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 속의 새 꺼내기' 公案과 한강의 문학
세상의 많은 고통을 모아서 축제를 벌이는 일이 가능할까. 축제란 모름지기 기쁨과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사육제는 긴 슬픔과 절제의 시기인 사순절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쏟아내는 가불된 욕망의 충족처럼 보인다. 고통을 예감하면서 벌이는 카니발이란! 앞으로 있을 시련과 슬픔을 인간이 미리 예측할 수 없기에 재난이 닥치고 나면 평소에 보냈던 모든 평온한 날들이 사실은 사육제와 같은 고통을 예감하는 축제가 되고 마는 건 아닐는지. 축제는 일상과 일상 사이에 매듭처럼 존재함으로써 두 시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전환의 기능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축제는 고통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나 기쁜 날들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능할 수 있겠다.
정현종의 시 '고통의 축제 1'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당신이 생의 機微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생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기서 '생의 기미'란 무엇인가? 시인은 예민한 존재다. 광부들이 막장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카나리아처럼 극소한 환경 변화에도 쉽게 죽어가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또한 '감금될 수 없는 말'이란 무엇인가 화자의 설명에 의하면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대상 혹은 현상을 가리키는 기표다. 그런데 그 대상이나 현상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은 금기어에 속한다는 것이겠다. 생의 기미를 아는 것은 이렇게 금지되지 않은 말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문학은 감금되어 있지 않은 언어로 자유롭게 편지를 쓰는 것과 같은 욕망을 발산한다. 여기서 언어를 매개로 하여 벌어지는 고통의 축제가 가능하게 된다. 현실이 구속하는 언어의 부자유를 뚫고 자유로운 편지 혹은 글을 쓸 수 있는 행복한 축제가 고통의 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불교 공안 중에 '병 속에 든 새 꺼내기'가 있다. 병 속에 새가 들어가 자라고 있다. 새는 자라고 병은 점점 좁아진다.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도 다치지 않게 꺼낼 수 있겠는가? 이 공안에 대한 모범 답안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비교할 만한 것으로 이른바 딜레마를 해결하기에 대한 질문도 있다. 뿔 사이로 피하기, 뿔로 잡기, 반대 딜레마 제시하기. 혹은 이와 유사한 사례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알렉산더는 아무도 풀지 못하던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교의 공안으로서의 '병 속에 든 새 꺼내기'를 이해하고서도 여전히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서 겪는 이 幻의 세계를 놓지 못한다. 이 없음의 세계가 피와 눈물을 흐르게 하고 그 고통의 감각은 통렬하고 그 슬픔의 기억은 짙고 강해 문신처럼 영혼에 남기에 쉽게 그 해결책을 수긍하기 어렵다. 논리는 현실을 설득하기 쉽지 않고 칼로 자른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다시 사용하기 어렵다. 결국 모든 문학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든 이 공안으로서의 화두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그 질문은 재귀적이어서 질문을 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도전이 된다. 한강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괴로움과 함께 기쁨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 괴로움은 무엇이고 또한 기쁨은 어떤 것일까?
2.1. <채식주의자>의 경우
[채식주의자]
사람 사는 일에는 늘 예상하기 어려운 싱크홀과 같은 사태의 발생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예측은 귀납적 성격을 갖고 있기에 단지 확률적 기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느닷없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 닥쳐오는 사건들은 그 영향을 받을 대상들에게 어떤 인간적인 연민도 지니지 않은 가치중립적 사건일 따름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익숙한 삶에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듯한 불안에 사로잡힌 적은 없는가? 거리가 낯설게 느껴지고 자신의 이름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징후들은 간헐적으로 우리를 엄습하곤 하기에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터이다. 단단하게 디디고 선 대지가 지진으로 요동치면서 집이 무너지고 삶이 무너지고 일상이 무너지는 그런 재난과 같은 변화의 어떤 계기는 우리 내부의 질병과 같이 잠복기를 거쳐 천천히 진행되다가 치명적인 증상으로 솟구쳐 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 영혜라는 인간이 있다. 그녀의 삶은 정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그것은 사회적으로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결혼 오년차의 남편의 시선에서 아내는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착용하는 속옷인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는 것 외에는 특이할 만한 점이 없는 여자다. 집에서 할 만한 일을 함으로써 경제적인 협업도 나름대로 하고 까탈스럽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편한(?) 여자인 아내다. 작은 규모 회사에 취직해서 과장으로 자신의 능력을 적당하게 발휘하면서 상식적인 궤적에 따라 예측 가능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던 그에게 돌연 싱크홀과 같은 심연이 입을 벌리고 다가선다. 물론 그 자신이 그 싱크홀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가장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법적으로 맺어진 가족인 아내가 거기 함몰되었다. 아내가 꾸는 악몽은 하나의 싱크홀이 되어 그녀와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그 심연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그 심연은 깊고 어둡고 두렵다.
어두운 숲이었어. 아무도 없었어. 뾰죽한 잎이 돋은 나무들을 헤치느라고 얼굴에, 팔에 상처가 났어. 분명 일행과 함께였던 것 같은데, 혼자 길을 잃었나봐. 무서웠어. 추웠어. 얼어붙은 계곡을 하나 건너서, 헛간 같은 밝은 건물을 발견했어.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끝없이 고깃덩어리들을 헤치고 나아갔지만 반대쪽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몰라.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어. 갑자기 숲이 환해지고, 봄날의 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우거졌어. 어린아이들이 우글거리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 수많은 가족들이 소풍 중이었어. 그 광경은, 말할 수 없이 찬란했어. 시냇물이 소리내서 흐르고, 그 곁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 김밥을 먹는 사람들. 한편에선 고기를 굽고, 노랫소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쟁쟁했어.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채식주의자, 19-21쪽)
그녀의 꿈은 그녀의 삶을 일상 즉 정상성에서 이탈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의 포용과 이해의 한계를 넘어가는 그녀의 이탈 경로는 강한 중력에 의해 마치 블랙홀로 끌려가면 부서지는 물체의 그것과 닮아가게 된다. 모든 육류와 비린 것들은 냉장고에서 사라지고 버려진다. 육식은 거부되고 채식이 시작된다. 2인 3각 걷기의 경우 호흡이 맞지 않으면 걸음은 뒤틀리고 속도가 나지 않으며 넘어지기 십상이다. 평범한 삶을 꿈꾸는 남편과 극단적 채식의 삶을 추구하는 아내의 삶이 조화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남편은 불편하고 아내는 구속을 느끼는 삶의 파열음이 파문을 일으키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 간극으로부터 하나의 질문이 솟구쳐 오르게 된다. '먹는 행위와 삶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먹는 행위는 윤리적 감수성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녀의 꿈은 그녀로 하여금 고기 먹는 행위에 대한 공포! 그렇다 그건 공포에 가까운 반응이며 그만큼 파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 꿈을 꾸고 난 후의 그녀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찍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경험 이후에도 서정시가 쓰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지만 삶의 이면에 흐르는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생생하여 다시는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일어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굴하지 않고 완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다. 이제 그녀는 '환하게 빛나고 맛있는 구워지는 고기 냄새 속에서 즐겁게 들리는 웃음소리'의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편에게서 나는 '고기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조차 '끔찍하고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2011년경 발생한 돼지 구제역 사태 때 산 채로 매몰되는 돼지들에 대한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이 꿈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로 산업화된 축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영상을 본 사람은 한동안 육식에 대해 성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살아가는 삶과 타협하고 때론 그 실상에 대해서 거리 두기를 하면서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먹는다는 문제는 단지 생존을 위한 무조건적인 행위가 될 수는 없다. 그녀의 입을 폭력적 강제로 벌리게 하고 고기를 먹이는 친정아버지의 모습은 음식을 거부하는 그녀(영혜)에게 강제로 음식을 투입하는 의료진의 모습과 겹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먹는 행위에서 어떻게 어떤 것을 먹을까의 문제는 인간됨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약의 마카베오 하권에는 안티오코스 왕이 강요하는 돼지고기를 먹기를 거부하고 극형을 당하고 죽은 일곱 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무엇을 먹느냐에는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의 문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울부짖는 유가족들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조롱하던 사람들이 있다. 영혜의 아버지와 남편과 같은 사람들에게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내면을 이해할 만한 공감과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강요된 육식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곤혹스러운 점이 있다. 채식주의와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불교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인간과 몸 바뀔 수 있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이해하고 있기에 그러할 것이다. 힌두교의 분파 중에도 채식을 하는 관점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어떤 음식에 대한 금기의 목록이 다를지라도 전면적으로 육식을 거부하는 문화가 다수는 아닌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채식 식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지만 이 또한 모든 사람이 함께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단지 이런 문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인물을 통해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존재의 폭력적 기반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불교의 공안과 같은 질문이라고 보면 어떨까. 앞에서 언급한 '삶의 機微'와 같은 것,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의 기억', '4.3과 5.18의 기억' 그 밖의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 '누군가는 가라앉았고 누군가는 구조된(프리모 레비)' 역사적 사건들.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公案과도 같이 받아들인다면 어떻까. '저 병 속에 든 새도 다치지 않고 병도 깨뜨리지 않고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혜로 하여금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로 질문을 치환시켜 볼 수는 없을까? "...... 그러면 안 안돼?"라고 묻는 영혜를 바라보는 그녀의 남편처럼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라고 말하는 대신 말이다.
[몽고반점]
영혜의 자해와 입원 이후 2년의 세월이 흘러 영혜의 형부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다. 그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이 무엇인지는 사회적 관습의 측면과 개인적 실천 사이의 어디쯤에서 드러난다고 할 때 혹자는 마르셀 뒤샹과 관련된 일화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의 미묘한 줄타기 속에 신경증적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자신의 예술적 성과에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작가는 행복할까?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따라 밀고 나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본능이 아닐까? 김수영의 말처럼 '시란 온몸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면 모든 예술은 내적 욕망으로 현실을 뚫고 나아가려는 충동을 내재하고 있는 것일 수 있겠다.
영혜의 남편은 상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세계에 속해 있기에 그녀와 이혼을 했고 그녀는 언니인 인혜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가 방을 얻어 나갔다. 일상인(정상인?)의 눈에 그녀는 환자이며 아직 회복되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언니는 그런 동생을 걱정한다. 그녀는 여전히 육식을 거부한 채 사회와의 불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내면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 형부인 그는 아내로부터 그녀에게 여전히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복잡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에로틱한 욕망과 예술적 흥분과 열정이 혼효된 격렬한 감정의 요동이다. 그의 삶은 서서히 처제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돌봄이라는 사회적 책임감의 윤리적 영역을 넘어서 금기시되는 지점에까지 닿아 스스로 파열하려는 맹목적인 열정으로 가열되어 간다. 그는 처제의 채식이 지니는 식물성을 그녀의 나신 위에 꽃과 줄기와 잎을 그려 넣어 하나의 피사체로 작품을 구상한다. 불발탄처럼 피식거리며 연기를 피워 올리던 시간들이 모처럼 바짝 긴장한 채로 이 생각을 실현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와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결혼 생활은 서로의 깊은 곳에 닿지 못한 채 평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화실을 빌려 영혜의 몸에 보디페인팅으로 자신이 구상했던 식물적 이미지들을 그려 넣고 찍은 비디오 작품은 스스로 보기에도 흡족하고 후배 작가 J에게도 호평을 받는다. 여기까지였으면 인간적인 차원에서 용인할 수 있는 영역 내에 머물렀다고 이해받을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간 지점까지 도달하고픈 혹은 저지르고픈 욕망을 억제하기 어려워한다.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그의 리비도적 쾌락 원칙에 대한 욕망을 폭발시키는 작약 같은 역할을 한다. 영혜에 대한 욕망에서 팽팽하게 자극을 받아 이루어지는 아내와의 성적 행위에서 그는 아내의 육체를 영혜의 그것으로 상상적으로 대체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아내를 모욕하는 셈이다. 관계 후 아내가 흘리는 눈물은 인간의 육감이 얼마나 예민한 것이며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수영의 일찍이 '성(性)'이라는 시에서 솔직하게 드러낸 바로 그런 상황인 것이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 독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 다시 돌아간다 /
연민의 순간이다 /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김수영, 성, 김수영 전집1, 민음사, 367-368쪽
그(영혜의 형부)는 후배인 J를 설득해서 자신이 구상한 영상 작품을 찍으려 한다. 예술가인 J는 자신 역시 예술가이기에 그런 작업을 수용하고 몸에 영혜와 같은 보디페인팅을 하고 모델로서 영상을 찍는 데 협력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적인 성행위를 할 것을 요청하자 화를 내고 떠난다. 예술가인 그조차 그 선을 넘어가면 포르노그래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적 제약 즉 현실 원칙은 항상 적나라한 쾌락 원칙의 추구는 물론이고 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우회하는 시도 역시 제재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발생하는 셈이다. 예술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욕망은 어디쯤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인 욕망의 거래 조건을 떠올리게 한다. '삶이여 너 아름답구나. 이대로 멈추어라!' 영혼을 팔아서라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결국 자신의 옛 연인에게 자신의 몸에 자신이 구상한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처제와 형부라는 금기를 넘어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이를 비디오에 녹화한다. 아침에 방문한 아내가 이 비디오를 보고 사태를 파악하게 되고 두 사람 모두 미친 것으로 간주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남편은 법적인 처벌을 면하지만 위태롭고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던 그와 인혜의 가정은 그의 귀책사유로 해체되고 그는 잠적하고 사라진 존재가 된다. 사회는 그를 처벌하고 추방한 셈이다. 현실 원칙은 힘이 세다.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세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도전을 사회의 관습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희생자일 뿐인가? 아니면 인혜의 말처럼 '온전하지 않은 아이'를 더 깊이 파괴한 가해자일 뿐인가? 불편한 질문이지만 화두처럼 붙들어 볼 만하지 않은가?
[나무 불꽃]
인혜가 서사의 중심에 서 있는 작품으로 연작의 마무리에 해당한다. 영혜는 형부와의 사건 이후 정신 병원에 입원해서 지내고 있고 언니인 인혜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남편이 그렇게 처제인 동생과 사회적 규범을 거스르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이후 아이와 함께 일상을 견디지만 그 내부는 텅 비어 있는 고목의 그것처럼 공허하다. 남편이 일으킨 추문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이제 그녀의 삶은 그 사건이 발생한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 셈이다.
영혜의 상태는 점점 악화하고 있다. 문제는 그녀가 이제 스스로 식물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원해서 음식을 거부하며 말라간다는 점이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죽을까봐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언니의 말에 그녀는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라고 항변하듯 말한다. 이것은 어떤 타나토스적 욕망에 해당하는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죽음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동화하려는 이 욕망은 삶의 정상성이라는 궤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같이 빨려 들어가면 자신 역시 소멸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미친다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두렵거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영혜를 떠올리는 인혜에게 조금씩 스며든다. 스며든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오래 겪다 보면 무언가 친숙해지는 느낌처럼. 영혜를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가는 동안 인혜는 이 모든 삶이 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장자의 '胡蝶夢'일까. 이 삶이란.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우리는 살았거나 살고 있거나 죽어갈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살고 최선을 다해서 죽어갈 것이다.
우리가 이 삶에 집중해 있는 동안은 죽음이라든가 죽음과 삶의 관계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온전히 열린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간과 또 다른 인간과 나무와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에로스적인 욕망과 타나토스적인 욕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삶과 죽음도 어쩌면 그렇게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하나의 현상일 것이라면 육식에 내재된 죽음을 기반으로 삶이 움직인다면 적어도 그에 대해서 꾸준히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느끼는 불편함 뒤에는 열려 있는 많은 질문과 도래하지 않은 답변들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정직하게 질문하는 작가에게는 정중하게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어려운 문제가 우리의 사유와 삶을 다 넓은 차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믿어 보도록 하자.
2.2. <희랍어 시간>의 경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비문에 대한 언급으로 이 작품의 서두가 시작된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어떤 진술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이의 글이나 말로 인용되면 그 진술은 새로운 함의를 추가하게 된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익히 회자되듯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혹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알려져 있다. <희랍어 시간>을 읽을 때 이 짧은 아포리즘적 표현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화두가 된다. 뭐랄까 그것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서로 관계 맺지 못하고 격리된 채로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거나 같은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도드라지게 한다. 타자에 대한 관점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영향을 받는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그의 희곡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부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나와 너'의 관계 없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으리라는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타자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성서에서 율법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묻는다. 그 대답은 누구나 익히 아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희랍어 시간>은 바로 이 관계성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지고 있는 셈이다.
보르헤스에 대한 상념을 이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인물은 15살에 독일로 이민을 갔다가 16년 후 서른한 살의 나이에 홀로 돌아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로 인해 주목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고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희랍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삶은 독일에서의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점차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에 더 공명하는 것일까. 독일에서 17살 무렵 청력을 잃은 안과 의사의 딸인 연상의 농아 여인을 좋아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가 모진 거부에 부딪쳐 상처를 입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 독일에서 배운 수화를 이용하여 자신의 수강생인 여자에게 사과를 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란이라는 여동생이 있어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병으로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친구 요아힘 그룬델에 대한 소식과 그와 공유했던 기억을 지니고 곱씹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남자 주인공의 희랍어 수업을 수강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결혼을 했었으나 이혼을 했고 얼마전 아홉살 난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재판 끝에 전남편에게 빼앗기고 정기적으로 아이를 만나지만 최근에 아이가 외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를 끓이고 있다. 반년 전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녀는 현재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다. 물리적 능력이 아니라 언어적 구사 행위가 유발하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일상적인 언어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열일곱 살에 한번 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그때의 언어 상실은 불어 시간에 '비블리오떼끄'라는 낯선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언어 능력을 회복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정상적(?)으로 살다가 지난해 늦봄에 다시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경제적 활동 등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해 아이에 대한 양육권도 남편에게 빼앗기에 된 것이다. 지금 그녀가 희랍어 수업을 듣는 이유는 과거처럼 낯선 언어에 대한 학습을 통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언어 능력 상실로부터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인 셈이다. 아이를 빼앗긴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언젠가 아이는 인디언 식 이름 짓기 놀이를 통해 스스로에겐 '반짝이는 숲', 그리고 엄마인 그녀에게는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적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강사와 수강생이라는 서로의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관찰하기도 하지만 좀처럼 서로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교차하면서도 서로 가까운 궤도를 그리지 않는 행성들과도 같다. 그러다 건물 안에 들어온 새의 영향으로 그 두 사람은 잠시 근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안경이 깨진 남자는 눈이 먼 보르헤스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여자는 남자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병원을 거쳐 안경을 구입하는 일에 도움을 줄 마음이 생긴다. 잠시 두 사람의 궤적이 교차하고 얽히는 역동적 상태에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대학에 이르되 '마음이 거기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하였다. 무언가를 보는 것도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능력과 의지가 어울려 일어나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길을 잃는다면 볼 수 있되 보지 못하는 것일 테고 말할 수 있되 말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희랍어 수업>은 아름답고 차분하게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일 아닐까?
2.3.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우
이 소설의 화자는 경하이고 그녀는 소설가다. 그 도시에서 있었던 학살을 다룬 소설을 끝내고 그녀는 악몽이라 할 꿈을 꾼다. 그녀의 글쓰기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결하여 살아갈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분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소진되었고 고통스런 기억들에 흠뻑 젖어들었고 과거와 현재가 뒤범벅이 된 생생한 실재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녀는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 속에서 유서를 쓰고 주변 정리를 하면서 실낱같은 목숨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죽 한 그릇의 온기로 그녀는 다시 삶의 영역에 머물게 되지만 그녀가 꾼 꿈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날마다 이렇게 밀물이 들었다 나가고 있었던 건가? 아래쪽 무덤들은 봉분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바로 지금.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없는데 나한텐 삽도 없는데. 이 많은 무덤들을 다 어떻게. 어쩔 줄 모르는 채 검은 나무들 사이를,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렸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9-10쪽 부분 발췌
경하는 다시 삶의 언저리에 남아 있게 된 후의 심경을 이렇게 곱씹는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고. 그리고 그 꿈과 관련하여 통나무들을 심고 나무에 먹을 입히는 제의 같은 작업을 인선에게 제안했고 인선이 수락했지만 그렇게 사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인선은 사진기자이며 경하와는 일로 만나서 친구가 된 사이다.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사 년 전에 여의었다. 제주에서 목공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인선은 내가 제의한 프로젝트를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일을 나중의 일로 미루고 있다. 그런 인선에게서 어느날 갑자기 문자가 오면서 이 소설은 비로소 본류로 접어든다. 목공일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지금 인선은 병원에 있고 경하에게 손가락이 잘린 고통에 시달릴 때 그녀의 책에 나오는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떠올렸다고 한다.
까무러칠 것같이 아팠는데,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리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숩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같은 책 56-57쪽 발췌
그러한 인선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제주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다시 반추하면서 경하가 전에 이야기했던 넋풀이와 같은 그 프로젝트를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런 인선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하는 그 꿈과 그 꿈을 상징적으로 해원하는 의미를 지닌 그 행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 집에 있는 아마라는 앵무새에게 먹이와 물을 주고 살펴주기를 부탁한다. 다른 한 마리인 아미는 몇 달 전에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으로 눈발 속을 헤치고 달려가게 된 것이다.
인선은 열일곱 살에 제주의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출을 감행했다가 축대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어머니와 함께 제주 집으로 귀가했던 기억이 있고 그 이후 엄마는 자신의 아픔이자 제주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아픔에 대해서 딸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다. 딸은 엄마의 삶에 어떤 굴곡이 있었는지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오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얄ㄼ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둘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록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 같은 책, 84쪽
제주의 인선네 집으로 가는 길은 험난한 여정이 된다. 그 눈발과 악천후 속에서 경하의 의식은 인선을 매개로 해서 쌓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반추하게 되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상처들은 조금씩 밝은 의식 가운데 초점이 맞춰지면서 형상화된다. 인선이 찍은 영상들과 자료들은 역사적인 아픔을 증언하는 것들이고 제주 집에 몇 번 오고 가면서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경하는 인선의 집에 도착하고 죽은 새를 묻어준다. 다음날 아침 인선이 돌아오고 경하가 제안한 그 작업의 이름이 '작별하지 않는다.'임을 알게 된다.
그 11월 밤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동굴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 건천을 건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대.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
어디로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건천 기슭 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마을 공터 쪽에서 일곱 발 총성이 울렸대. 뒤이어 군인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걸 아버지는 숲 사이로 지켜봤어. 먼 거리였지만 손을 잡고 걷는 두 동생을 알아보았대. 더 어린 아이들을 앞세워 걸리거나 아기를 업은 여자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넘어지거나 빨리 걷지 못해 자꾸 행렬이 지체됐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대.
더이상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아버지는 마을로 달렸어. 뒤돌아보자 가호 수가 더 많은 아랫마을에서도 불길이 타오르는 게 보였대.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代殺)한 거야. - 같은 책, 217-218쪽
이것은 인선 아버지의 사연이다. 그후 아버지는 체포되어 주정공장에 수용되었다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간직한 인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 낳은 존재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이 역사적 화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제주에서 대구로 자신의 혈육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했으며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진실이 알려질 수 있도록 완강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작별하지 않겠다는 듯이. 제주 4.3의 기억은 아직 온전히 정리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그렇게 미완의 작별은 이어지고 있다. 그 원초적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 후에는 어떤 기억이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지명으로 오시비엥침이다. 인류는 얼마나 오래 그 야만을 기억할 것이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교훈으로부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과거를 외면하면 미래의 문이 닫히는 법이다. 4.3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기억하는 일이 고통스러워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힘으로 오늘을 살며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4.3과 작별할 수 없다. 아니 작별하지 않는다.
2.4. <소년이 온다>의 경우
현실이 서사적 상상력을 압도하는 지점이 간혹 있다. 80년 광주는 바로 그런 역사적 기억이다. 아직도 채 아물리지 않은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상처를 여전히 후벼파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4.3과 함께 우리 사회 전체가 한마음으로 이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장례식은 마무리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꿰뚫는 아포리즘적인 표현은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가 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 이 장례식을 온전히 마칠 수 있을 것인가.
80년 광주는 4.3과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경험임과 동시에 개별적인 체험이다. 이 계절에 흩날리는 벚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지는 것처럼 동시적으로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하나의 장면 속에는 수많은 개별성이 내포되어 있다. 역사적인 모든 사건들에는 드러나는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소년이 온다>의 구조가 다중적 초점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겹눈을 가진 생물처럼 각각의 시각적 정보를 모았을 때 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그 형상은 죽은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형상은 현재의 상이 아니라 과거의 상이지만 기억이라는 장소에 또렷하게 맺힌다. 크로노스적인 역사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지만 카이로스적인 미완의 장례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낱눈 하나(어린 새). 동호는 중3이고 정대와 단짝이다.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정대의 친구인 동호는 친구의 시신을 찾아 상무대에 왔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는다. 계엄군의 도청 진입을 앞두고 돌아오라는 어머니와 작은형의 호소와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죽음을 당한다. 그가 찾아 헤맨 친구 정대는 물론 그 소년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물들인 진수 형, 은숙 누나, 선주 누나는 또 다른 겹눈의 주체가 된다.
귀를 찢는 총소리에 모두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공포다! 괜찮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 앞대열로 돌아가려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다시 총소리가 귀를 찢었을 때,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너는 달렸다. - 한강, <소년이 온다>, 31쪽
정대의 죽음에 대한 예감과 죄책감이 동호를 죽음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상무대라는 죽음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분노다. 손녀를 찾는 노인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그는 다짐한다. 그 소년은 계엄군의 도청 진입 때 죽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쩍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나 자신까지도. - 같은 책, 45쪽
낱눈 둘(검은 숨). 정대의 죽은 넋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부분이다. 그는 죽었고 계엄군은 그와 다른 희생자들의 시신을 어딘가로 옮겨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태우고 암매장한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지 못한다. 정대의 넋은 동호와 정미 누나를 생각한다. 그리고 산 자를 지켜본다. 동호의 죽음도.
낱눈 셋(일곱개의 뺨). 다음으로 죽은 자들 말고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에 초점이 맞춰진다. 동호가 은숙 누나로 기억하고 죽어간 김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광주의 학살이 있을 때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다. 도청에서의 마지막날 외사촌의 병원에서 날을 새우고 군인들이 죽은 이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집으로 돌아갔고 재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 생활을 2년 만에 그만두고 출판사에 취업했다. 출판사의 원고를 검열하는 검열관에게 뺨을 맞고 모욕감을 곱씹으며 광주의 기억이 흔들어 놓은 아픔을, 동호의 죽음을 떠올린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와 기억을 안고.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꽃은 양초 불꽃들이. - 같은 책 102-103쪽
낱눈 넷(쇠와 피). 다음은 역시 광주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의 한 사람인 당시 스물세 살 교대 복학생이었던 인물(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청에서 체포된 나와 다른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처우 속에서 고문을 받고 재판을 거쳐 투옥되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특사 형식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모욕감과 학대는 온전한 삶을 살아내기 어렵게 그들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다. 모나미 검정 볼펜을 이용하여 가한 고문, 먹을 것을 통해 받은 모욕감. 택시 운전을 하며 살아가는 나는 김진수와 만남을 이어가지만 결국 진수는 피폐한 몸과 정신으로 인해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광주 이후 자살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가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같은 책, 135쪽
낱눈 다섯(밤의 눈동자). 현재 사회 단체의 사무국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광주의 생존자인 임선주의 목소리가 이끌어가는 장이다. 그녀의 삶은 노동자의 삶이었다. 중학교 졸업 전부터 노동자의 삶을 살았고 열입곱에 성희 언니를 만나 노조원으로 활동했고 노동쟁의 중에 사복 형사의 폭행으로 장이 파열되어 입원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결국 광주에 내려가 있다가 광주 학살을 맞이했다. 그녀의 이력은 유신 시절의 노동자 탄압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맥락상으로 YH사건, 동일방직 사건 등을 떠올리게 하는 진술 들이 있다. 광주에서는 마지막 밤 가두 방송을 한 혐의로 성적인 차원을 포함한 지독한 고문을 받고 감옥생활을 했다. 정대의 누이 정미에 대한 이야기도 희미한 복선처럼 깔려 있다. 그녀는 윤이라는 연구자에게서 당시에 대한 증언 녹취를 요청 받고 고민하며 성희 언니를 만나러 병원으로 간다. 그녀가 삶을 견딜 수 있었던 동호의 죽은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통과 분노의 힘으로 말이다.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잇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 같은 책, 172-173쪽
낱눈 여섯(꽃 핀 쪽으로). 자식이 죽으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가슴에 묻는 셈이라고 한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도 그랬듯이.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동호 어머니의 그것이다. 큰형과 작은형 그리고 남은 부모는 삶의 이편에서 살아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늙은 어머니는 자식을 그리워한다. 세월호 사건이나 이태원 참사의 부모들이 자식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랑채에 세들어 살던 정대 남매도 생각하고 유족회에도 나가 본다.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 어머니'를 떠올려 볼 일이다. 가해와 폭력은 인간은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강하게 하기도 한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라고 예닐곱 살의 동호가 엄마를 이끌듯이 그렇게 환하고 밝은 세상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내게 하기도 한다.
2.5. <흰>의 경우
우선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것에 잠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차라리 산문시거나 수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흰'이라는 말은 완결되고 자족적인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의 색채적 속성을 수식하는 데서 나아가 확장적으로 정서적, 윤리적, 상징적 의미에 가 닿을 수도 있겠다. 고백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니체나 파스칼의 글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운 형태의 기술이되 일련의 내적 연속성을 지닌 상념이 담긴 소품으로 보인다.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지향하지는 않는 발산적으로 사라지고 해소되는 감정의 물결에 비유할 할수 있을까. 아니면 봄철에 난분분 흩어지는 벚꽃의 흩날림과 겨울 한철 푸짐하게 내리는 눈발 같은 것으로.
이 책 안에 현실적 맥락으로 번역될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여자아이 즉 나의 언니가 있다. 혼자 출산하고 아이를 낳았을 어머니,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아이를 묻었을 아버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자신이 그녀의 빈 자리를 채워 이 세상에 나왔고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나의 고통 혹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고 살고 죽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의문들.
나는 폴란드에 초대를 받아 잠시 살던 자리를 벗어나 이국의 도시에 둥지를 틀고 있다. 거기서 그는 2차 세계대전의 폭력과 아픔이 기록되고 보존되는 기억의 공간을 방문한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도시를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도시에서 그는 국외자적 관점을 넘어서서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을 하고자 한다. 거기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연관되어 있는가. 나치 독일의 광기와 그로인한 죽음. 스탈린이 저지른 많은 학살들과 죽음 등등.
사실 <흰>은 서정적인 면이 강하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수필과 산문시의 혼합된 모습처럼 보인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과 같은 분위기 말이다. 사람이란 한껏 긴장해서 어떤 일에 몰입한 후에는 숨을 고르면서 한 한숨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쉬는 일에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에도 짧은 한숨이 감지될 때가 있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그것이 우리의 감정이다.
2.6.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경우
한강은 시로 먼저 등단한 작가다. 시와 소설을 넘나들 수 있다는 점은 다른 비슷한 사례에서 보듯 어떤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다. 문득 욘 포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한강의 그것과 문체적인 차원에서 유사한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한 적이 있다. 러시아나 프랑스의 전통적인 소설에서 보이는 긴 호흡과 때론 지리하게까지 느껴지는 글들과 달리 짧고 함축적인 문장들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인다. 물론 대단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을 읽는 일은 그녀가 쓰는 소설과 상호적으로 얽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무엇을 화두로 삼아 글쓰기를 밀고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그녀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어느 / 늦은 저녁 나는 /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 그때 알았다 /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 지금도 영원히 /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 -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1쪽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 영원히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각을 바탕으로 밥을 먹는다. 무엇이 지나갔는가? 또 지나가고 있는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이 시를 통해 슬며시 떠오른다.
봄빛과 어둠의 틈으로 '반쯤 죽은 넋(새벽에 들은 노래)'이 얼비친다. 마크 로스코라는 사람은 화자가 태어나던 시점보다 9개월 전에 자신의 손목을 긋고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빈자리를 메우듯 출생해서 지금 살고 있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그는 스밈과 번짐의 차원에서 '내 실핏줄 속으로(마크로스코와 나)' 다가온다. 결국 그와 화자는 무관하지 않은 관계인 셈이다. 죽음은 "너는 삼켜질 거야(저녁의 대화)"라고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서커스의 여자'에서 '툭 / 툭 / 목숨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도처에서 화자는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밥을 먹고 삶을 살아내는 행위와 유사한 마음의 움직임은 포착할 수 있을까? 화자는 십 년 전 꿈에서 파란 돌을 본 적이 있다. '투명한 한물결 아래 / 희고 둥근 / 조약돌들(파란 돌)'을 보았다. 그리고 '팔 뻗어 줍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살아야 한다는 자각 속에서 깨었다. 밥과 조약돌은 어떤 공통점을 지닐 수 있을까. 자신에게 '눈물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누군가를 가슴 속에서 잊고 생명을 다시 자각하는 일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희랍어 시간>과 연관 지을 만한 내용이 '피 흐르는 눈 2'에 있다. 아이와 함께 인디언 식 이름 짓기를 한 내용 말이다. 아이는 '반짝이는 숲'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화자에게는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반짝이는 것 밝은 것은 근본적으로 희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피 흐르는 눈 3)'한다. 그리고 '더 묻고 싶어'한다.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창을 닫으려다 발견한 달팽이는 자신을 '으스러뜨리지' 말도록 화자에게 경고하는 듯하다. 또한 달팽이는 의연하게 '그렇게 조금 더 / 나아갔다' 달팽이와 화자의 교감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라는 시에서 화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이유 모를 울음에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라고 말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응전의 방식에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에 보인다. '단단한 주먹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 나는 그것들을 혀의 뒷면에 새긴다' 혀란 언어가 아니겠는가. 어떤 악몽은 오래 지속된다. '나쁜 꿍에서 깨어나면 /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겨울 저편의 겨울 2)'의 그것처럼.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방법은 '빛을 던지는 것'뿐이다. 빛을 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문학 작품이 사회적으로 읽히는(소비되는) 과정은 결코 작가와 무관할 수 없다. 작가의 창작적 의도와 관련이 없는 작품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모든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떠나 사회적 대화의 맥락으로 진입하면 수많은 독자들의 해석과 맞물려 새로운 의미의 역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좋은 작품은 수용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역장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과거로 멀리 되돌아가지도 않았고 미래로 달려가지도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지금 여기 혹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사회적 기억들과 목소리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현재를 응시하고 있다.
존재론적으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세계 인식을 갖고 살 수밖에 없다. 고갱의 그림 중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 심오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 이 제목은 종교적, 예술적,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차원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영역을 건드린다. 기독교에서 고백하듯 신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때 인류의 역사는 그 가운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의 <시학>에서 모든 이야기에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인류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서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모든 서사(역사)는 중간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완전한 서사이자 전체적인 맥락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서사인 것이다.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인 인간의 상황은 이렇게 불완전한데 그런 인간이 창조하는 이야기의 구조는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결적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이야기의 완결적 구조 자체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혹은 각자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세계관적 지평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 그런 완결성인 셈이다.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하면서 발표한 노벨위원회의 선정 이유를 음미해 본다. 먼저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대목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란 무엇이겠는가? 그녀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상처에 대한 문학적 기억이자 고통스런 질문 행위다. <소년이 온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80년 광주의 오월에 있었던 그 잔인한 폭력의 광기와 거기서 살아 남은 자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 독자들은 '과연 그 많은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었는가? 그 고통과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다른 길은 없었는가? 그리고 그 사건들 이후에도 어떻게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게 된다. 삶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또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지는가? 아도르노가 던졌던 질문을 우리 역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12.3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비상계엄 후에 국회에서 반향하던 문장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계엄과 같은 행위에 대한 우리의 과거 경험은 이렇게 현재의 시간 속으로 호출되고 정서적이고 무의식적 층위의 감정까지 되살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기억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녀의 작품은 사회적 공감과 논의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던 중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보고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 2024년 12월 14일 박찬대, '대통령 탄핵 소추 표결 관련 2차 탄핵안 제안 설명' 중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한강의 문학적 성과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채식주의자>가 학교 도서관 등에서 유해도서로 낙인이 찍혀 폐기되는 등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마치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대한 반응과도 유사한 맥락의 반응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학 작품이 윤리적인 감수성과 충돌해온 역사는 길다. 문학이 치외 법권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통해 일상적인 차원의 삶이 붕괴되는 주인공 '영혜'의 모습이나 예술적 성적 욕망이 뒤섞인 채 윤리적 금기를 넘어 추방되는 그녀의 형부 등의 인물들은 동시에 단순한 육식과 채식의 문제를 넘어서서 삶의 본질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의 맥락 속에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의 빛과 어둠에 대해서 과감하고 정직하게 질문을 감행하는 것이 문학의, 나아가 예술의 몫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시도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작가 역시 고통스러움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독자 역시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런 질문들을 곱씹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한 작가의 작품은 정직한 독자의 눈길을 기다리며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아마도 카이로스의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