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요즘 유진의 머릿속 고민의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다. 고백하자면, 이제야 유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보다 어릴 때의 유진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야말로 우연을 운명이라 믿으며 살았다.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포함하여 배우자에 대한 자신의 선호 대상을 명확히 밝히는 친구들을 볼 때면 속으로 ‘속물’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다양한 해학적 기법을 동원해가며 그런 속물들에 대해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반려자를 찾는 일에 티가 날 정도로 적극성을 띄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학습된 거부 반응이었을까? 아니면 부러움? 어쩌면 ‘나는 속물적이지 않아. 나는 너와 달라.’라는 의도를 스리슬쩍 내비치려는 교만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유진은 ‘결혼’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전혀. 그저 자신이 소속된 가족의 형태를 떠올리며 ‘결혼’과 ‘가족’을 연결시켰던 것 같다. 어쩌다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이 ‘꾸려지는’ 것. 그러니까 유진에게 결혼은 피동의 형태였던 것이다. ‘일’이나 ‘공부’를 할 때에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여러 변수까지 고려하여 계획하고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유진이 왜 ‘결혼’ 곧 ‘가족을 꾸리는 일’에 있어서는 이토록 수동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아무리 흥미진진한 서사가 앞부분에 펼쳐지더라도 결말은 항상 ‘그래서 넌 결혼은 언제 할래?’로 끝나 버리는 유진과 엄마의 대화는 슬프게도 긴긴 시간 이어졌다. 이 시간들을 꿋꿋이 버텨냈음에도 유진은 어째서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을 내지 않았을까?
유진은 문득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매우 무책임한 인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을 하기는 해야지, 그런데 누구랑?’ 늘, 여기까지만 생각이 다다랐던 것이다. 유진은 ‘결혼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 혼자 살 것인가, 함께 산다면 누구와 평생을 함께 살 것인가’를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데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지?’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유진은 자신이 무척이나 공정함을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을 당당한 속물이라고 말하는 은수가 내놓는 괜찮은 배우자감에 대한 조건들을 들으면서, 속으로 ‘왜 저렇게 남자한테 기대려고 하지?’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유진은 항상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이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결혼 상대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안정적인 직업과 평범한 외모, 적당한 키에, 보통의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성격은 평온하고 화를 잘 내지 않았으면 함.
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듣던 은수가 때려치우라고 했다. ‘평범, 적당, 보통’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처럼 의사나 변호사 등의 전문직을 만나고 싶다든가, 아니면 5살 연하의 키 180 이상, 머리숱이 풍성하고 피부가 하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은수는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속물이라고 말할 테지만, 대신 자기도 상대방에게 기대고 살지 않을 정도로 자기 계발하고 있다고 말이다.
유진은 은수의 말을 듣고 스스로가 꽤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결혼을 결심한다는 건 일단은 평생 함께 하려는 마음을 먹는 일인데, 왜 우연히 쿵 부닥친 사람과 어찌어찌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리고 자신과 얼마나 잘 맞는지, 아니, 잘 맞춰갈 수 있는지를 알려면 적어도 이런 고민을 진작에 했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너도 이것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그럼 아예 못 만나는 거 아니야?"
“유진아, 거기에 다 맞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거나, 너를 만나주지 않아.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구체적으로 생각한 한두 가지, 아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맞을 수 있잖아? 그럼 일단 그 한 가지라도 맞는 사람을 만나보라는 거야!”
“아, 그런 거였어?”
“그래, 그리고 여기서 핵심이 뭔 줄 알아?”
"뭔데?"
“일단은 만나보라는 거야. 말만 하지 말고! 그래야 알지, 이 멍충아!”
아직 유진은 확고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결혼’과 ‘나’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이제라도 갖게 되어 다행이라 여겼다. 이러한 고민의 시간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도 우습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리라.
그리고 일주일 후, 유진은 15년 전 첫사랑에게 용기를 내 전화를 걸었다.
#유진과 은수의 통화 기록
"목소리는 기억이 안 나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굵고 진지하더라고. 나보고 주말에 만나자는데?"
"뭐야 뭐야? 잘됐네! 그럼 만나야지!"
"근데, 어색하면 어쩌지?"
"어색하겠지! 잠깐이야! 그리고 너 첫사랑이랑 개그 코드가 맞는다고 했었잖아! 일단 하나는 통과!"
"너랑 얘기했던 그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만나는 거 아니거든!"
"모르지. 근데 아직 결혼 안 한 거 맞지? 여자 친구도 없고?"
"그렇다는데? 아니 근데, 뭐 이상한 거 아니야? 왜 여태 장가를 안 갔대?"
"유진아, 한유진! 남들이 보면 우리도 똑같이 이상하거든?"
"아... 맞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신경림의 '동해바다 -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그날따라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어서 속으로 엄청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어. 생각해보니까 나도 똑같이 행동할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스스로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겐 엄격한 거였더라고. 이 시가 내 못난 마음을 후벼 파서 독서실 같은 일터에서 순간 '악-'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지. 자꾸만 마음을 다잡아도 남의 작은 잘못은 늘 크게 보이고, 나의 큰 잘못은 작게 보이니 큰 일이야.
그리고 삶에 대한 가치관 말인데, 남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먼저 깊이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남의 가치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기 전에 말이야. 결혼을 생각하다가 배우자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