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당당과 오만의 경계에서

서준 이야기 - 안 그런 '척'이 문제

by 히읗
나는 엄마의 저 확신에 찬 눈빛이 싫다.


[22살 신입생 시절]

서준의 집 이야기를 해 보자. 서준의 가족은 S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거쳐 국립대 음대 교수가 된 어머니와 굴지의 D기업 부회장인 아버지, S대를 떨어지고 Y대에 진학하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재수를 했지만 결국 S대를 가지 못하고, 자존심상 Y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K대에 진학한 한 살 터울의 누나, 그리고 3수 끝에 간신히 중하위권이라고 불리는 인서울 대학에 합격한 서준 이렇게 네 식구이다.

서준의 집에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물론 서준을 제외하고.

서준과 함께 살고 있는 엘리트들 중 가장 엘리트 티를 많이 내는 사람은 단연 서준의 엄마다. 물론 엘리트 티를 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서준이 생각하는 엘리트 티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하러 가서 일부러 없을 것이 뻔히 예상되는 고급 와인이 있는지 묻는다든지, 굳이 안 써도 되는 영어 단어를 한국말 속에 어색하게 넣어 사용한다든지, 사람들이 많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갑작스레 생각난 듯, 유명 교수님의 이름을 꺼내며 자신과 친분이 있음을 은근슬쩍 드러낸다든지 하는 행동들이다.

서준은 엄마의 그런 엘리트 티가 싫었다. 그리고 서준은 가족 중 유일하게 엘리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엘리트 티를 내는 것을 받아주는 입장이 어떤 마음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발 좀 우리 가족이 특히 엄마가, 겸손했으면 하고 바랐다.


3수 끝에 합격한 대학에서 민지를 만났다. 민지는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했지만, 그런 평범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따뜻한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것인지 민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서준의 가족은 마치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았다. 가족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주제 중 반 이상은 돈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걸 아주 고급지게 표현했으며 나머지는 다른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누가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더라, 어디로 유학을 갔다더라' 하는 것들 말이다. 반면 민지의 집에서는 제 갈길은 제가 알아서 가자는 주의였고, 주로 밥을 중시하는 분위기인 듯 보였다. 지방 출신인 민지에게 걸려 온 고향 집 엄마의 전화는 늘 '밥은 먹었는지? 추운데 옷은 뜨시게 입고 다니는지?'와 같은 내용이었다.


서준은 민지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 꾸밈없이 순수해 보이는 그녀가 주는 그 안락함은 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지가 더 좋았다.

서준의 엄마가 여자 친구와 함께 보라며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바이올린 연주회 티켓 2장을 서준에게 건넸다. 서준의 엄마는 사실 민지가 궁금했었고, 이걸 핑계로 식사를 한 번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으로 민지를 가족에게 보여 주던 날. 서준은 긴장했다. 엄마 때문이었다.


"오-! 민지씨! 반가워요!"라며 서준의 엄마가 민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시작됐군.'이라고 서준은 생각했다.

또 '여기요'하면 되는 것을 엄마는 굳이 '웨이트리스!'하고 불렀고, 갑자기 화제를 해외여행으로 옮기더니 요즘 승무원들의 영어 발음이 형편없어졌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다행히 식사 시간과 연주회 시작 시간의 간격이 얼마 되지 않아 민지와 함께 식사 자리를 일찍 떠났다.


"와! 근데 너네 엄마 엄청 멋쟁이시다! 우리 엄마랑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구두... 우리 엄마는 허리 아파서 절대 신지 못할 텐데!"


"원래 그런 걸 좋아해. 난 별론데..."


"왜 그래? 그래도 엄마가 비싼 밥도 사주시고, 연주회 티켓도 주시고 감사하지! 그리고 아까 너희 엄마가 걸어 들어오시는데, 마치 중년의 여배우가 레드 카펫 입장하는 줄 알았어. 엄청 당당하시고 멋있는 분 같아!"


서준은 민지가 정말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없는 연주회가 끝나고 민지를 집으로 데려다준 서준은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밖에서는 절대 끼지 않는, 눈이 더 작아 보이는 동그란 안경을 끼고는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고 있었다.

"어, 왔니? 여자 친구가 착해 보이더라!"

"네. 민지가 감사하대요."

"응? 뭘? 연주회? 아니면 식사?"

"하... 둘 다요."

"이 그래?.. 다행이네. 근데 연주회는 많이 어려웠을 텐데, 괜찮았다니?"

"네. 잘 봤대요."


서준은 엄마와 대화가 길어질까 두려워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서준은 엄마와 나눈 이 짧은 대화 속에서도 오만함을 발견했다. 민지는 엄마가 당당하다고 했지만, 사실 엄마는 오만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18살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서준이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은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다. 서준과 같은 반 친구 지호가 학교 뒷길 공터를 발견했다며, 자기는 스쿠터가 있으니 거기에 주차를 몰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스쿠터로 등하교를 하면 엄청나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자랑처럼 말했다. 그리고 서준에게도 오토바이가 있다면 그곳에 주차를 하라고 흘리듯 정보를 준 것이다. 그 후 서준은 고등학생으로서는 상당히 비싼 오토바이를 자신의 용돈을 모아 부모님 몰래 구입했는데, 일주일 후에 용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담임 선생님을 보고는 당황해서 넘어진 것이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뒤에 탄 용수가 다쳤다.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며 울고 불고 난리가 났지만, 다행히 무릎에 찰과상만 입었다. 대학에서 수업을 하다가 연락을 받은 서준의 엄마는 자신의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 천천히 서준의 고등학교로 왔다. 서준의 엄마는 사건의 전말을 다 들은 후 담임 선생님께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호라는 친구가 주차 공간을 불법으로 우리 준이한테 함께 사용하자고 제안한 거네요! 준이가 원동기 면허를 일찍 따긴 했는데, 그 친구는 혹시 원동기 면허는 있나요?"


본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런 말을 담임 선생님과 심각하게 나누더니 엄마는 용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서준은 지호에게는 배신자가 됐고, 용수에게는 가해자가 됐다. 서준에게는 최악의 날이었다.

우울한 날이면 서준은 뭐라도 종이에 끄적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의 일기장에는

'나는 엄마의 저 확신에 찬 눈빛이 싫다.'라고 적었다.


#서준과 민지의 통화 기록

[22살 바이올린 연주회가 끝나고]

"준아, 잘 들어갔어? 오늘 연주회 솔-직히 재미는 없었지만 너희 엄마께 감사하다는 인사 꼭 전해줘."

"응. 방금 들어와서 씻고 누웠어! 나도 사실 재미는 없더라. 난 심지어 중간에 졸았어."

"진짜? 고건 몰랐네."

"티 안 났나 보네. 다행이다."

"암튼, 오늘 살짝 긴장했었는데 너네 엄마의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역시 멋지시더라."

"너무 당당해도 난 좀 그래."

"준아, 엄마에게 사랑 좀 주자!"

"... 그래, 어서 자자."

"응, 굿나잇.'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이직의 시조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위의 시조는 조금 익숙하지? 망해가는 고려를 버리고 조선 건국에 힘쓴 사람들을 비웃는 고려의 유신들에게 항변하는 작품이야. 고결해 보이는 백로의 겉과 속이 다른 점을 콕 찌르는 거지.


그런데 위의 작품처럼 백로가 대놓고 까마귀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안 그런 '척'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22살의 서준은 대놓고 비웃는 자신의 엄마를 미워했지만, 미워하는 대상과 비슷하게 닮기도 하는 법이지. 조금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서른 살이 되어 D기업에 취업한 서준이 취준생들을 보면서 노력은 안 하고 사회 탓만 한다며 마음속으로 비웃었을 때, 자기가 그토록 싫어했던 오만함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우리들 역시 누구나 어느 정도는 백로의 속성이 있지 않을까? 안 그런 '척'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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