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인생의 노잼 시기에 찾아온 너

정우 이야기 - 장래 희망을 강요하는 게 문제

by 히읗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잖아.
뭘 해도 재밌지 않은 상태.

장래 희망: 회사원


정우 땐 국민학교였으니,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내내 정우의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 란은 언제나 '회사원'이 적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장래 희망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추상적이고 거창하기 마련이었다. 가령 과학자, 의사, 외교관, 대통령 등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우는 어릴 때부터 늘 한결같이 '회사원'을 장래 희망이라고 적었다.


"아니, 도대체 어떤 회사원? 무슨 일을 하는 회사원? 그게 아니라면 어떤 기업?"


유진이 정우와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장래 희망이 회사원이었다는 말을 듣고 웃음을 참으며 되물었다.


"사실은 장래 희망이 없었어. 지금도 없고. 그래서 그냥 먹고살려면 돈은 벌어야겠으니 회사원이라고 적은 거지."


"아니, 장래 희망이 없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르고 골라 그럴싸한, 그 당시의 내 또래 친구들은 절대 모를 것 같은, 그런 직업을 찾아서 적었었거든."


"아, 그래? 그래서 뭘 적었는데?


"카피라이터!"


"하하하, 있어 보이네."


"그치? 영어이기도 하고 뭔가 멋져 보이잖아.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카피라이터가 되기로 했었지! 뭐 지금은 이렇게 문제나 만들고 있지만."


정우는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유진이 신기했고, 그런 유진의 첫사랑이 하필 장래 희망도 없는 남자인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거의 10년 가까이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정우는 학교를 회사라고 생각하면 교사도 회사원이나 다름없다는 면에서 장래 희망을 이룬 셈이다. 장래 희망을 이룬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유진의 첫사랑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얼마 전까지 '30대 중반을 넘긴 남자들이 대부분 이런 것일까? 아니면,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나이 탓일까? 아... 뭘 해도 재미가 없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한마디로 정우에게 인생의 노잼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유난히 더운 여름의 어느 날.

빨리 집에나 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으로 잡무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생소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윤정우 씨 핸드폰인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아! 나 유진이야. 한유진! 기억해?"


"어.. 어? 당연히 기억하지."


"뜬금없지? 하하하, 그냥 생각나서 한번 연락해봤어. 잘 지내고 있어?"


15년 만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6개월도 정도 만났던 유진이었다. 한유진. 군대를 가면서 헤어졌지만, 풋풋한 사랑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녀. 그 당시 유진은 20살 신입생이었고, 정우는 22살이었으니 정확히 15년 만에 들은 목소리였다. 테니스 동아리에서 만난 유진은 그때에도 정우에게 먼저 말을 건넸었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정우와 유진은 어색했지만 반가움이 앞섰고, 용기를 내 전화를 건 유진에게 정우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갑작스럽지만 주말 약속이 있는지 물었다.


"이번 주 주말? 내일이잖아! 난 그냥 목소리나 들어보고 싶어서 연락했는데, 그... 그럼... 만날까?"


"그래! 얼굴 한번 보자! 너 괜찮으면 오빠가 너 있는 데로 갈게."


그렇게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15년 동안 서로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을 하는 자리를 갖기로 한 것이다.

유진이 무슨 생각으로 정우에게 연락을 했는지도 궁금했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도 궁금했다.


사실 정우는 인생의 노잼 시기를 살고 있는 중이었는데, 유진의 전화 한 통에 뭔가 분주해졌다.

토요일 오후 2시, 유진의 집 근처 쌀국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10분 후 유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20살의 앳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때 그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그래서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유진도 따라 웃었다. 20살 때 유진은 늘 멜빵으로 된 옷을 입었는데, 35살의 유진은 정장 차림이었다. 약 10분 동안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주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음식이 왜 빨리 안 나오냐는 말도 하며 둘은 계속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유진 특유의 엉뚱한 말로 어색함은 다소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 맞다! 오빠가 내 첫사랑인 거 알지?"


"뭐... 그랬나? 하하하"


"응, 맞아. 고맙지 않아? 첫사랑이 먼저 연락해줘서? 아참! 오빠의 첫사랑은 다른 사람일 수 있겠구나! "


유진은 변하지 않았고, 그 거침없는 대화가 재밌었다.


"고마워. 유진아. 먼저 연락해 줘서. 나도 언제 한 번은 꼭 연락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


"진짜? 근데 왜 생각만 하고 있었어? 15년 동안?"


"그러게. 늘 생각만 했네! 사실 요즘 뭘 해도 무기력했었거든. 사는 게 재미도 없고! 근데 너 이렇게 얼굴 보니까 신기하네! 재밌고!"


"내 얼굴이 재밌다는 건가?"


그렇게 정우는 유진과 1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유진은 회사일을 하며 겪은 우여곡절을 압축해서 전해 주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은 인생에 너무 화가 났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무기력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무기력하게 사는 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며, 술만 먹으면 생각났던 첫사랑에게 맨 정신으로 전화나 해보자 했던 것이었다고.


정우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유진의 말을 들으며 인생의 노잼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각만 해서는

절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2달 후, 정우는 유진에게 고백했다.


#정우와 유진의 통화 기록

"유진아,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음, 그냥 그랬어! 노잼! 오빤 어땠어?"

"나도 그냥 그랬지! 근데 요즘엔 시시한 것도 너랑 얘기하면 재밌다!"

"오빠는 참 말을 이쁘게 하네!"

"진짜야! 나랑 다른 너도 신기하고, 나는 원래 장래 희망도 없고, 해보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하고 싶은 게 많은 널 보면서 나도 한번 찾아보려고."

"아니야! 나는 오빠가 장래 희망이 없어서 멋있었어!"

"뭐야? 놀리는 거야?"

"아니, 장래 희망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잖아. 없을 수도 있는 건데, 나는 왜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을까? 아마도 은근슬쩍 우리 사회가 압박한 거겠지? 그런데 오빠는 그런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걸 수년 동안 버텨냈어! 그래서 멋있어!"

"유진이 넌 정말 신기한 애다."


#오늘의 출제 포인튼 feat. 유진

김기택의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라고 시작하는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이라는 시가 있어. 이 시에서 화자는 매일 고된 노동을 하는 사무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를 불교 수행에 빗대어 표현하지.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는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하고,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리며,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스며들'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우리는 장래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강요받으며 자랐고, 그래서 거창한 것이 없다면 '회사원'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어. 사실 회사원이 되는 게 쉽지도 않은 세상인데 말이야. 그리고 결국 회사원이 되더라도 대부분은 저렇게 고행을 하며 살아가잖아.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장래 희망 말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놀면 어때? 그것이 나의 새로운 장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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