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죽음 너머의 그곳까지 간직될 것이다. 교종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한 사람이었다.
* 6장 : 팽팽한 밧줄처럼
교종의 삶에서 외가에 대한 기억과 1961년 9월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이다. 1981년 1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남동생 오스카르는 1997년 10월에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마르타는 2007년 7월에, 남동생 알베르토는 2010년 6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막내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와 함께 남매의 정을 나누다가 이제 교종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결국 존 던의 시구처럼 우리의 삶은 누구도 홀로인 섬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한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 울리는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가?' 어쩌면 지금은 당신을 위해, 그리고 머지않아 떠날 나를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일이다.
* 7장 :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았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중요하다. 축구를 하고 피자를 먹고 함께 뒹굴고 함께 뛰는 경험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든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과 함께 어울리며 사는 것이 정상이다. 교종이 언급한 것처럼 삶은 때로 원초적인 감각에 의해 환기되는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마들레 한 조각이 불러내는 그 어린 시절 전체에 대한 기억처럼.
* 8장 : 인생, 만남의 예술
살아가면서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역동적으로 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상황과의 조우를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뛰어들라. 독서와 우표 수집의 취미를 가진 교종은 축구와 농구를 즐기면서 책을 읽는 것에도 빠져든 그런 평범한 아이였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 9장 : 쏜살같이 지나가는 하루
기숙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자전거를 빌려 타다가 사고를 내서 망가뜨린 친구에게 변상을 요구했던 기억을 후회하면서 살다가 그의 아들을 만나게 되어 그 친구에게 사과를 했던 일화는 비슷한 사례 몇 가지와 함께 그의 됨됨이를 알게 한다. 사람은 잘못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는 동안 그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님께서 주신다면 그 기회를 꼭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만난 사람 모두와의 인연을 정말 소중하게 여긴 사람으로 보인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열거된 슬픔의 목록을 떠올려 볼 때 이는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 10장 : 그들은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보았다
삶은 마냥 환하게 빛나는 봄날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장이다. 아버지의 권총으로 친구를 살해한 친구, 자신의 어머니를 칼로 살해한 열여섯 살의 후배에 대한 기억을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불가지론자인 그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인간은 누구나 구원과 진실을 향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모할머니에 대해서 교종과 그의 가족이 보여준 사랑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사람의 품성은 그냥 형성되지 않는 것임을 생각한다.
* 11장 : 편도나무 가지처럼
1953년 9월 21일, 교종이 성소에 대한 내적 끌림을 강하게 느낀 날이다. 이런 기억은 누구에게나 강렬해서 평생 잊히지 않는 근본적인 기억 즉 카이로스적 순간이 된다. 많은 성인들의 변화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가장 유명한 것은 성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일어난 회심이 아닐까 한다. 그 강렬한 체험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원초적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성 프란치스코의 회심,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회심 등등.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을 통해서도 그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골고다에서 예수님의 자비를 구한 구원받은 그 사형수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이 아닌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 12장 : 저들이 밥 먹듯 내 백성을 집어삼키는구나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1976-1983)과 관련된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대목이다. 직장 상사로 만난 에스테르라는 여인의 삶과 그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 기간에 군부 독재 정권에 의해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던 참혹한 폭력과 만행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언급하고 있다. 살해, 강간, 폭행, 고문 등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그 시절, 5월 어머니회를 비롯하여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알게 해 준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을 비롯하여 중남미 전역에 횡행하던 군사독재 시절의 상황들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의 상황도 떠올리게 된다. 유신정권과 군부의 살육과 만행을 우리 역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공감하고 고통스럽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상황은 인간의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 13장 : 아무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교종이 1957년의 독감으로 사경을 헤맸던 기억과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수녀님과 의사들을 떠올리고 있는 장이다. 그리고 교구 사제가 아닌 수도회 사제의 길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도 이야기하고 있다. 홀로 길을 가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그의 생각이 드러난 대목이며 교황 관저가 아니라 산타 마르타를 숙소로 하게 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다. 함께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14장 :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
예수회에 입회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장이다. 교종이 수도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특히 예수회의 역사와 특징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청빈, 정결, 순명이 수도자에게 요구된다고 알고 있다. 아울러 이 장에서는 교회 안에서 벌어진, 벌어지고 있는, 벌어질 수 있는 아동 성 학대를 비롯한 성적 스캔들과 과오에 대해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가해자는 물론 주교와 교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의 수치와 부끄러움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역시 드러나지 않게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알게 하는 부분도 있어 위안을 준다.
* 15장 : 온전한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
1963년 무렵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류 역사상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의 공격 대상이 된 두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전쟁과 핵무기의 끔찍한 성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장이다. 특히 전쟁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들의 무책임한 모습에 대해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군비 확장에 쓰는 비용이 인류의 삶에 전혀 유익하지 못한 것임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교종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 16장 : 어미 품에 안긴 아기처럼
1969년 12월에 교종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사제로 서품 되었다. 함께 서품 받은 동료들은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서품 무렵의 기도문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사랑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사람은 한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경험하고 살아온 모든 날들의 기억과 그의 발자취가 오늘의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두렵다. 시경에 나오는 '전전긍긍 여리박빙'이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무엇이며 교회란 무엇인가? 교종은 말한다.
저는 늘 그 얼굴들을 기억합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얼굴, 자녀를 키우며 한평생을 바친 이들의 얼굴, 가족의 양식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의 얼굴, 병상에 누워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온갖 상처를 입고도 주님을 섬기는 기쁨의 미소를 잃지 않은 연로한 신부님들의 얼굴, 세상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수녀님들의 얼굴, 이 모든 얼굴이 제게는 하느님 백성의 거룩한 모습이요, 교회의 참된 얼굴입니다. 교회는 모든 이를 품에 안는 우리 모두의 집이지, 선택받은 소수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경당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편 교회의 넓은 품을 우리의 안일함을 감싸는 아늑한 둥지 정도로 축소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희망, 291쪽)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우리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믿음 속에서 함께 걸어가자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우리에게 교종은 당부하고 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 17장 :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기에
교종은 독감에 걸린 일과 허파 일부를 제거한 수술 등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형제들보다 더 오래 지상의 순례를 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자신이 받은 풍성한 삶의 기회를 떠올리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어떠한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지난날의 기억을 반추해 볼 때 감사할 마음이 드는가? 아니면 불평하는 마음이 일어나는가? 지금 나는 내 삶에서 있었던 모든 일과 만남에 대해서 교종과 마찬가지로 감사하고 또 그런 자격이 없음에도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갚지 못하고 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삶을 마지막까지 충실히 살았다고 본다.
2013년 콘클라베 당시를 회상하는 교종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때마침 영화 '콘클라베'가 상영되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교종의 짧은 연설이 동료 추기경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표는 사용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로 부시며 당신의 길을 열어가신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점점 든다. 교회는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세상 끝날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자.
지금도 기억이 난다. 2013년 콘클라베에서 교종으로 선출된 후 발코니에서 운집한 신자들에게 '좋은 밤입니다.'라고 인사한 후 자신을 위해 기도를 청하던 겸손한 모습. 교종으로서의 권위로 축복을 내리기에 앞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달라고 하던 그 모습. 그의 교황명은 '프란치스코'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이 늘 의탁하던 성모 대성전의 회랑에 묻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와 성모님의 도움과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었다. 아무도 혼자서는 단단히 설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너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다.'라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18장 모든 이를 품는 마음으로
2013년 굴뚝 위로 피어오르던 흰 연기와 함께 시작된 그의 사목은 '모두 들어오라'는 구원의 개방성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싶다. 그를 위해서는 교회가 상처받고 더럽혀질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마들렌 과자가 어린 시절을 불러오듯 목자에게서 양들 특유의 체취가 묻어나야 함을 강조하곤 했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야전병원'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도 가르쳤다.
삶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신앙은 과거의 상처와 잘못 앞에서 멈추지 않고, 편견과 죄를 뛰어넘어 나아갑니다. (같은 책 349쪽)
어떤 일들은 성적인 죄를 가장 큰 문제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이 가장 심각한 죄는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죄, 육적인 죄일 뿐입니다. 오히려 가장 중대한 죄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 위장하는 죄들입니다. 교만, 증오, 거짓말, 사기, 억압이 바로 그것입니다. (같은 책 353쪽)
전례는 사목과 동떨어진 형식적인 의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추상적인 영성 행위여서도 안 됩니다. 전례는 만남입니다. 다른 이들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뒤돌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걷는다는 것은 곧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새로운 도전을 끌어안는 일입니다. (같은 책 356-357쪽)
* 19장 : 어둠의 골짜기를 걸으며
역사적인 기억이 된 어둠이 있고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고통의 상황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폭력, 르완다의 종족 학살, 아우슈비츠의 만행,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보스니아, 수단, 우크라이나 전쟁, 이라크 시리아에서 횡행한 다에시의 폭력, 다양한 명분으로 이루어진 테러 행위들, 국가의 공권력에 의한 폭력 등은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고 할 말을 잃게 한다. 교종은 남수단 지도자들과 만났을 때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다.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텅 빈 베드로 성전을 가로질러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던 그 모습도 기억한다. 고통과 그에 따른 증오를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 교종의 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 20장 :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교종은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시아파 최고 종교 지도자와 만났고 유대교 지도자, 성공회, 정교회 등 갈린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우리가 모두 잘 아는 그의 행보였다. 갈등과 분열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누구나 알면서도 그 자장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는 우리가 공통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차이점에 늘 돋보기를 들이대고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민족과 계층과 젠더와 종교 등의 이유로 빚어지는 갈등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다. 무슬림과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은 각각 드러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된 믿음의 뿌리는 아브라함이다. 그래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의 지평에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국적에 따라 성별에 따라 소득에 따라 넘을 수 없는 벽을 쌓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파국일 뿐이다. 이라크 시아파의 알시스타니 대아야톨라와의 대화에서 이끌어낸 구절을 보자.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형제이거나, 같은 창조주께서 지으신 평등한 존재입니다."(알시스타니의 말씀) 형제애 안에는 이미 평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 평등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발전과 평화의 길은 결코 이분법적이거나 대립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포용과 깊은 존중만이 그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책, 395쪽)
이 장에는 시리아 난민을 바티칸에서 수용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교종이 늘 난민과 이민에 대해서 마음을 열라고 한 것과 연결되는 일이다. 이러한 이주민의 문제는 이제 인류의 인간애와 공존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가장 첨예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본다. 부디 교종과 같이 우리 모두가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진실은 주님께서 우리 삶의 시간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 속에서 저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의 온 생애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저는 그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같은 책, 408쪽)
21장 : 평화의 스캔들
세계대전과 같은 규모가 아닌 국지적인 전쟁과 내전의 빈번한 발발에 더해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는 기후 난민을 발생시키고 이는 이주의 물결을 강화하고 있다. 이주민의 물결은 다시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태도를 제1세계에 강화하는 흐름과 맞물려 민족주의나 문화적 고유성을 내세우는 극우적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도 교종은 "다리를 놓는 대신 장벽을 세우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발언하며 예언자적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파국적인 자멸의 단계로 진입하지 않고 인류 최후의 날을 가리키는 시계의 초침을 뒤로 돌릴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지금 많은 의심과 두려움이 솟구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종은 우리에게 '더 크고 아름다운 꿈'을 꾸라고 당부한다. 전쟁은 광기이고 평화가 이성적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자고 한다.
전쟁은 죽음의 상인들만 살찌우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는 광기일 뿐입니다. 만약 일 년 동안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면 세계의 기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고, 단 하루만이라도 군사비 지출을 멈춘다면 3,400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책, 416쪽)
카불에서든 키이우에서든, 키부츠에서든 가자 지구나 티레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아이를 내 자녀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것만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서로의 생존권마저 짓밟으려 드는 이 비극적 상황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입니다. 복수의 말과 행동으로는 그 어떤 구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정의로운 말과 행동으로만, 상대를 꺾으려 하지 않는 겸손한 말과 행동으로만 꽃피울 수 있습니다.
(같은 책, 422쪽)
* 22장 희망을 잃지 않는 작은 소녀의 손을 잡고
2014년에 교종이 방한했을 때 세월호 유족 중의 한 사람에게 교황청 대사관에서 세례를 주신 적이 있었는데 이 장에서는 11년간 혼인성사를 하지 못하고 살아온 승무원 부부에게 비행기 안에서 혼인성사를 베풀어준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얼라이브'로 잘 알려진 우루과이 비행기의 안데스 설원 추락사고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희망과 그것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희망에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을 힘차게 되풀이한다. 하느님이 인간의 희망이시므로.
* 23장 : 미소 지으시는 하느님의 모상
교황은 일찍이 희극인들과 만나 웃음의 긍정적인 가치를 강조한 적이 있다. 호모 루덴스, 유희하는 인간, 웃는 인간. 이 대목은 나 자신이 많이 성찰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엄격한 사람, 진지한 사람,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경직되어 있기 쉽고 타인에 대해서 관용과 수용적 태도를 지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잘 웃는가. 삶에서 접하는 소소한 일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언행을 하는 사람인가.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는 웃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장 갖고 싶고 만들고 싶은 성격과 습관이 있다면 긍정적인 사고와 잘 웃는 태도다. 물론 삶의 곡절로 인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테지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온전하게 마음을 비울 때 그 영혼이 우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웃지 않는 영혼은 구원에서 아직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닐까. 고통과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고요한 평화가 깃들기를 그것이 프란치스코 교종이 늘 웃는 모습을 간직한 비결이 아닐까. 그건 정말 귀한 하느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끊임없이 청해서 얻어야 할 보물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웃음이야말로 풍성하게 갖고 싶은 덕목이다.
* 24장 : 더 좋은 날들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누군가 나에게 지금 삶에 만족하는가?"라고 묻고 다시 삶을 되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련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가서 산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실수할 것이고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것은 시간의 강물에 흘려보내고 현재를 거쳐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기대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종 역시 그렇게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계신 주님의 현존을 증언해야 하며, 언제나 내일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곧 우리의 가장 빛나는 날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다하여 그 영광스러운 날들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같은 책, 471쪽)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소파에 앉아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태한 꿈이 아닙니다. 우리를 깨우고, 도전하게 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결단을 내리게 하는, 그래서 우리를 모두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꿈이 필요합니다. (같은 책, 486쪽)
특히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삶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이를 선용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고 인간의 영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감을 나누게 하는 근본적 요소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드론을 이용한 전쟁 수행과 인공지능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과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중요한 지점을 교회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의 차원에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 25장 : 저는 한낱 지나가는 발걸음일 뿐입니다
교황직에 대한 언급으로 이 장은 시작된다. 분열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계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봉사와 친교를 실천하는 교황직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분이 교회에 남기는 일종의 유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회가 개종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한다는 말씀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성실하게 고민하는 무신론자가 안이한 자기만족에 빠진 그리스도인보다 낫다는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다수가 아니라 점점 소수자가 되어가고 있다. 세상의 길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교회는 결코 다수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이 점점 교회의 가르침이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세상의 파고 속에서도 굳건하게 희망을 간직하고 지상의 순례를 마친 교종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겸손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저는 한낱 지나가는 발걸음일 뿐입니다.'라고. 지금 그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이 아니라 성모대성전에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며 이제 막 영면에 들었다. 우리 모두 지나가는 지상의 순례자일 뿐이니 부디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그 순례의 길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일찍이 루쉰은 그의 '고향'이라는 단편에서 희망에 대해서 길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된다고 희망도 그러하다고. 그렇다. 희망은 희망을 간직하고 믿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증거 되고 더욱 단단해진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움 꿈인 희망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고통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듯 우리의 희망도 마취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이끌고 변화시키고 추진시키는 동력을 지닌 그 무엇이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간과 공간의 특정한 좌표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 되는 셈이다. 우리의 삶은 타인의 삶과 관련되어 진동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곧바로 다른 이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양자적 얽힘이라고 빗대어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고통이 넘쳐난다. 그런가 하면 가슴을 뜨겁게 하는 환희와 아름다움도 공존하고 있다. 세상은 누군가의 말처럼 이토록 참혹하고 동시에 이토록 아름다운 양면성을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 고통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고통을 보탤 수도 있는가 하면 이 고통을 줄이고 기쁨을 늘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신명기의 그 말씀을 떠올린다. '나는 너희에게 삶과 죽음 두 가지를 내놓는다. 선택하여라'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선언임과 함께 그 책임에 대한 경고의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삶과 그의 가르침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성 교회의 보화에 풍성한 결실로 덧보태어졌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며 자신의 몫을 다할 때다. 산 이와 죽은 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우리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님께 얻어 주시기를 이제 안식에 든 교종께 기도한다.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당신의 일꾼 프란치스코 교종을 세상에서 불러가셨으니
당신 품에 안아 편히 쉬게 하소서.
살아 있는 저희에게는 그가 남긴 삶의 행적들이
마치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도 같이 선명하게 남아 있나이다.
그러하오니 저희가 그가 올바로 걸어간 길을 벗어나지 않고 살며
그가 멈춘 곳에서 새롭게 희망의 길을 열어가는 순례자가 되게 하소서.
그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가 간직했던 희망과 믿음과 겸손과 웃음을
유산으로 넘겨주시어 우리가 그 덕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울러
부활의 그날까지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품 안에서
그가 편히 쉬게 하소서.
마지막 날에 그와 함께 저희도 부활하여 당신 자비를 입을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끄시고 변화되게 하소서.
저희의 모든 희망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저희 바람을 들어주시고 필요한 은혜를 베푸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