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청첩장을 돌려주세요.

은수 이야기 -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게 문제

by 히읗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을까?

[유진, 민지, 은수의 단골 곱창집]

"민지야, 언제 왔어? 역시 유진이가 제일 늦네!"


"나도 금방 왔어! 유진이도 요 앞이래!"


"얘들아~미안 미안, 아~근데, 혹시 아직 주문 안 했니?"


"으구! 늦게 와 놓고는! 배고프다. 빨리 시키자! 이모!"


"민지는 참, 이모도 없는 게 이모 이모 예쁘게 잘도 한다."


모둠 곱창 4인분으로 시작했다. 오늘은 은수가 5살 연하의 남자 친구를 유진과 민지에게 공식적으로 소개해주면서 청첩장을 돌리기로 한 날이다.


"은수야, 근데 니 남자 친구는 같이 안 왔어?"

민지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어, 안 올 거야!"


"뭐라고? 왜? 바쁘데?"

성격이 급한 유진이 바쁜 것으로 답을 내 버렸는데,


"아니, 헤어졌어. 그래서 회사 사람들한테 뿌린 청첩장도 오늘 싹 다시 회수했어!"

라고 은수가 대답했다.


"곱창 나왔습니다! 잠시만요, 구워드릴게요!"


종업원이 곱창을 굽는 동안, 이 비밀스럽고 진지한 이야기를 차마 이어서 할 수가 없었기에 서로 눈빛만 교환하며 한참을 참았다.


"맛있게 드세요! 먼저 염통부터 드시고, 곱창은 조금 더 익혀서 뒤집으면서 드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지어 염통을 집어 먹지도 못한 채


"어떻게 된 거야?"라고 유진이 물었고,


"일단, 한 잔 하고 얘기하자!"라고 민지가 거들었다.


소주를 한 잔씩 들이켜고, 잘 구워진 염통을 은수가 집어 먹자, 유진과 민지도 그제야 염통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뭔데? 청첩장까지 돌리고 갑자기 왜?"

민지가 염통을 입에 넣자마자, 궁금해 죽겠다는 듯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게 왜? 너가 말한 그 어려운 조건들에 무려 다섯 가지나 부합하는데, 뭐 때문에 헤어진 건데?"

유진은 얼마 전에도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아무렇게 말하거나 비아냥거리지 않기로 해 놓고 습관처럼 '무려 다섯 가지나'라는 표현이 툭 튀어나왔다. '아차차..'


"음, 심플하게 말하면,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겠더라고!"


"설마 너 현승호 말하는 거야?" 민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승호? 은수 회사 팀장 말하는 거지?" 유진은 손으로는 계속 곱창을 뒤집으며, 대화에 집중했다.


"응.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막상 결혼 날짜를 잡고 청첩장까지 돌려놓고도, 찝찝하더라고 마음이. 처음에는 5살 연하의 예비 신랑한테 가장 많이 찝찝했고, 그리고 현승호한테 찝찝하더라고. 그런데 결정타는 나한테 찝찝해서 내가 못하겠다고 했어."

은수는 담담했다. 은수답게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니 예비 신랑은? 아니 전 예비 신랑이라고 해야 하나? 걔는 그러자니까 알았대?"

유진은 은수의 말을 듣고 이미 결정을 하고 실행에 다 옮긴 후에 친구들에게 통보하는 것임을 알았다.


"하... 은수야, 넌 내 친구지만... 배신자야."

배신의 상처를 갖고 있는 민지가 착한 말투로 정직하게 팩트를 날렸다.


"알아, 나도. 근데 만약에 내가 그냥 결혼을 추진했다면, 나는 모두에게 배신자가 될 뻔했지. 나 자신한테까지도. 그래서 말인데, 나 결혼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근데 연애는 할 거다! 나 하나만 책임지고 잘 살기로 했어!"


"그래, 넌 이미 지금도 너를 잘 책임지고 잘 살고 있어! 충분해!"

유진은 곱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근데, 너 혹시 현승호랑 잘 되고 싶어서 그래?"

의심이 많아진 민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니 전혀. 현승호가 씻을 수 없는 아픔이 있는 사람이고, 보기와 달리 참 안된 사람이라서 자꾸만 신경이 쓰인 건 맞아. 그래서 한때는 무슨 치정극의 여자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의 아픔을 씻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착각도 했었지. 근데 현승호는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보다는 자기 자신이 본인을 더 잘 챙기겠지. 그리고 나도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모든 걸 리셋한 채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거야. 결혼을 취소한 건, 미안한 감정이 있는 상대방에게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솔직히 사랑하는 마음보다 조건을 더 본 게 맞기도 하고 말이야!"


"뭐지? 나한테 결혼 상대의 조건을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장은수 맞나? 동일 인물 맞나요?"

유진이 드디어 곱창에서 시선을 떼고 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결혼을 한다면 조건을 볼 거야! 하지만 결혼을 안 하기로 마음먹으니까 그 조건이 별로 필요가 없어졌어! 아,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내 스타일 알지?"

파혼을 했다고는 꿈에도 상상 못 할 정도로 은수는 씩씩했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서 굳이, 내가 준 청첩장을 다시 돌려달라고 해서 다 받아왔지. 리셋이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어느 날 문득 내 청첩장을 화장실 휴지통 같은 곳에서 발견하고 싶지는 않거든."


"현승호한테도 다시 달라고 했어?" 민지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현승호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몇 분 가량 바라보더니 내 청첩장을 주더라. 어쩌면 현승호도 내가 청첩장을 회수하는 것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르겠네!"


"잘 됐네! 복수다! 현승호도 애매하게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근데 너, 진짜 결혼은 안 할 거야? 그럼 요즘 많이들 한다는 그 비혼주의자인거야?" 유진이 통쾌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뭐, 지금은 비혼주의자지! 앞으론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은수가 대답을 하고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주기로 한 날 회사에서 받은 청첩장을 회수해 종이백에 담아온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청첩장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가 완벽하게 처리할 것이라 말했다. 적어도 전 예비 신랑의 이름과 그와 자신의 부모님 이름이 적혀 있는 그 청첩장이 길바닥에 뒹굴어 다니지는 않게 하는 것이 마지막 예의라면서 말이다.


"근데 그거 알아? 정우 오빠도 비혼주의자였대."

유진이 마지막은 대창을 2인분 시키고, 볶음밥은 1인분만 먹자고 말함과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뭐? 비혼주의자? 너는 그럼 어떻게? 넌 결혼할 거잖아?" 은수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닌데, 걱정하고 있었다.


"응. 난 할 거야, 결혼! 언제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근데, 우리 대창시켰나?" 대창은 곱창이 끊기기 전에 이어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유진이 대답했다.


"비혼주의자였다는 거야? 아니면 지금도 비혼주의자라는 거야??" 예리한 민지가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서 물었다.


"음, 나는 비혼주의자'였'다로 들었는데, 더 묻진 않았어. 아직은 모르지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여기요! 저희 대창 2인분 추가요!"


#은수와 승호의 통화 기록

"여보세요? 전화하셨었네요? 팀장님?"

"아... 궁금한 게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음... 혹시 나 때문이야?"

"네? 뭐가요?"

"청첩장 말이야. 다시 달라고 한 거."

"음... 그냥 여러 가지 때문이에요."

"여러 가지 속에 나도 포함이 되나 해서."

"근데요, 팀장님. 개인들이 하는 선택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요. 누구 때문이고, 누구 탓이고 그런 건 다 자기를 배제하고 하는 말들 아닌가요? 저 때문이에요. 청첩장 회수는!"

" 아.. 그렇구나. 그냥 궁금했는데, 물어보질 못하겠더라고."

"네. 잘 물어보셨어요. 그리고 팀장님! 팀장님도 조금 더 편하게 사셔도 될 것 같아요! 조금만 내려놓고요!"

"그래, 고맙다."

"넵! 그럼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나희덕의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 시를 보고, 은수가 현승호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은수는 어쩌면 현승호가 가진 여러 겹의 마음을 오랜 시간이 걸려 읽었을 테고, 그 외로움이 안쓰러웠을 거야.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도 아팠을 거고.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이라는 시간 속에서 특별한 인연을 맺고 살아가잖아. 그게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꼭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관계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고, 편안했으면 하고 서로가 바라며 살아가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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