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자기 방어와 비겁함은 한 끗 차이

은수 이야기 - 중의적 표현이 문제

by 히읗


우리 지금 만나고 있는 거잖아.

"아니 언제 이렇게 비밀 연애를 했대?"

"뭐야? 청첩장 실화야? 은수 씨?"


며칠 전 은수는 영업팀 사람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같은 팀에 둘도 없이 친한 척을 했던 효정에게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은수였다. 하긴, 심지어 민지와 유진에게도 남자 친구의 존재 정도만 흘렸을 뿐 이름, 나이, 직업 등등등의 배경 지식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삼갔다.




[3개월 전 은수의 회사 회식 자리]


"그거 들었어요? 장 과장이 나 좋아해서 따라다닌다는 소문?"


1,2차에서 소주 2병 반 정도를 마셨고, 이제 막 맥주 500cc를 들이켠 현 팀장(현승호)의 말이었다. 시간은 평일 새벽 2시 반을 지나고 있었고, 거의 막바지라 손님이 거의 없는 3차 맥줏집이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 남은 멤버는 은수와 현 팀장을 포함해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박 차장과 은수를 잘 따르던 김대리 총 4명뿐이었다.

외국에서 어학 연수나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쟁쟁한 경쟁을 뚫고 굴지의 외국계 제약 회사에 입사한 은수는 몇 안 되는 순수 국내파였다. 영업팀에 배정받은 은수는 눈에 띄게 일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다른 동기들보다 빠르게 대리로 승진을 하더니 곧이어 과장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빠르기만 했을 뿐 연차가 쌓여도 계속해서 만년 과장을 면치 못했다.


"하이고, 우리 현 팀장 술이 많이 취하셨는가 보네! 그런 소문이 도대체 어딨다 그래? 요깄나? 아님 조깄나?" 하며 테이블 위아래를 들추는 시늉을 하는 경영지원팀 박 차장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현 팀장의 말을 무마하려 애썼다.


은수는 현 팀장의 헛소리를 듣고 얼음기가 가시지 않아 성애가 하얗게 낀 맥주잔을 집어 입술에 대다 말고 탁자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예상치 못한 황당함으로 인해 아래턱이 살짝 더 앞으로 나온 채로 입이 벌어진 은수가 현 팀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김대리는 만취 상태였는지 은수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현 팀장을 거들었다.


"어라? 장 과장님이 현 팀장님을요? 어쩐지- 장 과장님이 승승장구하더라."


은수가 고개를 돌려 이미 초점이 없어진 김대리를 노려봤다.


"아니, 사람들이 자꾸 나랑 장 과장 관계를 의심하는데, 진짜 웃기지 않아? 뭐, 별 그런 소문이 다 나냐? 안 그래?"


"그 장 과장이 저를 지칭하시는 건가요? 제가, 그것도 좋아서 따라다닌다고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던 은수가 다소 큰 목소리로 '제가'와 '따라다닌다고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술집에 사람이 없어서 은수의 말이 더 크게 울렸다. 은수는 현 팀장을 노려보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똑똑 흘리는 수준이 아니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힘이 들어간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계속해서 두 볼로 흘러내렸다.


사실 현 팀장은 은수가 입사한 후부터 일을 핑계로 업무 시간 외에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자주 했다. 주말에도 출근을 할 수밖에 없이 은수에게 업무를 치우치게 배분하는가 하면, 은수의 집 근처를 지나가며 괜히 불러내 일 이야기를 하고 가기도 했다. 똑 부러진 은수는 결코 누가 부른다고 해서 업무 시간도 아닌 개인적인 시간에 '홍홍'하고 나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은수가 쉬워서가 아니라 현 팀장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응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단코 은수가 먼저 현 팀장을 불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5개월 전 은수의 집 앞 포장마차]

현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은수의 집 근처에 업무 차 왔다가 일이 지금 끝났다며 국수나 한 그릇 같이 할 수 있냐고 했다. 은수는 야식까지 시켜먹은 상태였지만, 자기도 마침 출출했던 참이었다고 거짓말을 한 후 20분 정도만 차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날이 쌀쌀했으므로 현 팀장이 걱정되면서도 래도 화장은 좀 하고 싶었다. 그때 은수는 현 팀장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국수를 먹으면서 현 팀장은 소주를, 은수는 맥주를 마셨다. 포장마차를 나와 은수가 날이 춥다고 하자 현 팀장은 은수의 손을 잡아 자기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서른 중 후반의 남녀였지만 부끄러운 기색이 양볼로 나타났다. 은수도 손을 빼지 않았다. 현 팀장은 술 때문인지 은수의 때문인지 발개진 얼굴을 하고는 날이 추운데 너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은수의 집 앞에 다다르자, 제는 그다지 젊지도 않은 두 성인 남녀가 꽃다운 19살처럼 수줍게 키스를 하고 헤어졌다. 은수로서는 결코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똑 부러진 은수는 그날 밤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그들의 관계를 비밀로 해야 할까 아니며 당당하게 공개로 해야 할까 고민하며 핸드폰만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잘 들어왔다는 현 팀장의 메시지가 왔다. 그게 다였다.


다음 날 회사에서 현 팀장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심각해 보였고, 조금 더 딱딱하게 은수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그리고 어제의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은수는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했고, 퇴근 후 처음으로 먼저 현 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 은수: 팀장님, 어제 많이 취하셨나요?

- 현 팀장: 어. 어제 많이 먹었나 봐.

- 은수: 아... 속은 괜찮으세요?

- 현 팀장: 응, 장 과장도 좀 괜찮나?

- 은수: 네 저야 뭐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요.

- 은수: 근데 팀장님 어제 혹시 기억 안 나세요?

- 현 팀장: 아니? 왜?

- 은수: 저는 근데...

- 은수: 명확한 게 좋거든요.

- 은수: 저희 이제 무슨 사이예요?


- 현 팀장: 이런 건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는데, 오늘은 내가 좀 상태가 안 좋은데 내일 괜찮아?

- 은수: 네. 그럼 내일 퇴근 후에 봬요.


다음 날에도 현 팀장은 어두워 보였다. 은수는 그럼에도 기다 아니다 확실한 편이 자신을 위해서 낫겠다 싶었기에 구체적인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현 팀장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긴 현 팀장이 약속을 다시 다음 날로 미뤘고, 그렇게 약속은 일주일이 밀렸다.


드디어, 그 바쁜 시간이 지나고 은수에게 시간을 내준 현 팀장은 그날도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났을 때 나타나서는 시간을 쪼개 겨우 왔다고 말했다.


"네. 팀장님 바쁘시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죠?"


"응? 우리 지금 만나고 있는 거잖아."


"만나고 있다고요?"


"하... 장 과장도 회사에 일 터진 거 알지? 그거 처리하느라 어제도 3시간을 못 잤어. 그리고 이건 장 과장한테까지 말할 순 없지만, 개인적인 일까지 생겨서 아주 미칠 지경이야... 사는 거 참 힘들다..."


은수는 거기에 대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작 손을 잡고 키스 한 번 했다고 무슨 사이냐고 달달 볶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힘들다는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 은수는 그게 아무렇지가 않은 게 아니었다. 은수는 자기와는 다른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현 팀장이 미웠지만, 그냥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우리 지금 만나고 있는 거잖아.'의 의미가 뭘까를 곱씹어 생각했다.


그 이후 현 팀장과 은수는 철저하게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참 지난 뒤의 회식 자리에서 현 팀장이 은수의 뒤통수를 저렇게 또 세게 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현재]

어쩌면 뒤통수를 맞은 건 은수가 아니라 현 팀장이었을지 모른다. 은수는 1년 넘게 만난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 친구가 있었고, 오늘 팀원들에게 그와의 결혼 소식이 담긴 청첩장을 돌린 것이다.


#은수와 민지의 통화 기록

"야, 너 뭐야? 오늘 회사에 청첩장 돌렸다며?"

"미안, 너네한테도 확신이 서면 다 얘기하려고 했어. 나는 너희들도 아는 당당한 속물이잖아? 학벌, 집안, 외모, 직업 모두 내가 만족하는 사람이야. 심지어 나이까지 나보다 5살이나 어려. 나란 여자 놀랍지 않니? 청첩장은 유진이랑 같이 만나서 줄게. "

"그래, 축하해. 아주 잘 골랐겠지 뭐, 똑순이니까."

"근데 민지야, 나 사실은...

진심으로 현 팀장이 걸렸어. 그래서 망설였고. 웃기겠지만 현 팀장 나한테 진심이었어. 그걸 알았거든. 그래서 그때는 그래, 이 진상이 내 손 잡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쪽으로 가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말야. 근데 결국은 안 잡고 밀어내더라고."

"은수야, 나는 배신을 당해봐서 그런가, 니가 내 친구지만, 누구도 배신 안 했음 좋겠어. 그리고 할 거라면 확실히 해줘!"

"배신은 안 할 거야. 그런데 그냥 인간 현승호를 봤을 때, 그렇게 밀어내는 게 나는 또 더 걸리더라고. 그게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거든. 항상 방어적 자세로 살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회식에서도 나는 알았지. 이 사람이 취하지 않았구나. 나를 밀어내려고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다 알았어."

"하.. 모르겠다. 너는 그냥 너 행복만 생각해!"

"오키, 토요일 곱창집 콜? 그럼 그때 봐!"


#오늘의 출제 포인트 feat. 유진

중의적 표현

국어의 표현 중에는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이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꽤 있어.

예를 들어 '오늘 예쁜 유진의 동생을 만났다.'라고 하면 예쁜 게 나야? 내 동생이야? 난 나라고 믿어.

또 '현 팀장이 은수와 나를 불렀다.'라고 하면 현 팀장이 [은수와 나]를 부른 걸까? 아니면 [현 팀장이 은수와] 나를 부른 걸까?

이럴 땐 '오늘 유진의 예쁜 동생을 만났다.'처럼 어순을 바꿔주거나, '현 팀장이 은수와 함께, 나를 불렀다.'와 같이 부사어나 쉼표를 넣어주면 중의성은 사라져. 물론, 실제 대화에서는 상황 맥락이 주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상대방이 이런 중의적 표현을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마법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지!


문제는 관계에서의 약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다음 대화를 보자.


A: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B: 우리 지금 만나고 있잖아.


여기서는 B가 사용한 '-고 있다'에 의해 중의성이 발생하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만나고 있다'라고 하면 그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사귀는 사이라는 의미일까?


사람들은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 외에도 책임 소재를 회피하기 위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 네가 그렇게 이해한 거지 내 책임은 없다는 거야. 자기 방어적 경향이 뚜렷한 사람들이 종종 이런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약, 어떤 사람이 사용한 중의적 표현에서 '비겁함'을 발견했다면, 당장 그만 두자! 과도한 자기 방어는 쉽게 비겁해질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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