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의 텃밭농사 이야기-1]
나는 왜 텃밭농사를 짓는가?
나는 보통 새벽 다섯 시쯤 일어난다.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도심에서 살 때는 모임이나 회식 등으로 늦게 잘 때가 많았다. 집에 있더라도 텔레비전을 보거나 글을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정을 넘기곤 했다. 팔공산으로 오고 나서는 밤 열 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자리에 든다. 낮에 열심히 몸을 쓰니 피곤한 탓도 있고, 산속 마을이라 조용하니 절로 일찍 자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텃밭으로 간다. 유월의 텃밭은 할 일이 많다. 비가 잦으니 작물과 함께 잡풀이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틈나는 대로 가꾸지 않으면 작물과 잡풀이 뒤엉켜 엉망이 되고 마니 텃밭을 가꾸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당근을 뽑고 쑥갓의 여린 순을 땄다. 그리고는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고 어미줄기를 지주대에 묶어 주었다. 그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토마토의 곁순과 불필요한 잎줄기를 제거하고 잘라주었다. 가지를 보니 두 개가 열려 땅바닥에 닿아있다. 그대로 두면 벌레가 파먹을 수 있어 작지만 따주는 게 좋다. 이 정도만 해도 한 시간이 이상이 훌쩍 가버린다.
오후에 처가에 처남과 처제들이 모인다고 한다. 상추와 깻잎을 한 박스 가득 따서는 아내와 비닐봉지에 일일이 포장하였다. 두 개의 박스로 나누어 한 묶음은 지인에게, 다른 묶음은 처남과 처제에게 줄 수 있도록 분리하였다. 돈으로 사먹으면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텃밭이라도 농사일이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이어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게다가 땀으로 가꾼 채소를 거두고 선별하고 포장하여 주는 과정에 기울인 정성은 돈으로 사거나 바꿀 수도 없다. 가시에 찔리거나 긁히기도 하고, 모기에 물리기도 하면서 나는 왜 텃밭농사를 짓는가?
나는 농사군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오염되기 전 맑고 깨끗한 시골생활을 경험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기 전 나는 신선한 바람을 느끼고 나무와 풀냄새를 맡으면서 산과 들을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하였다. 시골의 삼 세끼 식사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산보에서 돌아와 엄마의 손맛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반찬은 꿀맛이었다. 내 혀는 아직도 어릴 때 먹었던 ‘엄마표’ 자연의 맛을 기억하고 있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새마을운동과 쌀 증산운동이 시작되었고, 농촌마을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초가지붕은 삽시간에 양철이나 콘크리트지붕으로 바뀌었고, 논밭에는 화학비료와 농약이 살포되었다. 주민들은 맹독성농약을 뿌리다가 중독되어 쓰러지거나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6월말쯤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 수확할 때까지 들판에는 온통 농약냄새가 진동하였다. 한여름 들판을 걸으면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으니 도대체 농약을 얼마나 뿌려댔을까. 논과 밭에서는 메뚜기와 미꾸라지가 사라졌고, 땅은 날로 거칠어졌다. 그 땅을 갈기 위해 경운기를 비롯한 농장비가 보급되었고, 영농의 기계화 바람이 불었다.
시골의 주방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나물을 데치고 무칠 때 주로 참기름이나 깨소금, 혹은 들기름과 같은 천연재료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마법의 맛을 내는 화학조미료인 ‘미원’ 열풍이 불었다. 그 즈음 갓 보급된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미원 광고였다. 된장을 끓일 때, 나물을 무칠 때, 국을 끓일 때 약방의 감초처럼 미원을 뿌리고 넣었다. 한번 미원에 빠진 주부들은 쉽사리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화학조미료에 중독되었다.
그 음식을 먹고 자란 자식들도 자연의 식재료가 주는 미각을 잃고 말았다. 화학조미료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을 간간하고 댕댕한 맛으로 중화시켜 버린다. 미각을 잃는 것은 그저 혀가 느끼는 후각을 잃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의 몸의 예민한 감각을 무력화시키고, 마비시켜 종국에는 영혼마저 무미건조한 ‘하나의 맛’에 길들이고 만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밥투정은 사치라는 분위기에서 자라면서 나는 오래도록 내 몸과 영혼이 원하는 맛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잃어버린 ‘밥상주권’을 되찾고 싶었다. 내가 텃밭농사를 짓는 첫 번째 이유다.
내가 텃밭농사를 짓는 두 번째 이유는 ‘노동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서다. 나는 평생 학교를 떠나지 않았고, 머리를 쓰고 사는 소위 ‘화이트칼라’다. 정신으로 하는 일도 노동이니 학자로 살고 있는 나도 정신노동자다. 경북대교수노조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교수도 노동자다!”를 모토로 내세웠다. 이론상으로는 노동자를 ‘육체노동자’와 ‘정신노동자’로 나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교수들은 “교수가, 설마 내가 노동자라고?” 식의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가르치지만 교수들의 의식 저변에는 ‘노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말로는 “교수도 노동자다!”고 외치지만 나 역시 몸으로 부대끼는 노동을 해본 적이 없다. 학문의 대상으로 인권을 연구하고, 최근에는 동물복지형 축산을 주장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직접 산업(혹은 생산) 현장에서 땀 흘려 본 적이 없다. 농업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참견하지만 내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작물을 키워본 적이 없으니 내 강의를 들으며 농부들은 속으로 얼마나 한심했을까? 오직 책으로 읽고 관념으로 받아들여 지식으로 체계화하고 학생과 대중들에게 노동(권)을 가르쳤을 뿐이다. 몸으로 체화되지 못한 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니 이보다 더한 역설(아이러니)이 없다.
작은 텃밭이지만 나는 무경운, 무비료, 무농약, 무제초로 농사짓는 소위 ‘4무’를 실천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번씩 텃밭에서 온몸으로 땀 흘리고 일하면서 책을 읽고 논문을 쓰면서 과열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몸(육체)과 정신(영혼)이 조화를 유지하고, 균형을 이루지 않고서는 결국 사고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교수니 학자니 하면서 교만에 찌든 마음을 내려놓고 허리 숙여 일하면서 땅을 향해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싶었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세속에 찌든 오욕과 욕망을 버리고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는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고 싶었다. 나는 텃밭을 텍스트로, 스승으로, 도반으로 삼아 땅 위에서 살다 죽고 싶다. 텃밭은 나를 일깨우고 가르치는 청정수행도량이다.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채형복
벗이여, 이곳에서는
빳빳하게 쳐든 고개는 잠시 숙여도 좋네
나 잘 낫네, 너 못 낫네
허세로 덧칠된 나-자아를 버리고
두 무릎과 뻣뻣한 허리를 꺾고
호미를 들게 삽을 들게
거친 땅을 딛고 기세등등 일어서는 풀은
땀으로 범벅된 그대의 거친 손길을 바랄 뿐
돈과 명예, 사랑과 정의 같은
거창한 담론일랑 잊어버리게
국가와 권력 따위 썩어빠진 뼈다귀도
길가에 던져 버리고
상추밭 뒤덮은 잡풀을 뽑고
고추 줄기 갉아먹는 진딧물이나 잡게
신 따위 형체 없는 유령에게 매달리고 기도하느니
발밑에 깔려도 신음하거나 기죽지 않고
도두라진 나를 뾰족하게 내세우는
못생기고 볼품없는 작은 돌멩이나 경배하게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으쓱한 구석에서
끈적대며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을 걷어내고
땅속 깊이 뿌리박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작은 벌레-神들을 만나게
썩은 감나무 뿌리를 궁궐삼아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개미들은
텃밭주인과 임대차계약도 맺지 않고
동서로 텃밭을 가로질러
은막의 집을 지은 거미는
땅주인과 한줌의 포획물도 나누지 않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가가 보증한 땅문서로 공인된 소유권을 가진
나인가
풀인가
벌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