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자격지심은 누구나 있다.

민지 이야기 - 그걸 자격지심이라고 말하는 게 문제

by 히읗


너 그거 자격지심이야.


민지는 대학 졸업 후 약 10년 동안을 취준생으로 살았다. 간간히 편의점 알바도 하고 동네 보습학원에서 주 2회 운이 좋으면 주 3회 중학생 국어 내신 수업을 하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저의 직업은 이겁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준과 연애 시절, 국립대학교 음대 교수를 하고 있던 서준의 어머니와 처음 만났을 때, 민지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와 나이가 같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빨간 매니큐어가 점잖게 칠해지기란 극히 어려운 법인데 그걸 해내는 세련되게 나이 든 커리어우먼의 모습으로 당당한 포스를 뽐내며 레스토랑 안으로 입장하는 서준의 엄마는 자기 아들의 여자 친구인 민지를 보자마자 '오-! 민지씨! 반가워요!'라며 악수의 제스처를 취했다. 시골에 사는 민지의 엄마와는 그야말로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민지의 엄마는 서준을 처음 봤을 때 '아이고 니가 준이가? 우리 민지한테 마이 들었데이'라며 초면인 딸의 남자 친구에게 반말로 인사를 건넸고, 심지어 등을 두드리며 안기까지 했었다. 뭐 지나고 보니 민지는 왜 자신이 단지 동갑이라는 이유로 자기 엄마와 서준의 엄마를 비교했을까 생각하며, 괜히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사실 민지는 자신의 배경이 서준의 배경보다 경제적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여러 면에서 한참 밀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서준과 자신 단 둘만 놓고 보면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으로 되뇌었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대가가 곧 나타날 거라는 자신감도 충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취준생 시기가 길어지자 딱 하나 밀리지 않았던 그 자신감마저 사그라들었다. 그 와중에 민지는 서준이 이력서와 자소서를 검토해달라는 요청에 빨간펜으로 문장의 주술 호응부터 단어들의 띄어쓰기까지 깐깐하게 고쳐주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이력서의 한편에 가족의 학력, 직업, 심지어 직책까지 쓰라는 회사들이 존재했는데, 민지는 서준의 아버지가 D기업 부사장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학점이 2점 대에다가 토익 점수는 자격 조건인 700점을 간신히 넘는 서준이 그 D기업에 이력서를 내민 모습에 민지는 사실 민망했었다. 게다가 그런 칸이 있으니 쓸 수밖에 없었겠지만, 자기 아버지가 부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자기 아버지 이름과 직책을 버젓이 써넣은 서준이 여자 친구의 입장으로서는 합격을 했으면 싶었지만, 같은 취준생 입장으로서는 이 스펙으로 합격을 한다면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민지는 서준을 축하해주면서도 차마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씁쓸을 느꼈다. 서준과 같은 대학을 나와 학점도 4점대에 토익도 900을 넘는 자신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계속되는 실패를 맛보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서준의 합격은 너무 쉬웠다.

그렇게 쉬운 합격을 한 서준은 민지가 가끔씩 털어놓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자격지심이라고 다. 그래, 자격지심일 수 있었다. 특히 굳이 남자 친구의 배경과 자신의 배경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도, 그리고 그 차이를 애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하며 자신을 우위에 둔 것도 서준의 말처럼 자격지심으로 인한 사고방식일 수 있었다. 민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너무 쉬운 합격을 한 서준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억울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자격지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리고 '자격지심'의 정확한 뜻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서준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표현하려면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정도의 표현이 더 적절했다. 민지는 서준이 자신에게 '자격지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서준과의 이별이었다. 서준과 정말 끝났음을 인식한 것은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새로운 여자 친구 사진이 올라오고 나서였다. 민지의 사진은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던 자리였다.

민지는 자격지심, 아니 열등감이 다양한 방면에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민지는 남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믿고 열등감을 극복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반 사기업을 준비하던 민지는 가족의 배경도 묻지 않고, 나이 제한도 두지 않는다는 공기업 시험을 미친 듯이 준비했다. 물론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매번 고배를 마셨지만,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한 곳에서 드디어 기적같이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민지와 유진의 통화 기록

"유진아, 난 요즘 칼퇴해도 눈치 보지 않아 좋긴 한데 세종시에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너무 기니까 별별 생각을 다 끄집어낸다."

"무슨 생각?"

"어제는 문득 옛날 생각 하나가 떠오르는데,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였던가, 확실치는 않은데, 학교 뒷길 쪽에 우리 밭 있었잖아. 학교 끝나고 뒷길로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까불이 진수 알지? 걔가 엄청 큰 소리로

"어 저기! 민지네 엄마다!" 하면서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 거야."
"까불이 진수? 걔 원래 웃음 포인트가 전혀 아닌 데에서 막 웃는 애 아냐?"

"그랬나? 그냥 왜 웃냐고 가서 한 대 쥐어 박거나, 어 우리 엄마네! 하고 넘어가면 됐을 텐데, 진수한테는 말 한마디 못하고 햇볕에 시커멓게 탄 엄마를 못 본 채 하고 그냥 지나와 버렸어."
"음...뭐, 어렸으니까."
"그런가? 그때 나도 모르게 엄마를 반기지 못한 거 같애. 우리 엄만 그때 무슨 감정이 들었을까?

유진아, 나 이것도 자격지심일까? 아니 열등감?"


오늘의 출제 포인트-feat. 유진

다의어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의어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중심적 의미와 거기에서 확장된 주변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예를 들어 '손'의 중심적 의미는 당연히 신체의 일부인 '손'이겠지? 여기에서 확장되어 '손이 부족하다'나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에서처럼 '손'의 주변적 의미들이 나타난 거라고 할 수 있어. 그럼 동음이의어는 뭐냐고? 다의어는 이런 의미들이 서로 연관성이 있어야 하지만, 동음이의어는 말 그대로 그냥 우연히 소리만 같을 뿐, 의미적 연관성 없이 뜻이 다른 경우에 해당돼. 예를 들어 3학년 1반의 '한유진'과 이름이 같은 3학년 3반의 '한유진'이라고나 할까?

근데 갑자기 이런 얘길 왜 하냐고?

문득 '다의어'에 관한 문제를 보고 있는데, 민지가 서준과 자신의 배경을 비교하는 문제가 떠오르더라고. 사실 중심적 의미에 해당하는 건 민지와 서준 그 자체 아니야? 거기서 가족은 자신과 연관된 확장된 의미라고 한다면 주변적 의미에 해당하는 거고.

그러니까 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중심적 의미인 '나' 자신에게 집중하자고!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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