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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펜 Mar 24. 2022

불면증의 원인은 커피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오후에 '커피'를 마신 날은 잠이 잘 안 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최근 몇 개월 사이, 커피를 마신 날에는 침대에 눕고 한두 시간 정도는 뒤척여야 겨우 잠이 들었다.

평소에 커피를 좋아해서 하루에 한 잔 정도는 마시는데 되도록 오전 중이나 점심시간에 마시려고 노력한다.

가끔 스스로 제어가 안돼서 저녁커피라도 마신 날에는 동이 터올 때까지 뜬 눈으로 세우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커피를 마시는데 마시면 잠을 설치게 되어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게 되니 악순환의 연속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밤새 커피를 들이켜도 잠만 잘 잤던 나인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노인이 되면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던데... 벌써 그런 나이가 된 것인가?

아직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이 남았다고 믿고 있는데... 그럴 리가.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진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안 좋았던 과거의 기억들... 나를 힘들게 했던 사건들, 사람들, 후회스러웠던 일들, 창피했던 기억들.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벌어지지 않은 일들이 벌어질까 봐 마음이 괴롭다.

두 딸들의 미래, 별 달리 상상할 것이 없는 시시한 나의 미래, 시골에 계신 부모님 걱정...

지난날을 돌이키면... 어제 그리고 한 달 전 또는 10년 전, 심하게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가 날 괴롭게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면... 부모님과 나의 죽음. 심지어 나의 딸들의 죽음.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에 미래를 떠올렸을 때, 죽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바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시한부를 선고받지 않는 한.

하지만 왜 난 이런 어두운 미래를 걱정하는 것일까.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고 좀비처럼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그래도 아침이 되면 한숨도 못 자 초췌한 내 얼굴보다는 나은 정신 상태가 되어 생각한다. '도대체 밤새 무슨 쓸데없는 생각들을 한 거지?'


이 모든 게 커피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놈의 커피, 내가 절대 마시나 봐라'


커피를 못 마시니 하루 종일 멍하고 뭔가 무기력하다. 그리고 다시 스트레스가 쌓인다.

하지만 커피를 마실 수는 없다. 밤 새워 부정적인 또 다른 나와 살벌한 사투를 벌이고 싶진 않다.

커피가 격하게 땡기지만 말이다.


아이들의 겨울방학 내내 반복되는 커피와의 싸움을 벌였다. 마실 수도 안 마실 수도 없는...

개학이 코앞에 다가오자, 나의 스트레스와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제 커피를 한 모금이라도 마신 날에는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도대체 난 왜 이렇게 카페인 앞에 나약한 존재가 되었을까?

무엇이 날 이렇게 불안과 부정적인 생각의 방에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고작 커피 한 모금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개학 날 아침, 난 차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멀어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긴장한 탓에 손이 저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이들이 겪을 새 학기 증후군을 대신 겪고 있는 것인가?


사실, 내가 이렇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3학년, 4학년을 보내고 이제 막 5학년이 된 큰 딸.

아기 때부터 유명한 엄마 껌딱지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학교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느껴 학교 교문을 울지 않고 평범하게 통과하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유치원 때까지만 해도 얌전한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차이는 학교에 입학하자 벌어졌다. 내성적인 던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말문이 트이면서 씩씩해졌다. 학교도 잘 다니고 선생님께 인사도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씩씩해지기는커녕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것도, 교실 문을 여는 것도, 선생님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도 네, 아니오를 답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학교에서 심리발달 검사를 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개별적으로 전화를 주셨다. 아이의 불안도가 심해서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많은 고심 끝에 상담소를 찾았고, 상담치료를 받으면서 내성적인 아이의 성격이 고쳐지진 않았지만 느린 아이의 속도를 엄마만은 믿고 기다려주라고 하셨던 상담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내 아이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2학년 때는 좀 나아질 것을 기대하며 새 학기를 맞았다.

이제 좀 컸으니 나아지려나...

새 학기가 시작되고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잘 파악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잘하는 것은? 좋아하는 친구는 등등...'

열댓 가지 평범한 항목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난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았다.

이유인즉슨 아이가 단 하나의 항목에도 답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말을 한 마디도 안 한다면서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집에서는 말을 하는지... (말을 할 수 있는 아이인지 궁금하셨을지도...)

다행스럽게도 집에서는 말을 잘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이가 내성적이라 겁이 많아서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아이가 의사표현하는 것을 힘들어하니 관심 있게 봐달라고 부탁드렸다.

전화를 끊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어디가 아파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는 2학년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심지어 한 명씩 구구단을 잘 외웠는지 테스트를 해야 할때도 우리 아이는 입술 모양으로 테스트를 치렀다고한다. 그 이야기를 선생님께 듣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셨던 담임선생님께는 반 전체 학부형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매일 아이들의 사진을 올려주셨다. 단체사진, 그룹 활동사진, 개인 발표 사진 등등...

물론 다른 부모들은 아이의 학교생활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뻤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단체 사진 속의 우리 아이는 늘 한구석에 고개를 숙이거나 극도로 긴장된 표정으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그런 모습조차 볼 수 없을 때가 많다. 몇 십 장씩 되는 개인 발표 사진들 속에 늘 우리 아이의 사진만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발표를 하지 않은 탓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사진들이 올라오니 선생님의 수고에는 감사하지만 난 단체방 알람이 울릴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왜 우리 아이만 다를까? 병원에서 처음 아이를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작은 천사가 나에게 왔구나 하고 너무 기뻤다. 자랄 때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나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나에게 평범하지 않은 아이가 왔을까?'


엄마로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우리 아이가 힘들었을 만큼 나도 힘들었기에 철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내 미래가 너무 두려웠다.


어쨌든 나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아이의 불안증이 점점 심해짐과 동시에 나의 불안증도 심해져서 2학년 이후로는 간간이 했었던 강사 일도 프리랜서 웹툰 일도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일도 그만두고 아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내 일상을 정상적으로 꾸려나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문이 트이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상담도 받고 연기학원, 뮤지컬 학원도 보냈다.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불안증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려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데리고 다녔다.

그러던 중에 코로나가 덮쳤다.

3학년이 되고 학교 수업의 대부분은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새 학기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고 3학년 아이들의 토끼 같은 얼굴들이 컴퓨터 화면으로 송출되었다.

다들 어찌나 말도 잘하고 예쁘던지.

출석을 부를 때의 일이었다. 선생님이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 아이들은 선생님께 '안녕하세요'라고 씩씩하게 인사했다.

딸은 그동안의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았는지 지도 잘하고 싶어서 마이크를 꺼놓고 쉰 돌고래 소리를 내며 '안녕하세요'를 목청껏 연습했다. 그러나 막상 아이 차례가 오자 선생님의 호명에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늘 그랬다는 듯이 별말 없이 담담히 다음 차례의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문틈으로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외향적인 성격의 나였던 지라 '왜 말을 못 하니'라는 원망 섞인 마음과 공감 능력 만랩이었던 난 '지도 얼마나 속상할까'하는 안타깝고 짠한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쳤더랬다.

그렇게 코로나와 함께 보낸 3학년과 4학년...

난 조금 특별한 우리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자식은 내 맘대로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 그대로의 모습을 말이다. 이제 난 할 만큼 했으니 이 느린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코로나로 학교도 자주 못 갔지만 가서도 짝도 없고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는 탓에 우리 아이처럼 내성적인 아이가 새 친구를 사귀기에 많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아이는 2년 동안 반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여자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짝지어 다닐 때 우리 아이는 혼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아이의 연습장에는 매일매일 그린 그림이 한가득이었다.

집이 멀어 항상 등하교를 내가 차로해주었는데 시끌벅적한 하교 시간,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뛰어나온다. 그 아이들 사이로 늘 혼자 걸어오는 딸내미가 보인다.

매일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입장에서 매일 그런 딸의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기에는 내가 아직 철따구니가 없었다. 학교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힘들었는지 하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나라도 활기차에 웃어보지만, 사실 마음은 전혀 활기차지 않았다. "어서 오렴, 집에 가자" 억지로 올린 톤의 인사를 한 후 난 입을 꾹 다문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학교생활은 물어보지 않았다.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방학이 나았다.

다른 엄마들은 방학이 힘들다고 하지만 난 등 하교할 때마다 불안해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방학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둘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째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아이는 코로나든지 말든지 1학년 입학하자마자 새 친구와 노느라 정신이 없다. 연락도 없이 얼굴이 시커메질 때까지 놀다가 해 질 때 쯤 한껏 신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 다 놀았어! 데리러 와" 둘째는 활발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비교가 되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래... 이런 게 평범한 아이겠지...' '다른 엄마들은 이런 아이들을 키우려나...?' 이런 한심한 생각으로 괜한 삽질을 하곤 한다.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난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우리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경험을 한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이런 이유로 새 학기때마다 난 딸보다 더한 극심한 불안증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기로 한 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밤새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 딸이 조금이라도 씩씩해지기를 말이다. 결국엔 씩씩해지지 않아도 우리 딸이 행복해지기를 내가 행복해지기를 말이다.


그렇게 5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 동안 겪었던 일이 꿈인가 싶을 정도였다.

딸아이는 매일매일 새 친구들을 사귀었고 학교가 끝나면 여느 다른 또래의 여자애들처럼 친구들과 짝을 지어 하교했다. 밝은 목소리로 나를 반기는 딸을 보고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난 반신반의했다.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설레발쳐서 기뻐하다가 나중에 실망하기 싫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이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었다. 매일매일 학교에서 거의 10명의 친구들과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마음속으로는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하늘로 방방 거리며 뛰어오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우와 좋았겠다" 정도만 대꾸했다.

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혹시나 딸의 수다를 방해할까 봐 마음을 진정시켰다.


딸아이는 3학년 때부터 스마트폰이 있었는데 4학년이 끝날 때까지도 친구와 제대로 된 대화를 못해 봤다.

4학년 때에는 반 단톡방에 들어가 있었지만 단 한마디의 대화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시로 깨톡대는 대화방의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수다를 묵묵히 보고만 있던 아이는 수백 개의 미확인 메시지를 뒤로하고 카톡 앱을 삭제해버렸더랬다.

그 후로 딸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딸이 친구들이랑 톡 하는 것에 너무 빠져있어서 걱정이라는 투정을 들을 때마다 괜시리 속이 상했다.


그랬던 딸이 어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엄마, 누구누구가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 그래서 내가 톡을 보냈어"

심장이 내려않을만큼 놀랄일이었다. "니가 먼저 톡을 보냈다고? 뭐라고 보냈는데?" "응, 학교 왜 안 나왔냐고"

"우와, 우리 딸이 처음으로 친구한테 먼저 톡을 보냈네""응 맞아, 엄마!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것 같아. 이제 나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뭐든지"

아이는 그동안 내가 걱정했던 부분이 뭔지 아는 것처럼 나를 안심시키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맘 편히 기다려줄걸. 힘든 내색 하나도 안 하고 진짜로 나도 행복하게 기다려줄걸. 딸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이 상황이 너무 감사하기도 했다.

신이 있다면 내 바람을 들어준 것인가 싶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두 번째 기적이 찾아왔다.

좋아하던 커피를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이 든다. 낮에 커피를 마셨건, 자기 전에 커피를 원샷을 하든, 사발로 들이키든 잠이 솔솔 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커피는 불면증의 원인이 아니었다.

내 불면증의 원인은 불안과 우울증이었다. 커피는 그냥 매개체 역할만 했을 뿐.


갑자기 이렇게 행복해져도 되나 싶다.

사랑스러운 딸내미와 사랑하는 커피를 동시에 얻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미래는 죽음뿐인 어두운 터널이었는데 이제 그 터널을 막 통과하는 기분이다.

이제 미래를 상상하면 잘 자란 두 딸과 조금은 늙었을지언정 행복한 내 모습이 그려진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울 때 삶이 너무 힘들어서 매일이 불평과 불만이었다. 우울하다고 매일매일 외쳤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평범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평범하게 커피를 마시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이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또 다른 시련이 오면 그때는 담담하게 기다려줄 생각이다.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말이다. 결국엔 우리 아이가 씩씩하게 이겨낼 것을 이제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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