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거짓말은 네가 원해서 하는 거고

민지 이야기 - 피동형 인간이 문제

by 히읗
결혼을 하게 됐다고?

민지가 대학에서 처음 만나 사귄 준은 사회인이 되자 트레이닝복만 입고 데이트를 나오는 취준생 민지 대신

생로랑 백을 든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서른 살 민지의 취준생 시절]

민지는 은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 전까지 서준과의 이별을 잠시 떨어져 지내봄으로써 서로의 소중함을 알아보는 유치하지만, 오래된 연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해본다는 '우리 시간을 좀 갖자.' 정도의 의미로 여겼다.


"야 서준 여자 생겼대."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도 카톡했는데, 그리고 어제는 내 생일이라 독서실 앞에 찾아와서 케이크까지 사다 주고 갔거든!"


"야, 서준 그 여자애랑 제주도 여행까지 가기로 했다드라!"


민지는 그날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독서실 옥상에서 전화를 받았. 은수는 서준의 새로운 여자 친구 대해 굳이 곁들이지 않아도 되는 외양 묘사까지 해가며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키가 크다고 하는 서준의 새로운 여자 친구 소식을 은수에게 전해 들은 민지는 전화를 끊고 혼자서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몇 줄기 눈물까지 흘렸다. 옥상에는 담배를 피우러 나온 공시생 두 명이 각각 옥상의 모서리 중 두 칸을 차지하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민지는 행여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킬세라 양 손으로 어깨 끝을 잡고 크게 두 번 돌려 스트레칭을 하면서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S기업 인적성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건만, 그날은 도저히 독서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독서실에서 짐을 대충 챙겨 나오며, 분명 두 달 전 헤어졌지만 방금 전까지도 하트 눈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내온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민지야. 너 공부할 시간 아니야?"


"고, 너 혹시 여자 친구 생겼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니 친구가 술 먹다 은수한테 전화해서 다 말했대. 아?'


민지 대학교 4학년 때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준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둘 다 삼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했다는 동질감을 공유하며 풋풋한 사랑으로 발전했다. 둘은 6년 동안이나 연애를 이어나가면서도 큰 싸움 한 번 안 했다. 그리고 오래된 연의 밋밋함을 달래기 위해서 종종 친구들을 동반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서준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예쁜 여자만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대는 용수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은수에게 술만 먹었다 하면 전화를 해댔다. 민지와 서준이 헤어진 후에도 그들의 만남 , 아니 용수의 일방적인 연락은 지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니가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야..."


"! 너 그 애랑 제주도도 가기로 했다며! 나 다 들었다고! 너 대체 뭐야? 내가 너를 6년 동안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 할머니 간장게장 집에도 데려가지 왜? "


민지는 흥분된 어조로 맥락과 맞지 않는 내용을 마구잡이로 이어 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거야.'라는 전가 깔려 있었다.


"그냥, 너 말고 다른 사람도 궁금했어."


"뭐? 다른 사람도?.... 너 진짜 쓰레다!"


민지는 차라리 다른 사람'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궁금했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깔끔했겠다고 생각했다.


민지는 호흡이 가빠왔다. 실 서준에게 '쓰레기'고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반성을 하고 앉아 있는 자신이 미웠다.


그리고 민지는 그동안 서준의 말을 믿고 싶어 믿은 것일 뿐 그이 거짓말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연애를 할 때 서준은 클럽을 밥 먹듯 다녔는데 늘 순진한 표정과 말투로 자신이 아닌 친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클럽이라는 공간에서는 결코 잘못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으며 단순히 노래를 크게 듣고 오는 것이라고 착한 얼굴을 하고는 민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서준이 취업을 한 후부터는 민지에게 지속적으로 사회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며 요즘 마음이 힘들다고, 하지만 네가 싫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그래서 잠시 떨어져 지내보자고 했던 것이다. 민지가 그것이 이별을 의미하는 거냐고 묻자, 서준은 어떤 의도인지는 너도 잘 알 거라며 굳이 말하자면 이별이라고 해 두자고 말했었다.


민지가 대체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자 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가 상처 받는 게 싫었어."


민지는 전화를 끊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귀로 직접 들어야 마음이 정리될 것만 같았다.

다음날 민지는 서준에게 그의 집 앞 레스토랑으로 오후 1시까지 나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답장은 없었지만 민지는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치마를 꺼내 입고 어색하게 두 눈두덩이에 쉐도우까지 칠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마스카라로 속눈썹에 힘을 주고 너무 튀지 않는 립글로스를 바르고 마지막으로 두 볼에 볼터치를 살짝 찍어 발랐다.

그리고는 이런 꾸밈이 이내 부끄러웠던 듯, 다시 세수를 하고 나와서 자주 입던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민지가 살고 있는 혜화동에 서준의 집이 있는 서초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


정성 있는 사과를 하면 몇 번을 튕기다 받아줘야 하나?

오해일까? 혹시 내가 뭘 잘못 알았을까?

아니다 일단 변명이라도 들어나 보자.


오후 1시가 넘었고 2시도 넘었다.

2시 반이 넘어서야 문자를 지금 봤다며 아직 레스토랑에 있다면 나가겠다는 서준의 답장이 왔다.


그가 예전 같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운동화로 바닥을 끌듯 느리게 걸어왔다.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난 서준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늘 행동이 느렸다. 항상 민첩하게 행동해야 하나라도 더 얻어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민지와 다른 점이었다.


서준이 보였다.

민지를 보면 잇몸이 드러나게 웃어주던 그 미소는 없었다. 레스토랑 테이블에 민지와 서준이 마주 앉았다. 당황스럽게도 서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민지가 먼저 입을 뗐다.


"진짜구나? 근데 나한텐 왜 그랬어? 매일 연락은 왜 하고 케이크는 다 뭐야?"


서준은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민지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참 신기하네 넌 참 매사에 느렸는데, 이럴 땐 참 빠르다. 어떻게 헤어진 지 두 달도 안됐는데..."


민지 특유의 방어적 비아냥거림 울컥하는 호흡이 목구멍 막아 끝이 다.

그러자 준이 드디어 을 열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근데 너가 상처 받는 게 두려서 그랬어."


그래, 여기까지만 했어도 서준의 의도를 민지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서준은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2개월이면 짧은 거고 뭐 2년 후면 충분한 거야?"


그랬다. 민지와 서준은 이미 헤어 사이였고,

민지는 그에게 따져 물을 자격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따위는 서로 꺼내지 않았다.

섭섭함과 슬픔은 오로지 각자의 몫이었니까.


그래도, 그렇다 하더라도

거짓말은,

상대방을 위해서 한 그 거짓말라는 거짓말까지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그들은 정말 끝 났다.


#민지와 유진의 통화 기록

[서른다섯의 어느 봄날 저녁]

"결혼을 하게 됐다고 갑자기 서준한테 전화가 왔어. 근데 난 그게 참 묘하더라. 잊고 산 지 오래였는데, 정신없이 살다 보니 뭐 반갑기까지 하더라고."

"니가 미쳤구나."

" 맞아. 나 좀 이상해졌지? 근데 서준이 너무 형편없어 거야. 씁쓸하게. 내가 미웠대. 어딜 가도 내가 겹쳐졌다나? 뭘 그런 말까지 해? 러면서 기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금 여친이 결혼을 너무 원고, 더 이 싸우기 싫어서 결혼 하게 됐다고 하는 거야."

"걔도 여전히 제정신은 아니네."

"근데, 하필 '하게 됐다'가 뭐야? '-게 되다'가 피동형 맞지? 치 어쩔 수 없이 결혼식장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처럼 자기 결혼 소식을 전 여친인 나한테 려주는 이유가 뭘까?"

"아니, 뭐 축의금이라도 내라고?"

"아니면 그것조차 나를 위한 거짓말일까?"

"민지야,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자."

"알지. 알지. 하... 난 그래도 내 추억이니까 좋게 기억하고 싶었거든. 근데 이제는 그냥 싫더라고."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국어의 피동 표현

피동 표현은 주어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동작을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해. 즉 행위를 한 주체의 의지는 약화시키고 동작을 당한 대상을 앞으로 내세우는 거지. 예를 들어 '아이고, 제가 화분을 깼어요!'가 아니라 '아이고, 화분이 깨졌네.'처럼 행위자를 숨긴 채 피동 표현을 쓸 수 있어.


사람들이 은연중에 피동사나 '-어지다' 혹은 '-게 되다'가 붙은 피동 표현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든.


아마도 관계의 책임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두고 싶은 욕망

우리를 자꾸 피동형 인간으로 만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헤어지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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