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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30. 2024

내 삶의 숙제, 나를 깨뜨리는 글쓰기

일상기록

글자를 몇 살 때부터 읽고 쓸 줄 알았는지, ‘글’이라는 것을 언제부터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다섯 살쯤 되던 때에 엄마 아빠가 내 공책을 발견하고 주위에 여기저기 알리며 자랑하시던 일은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책에 서툰 동시들을 끼적거리며 놀았고, 그런 공책이 두세 권 정도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나는 동시를 쓰지 않았고, 동시 공책들은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글을 잘 쓴다고 칭찬받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부산에서 여수로 이사를 온 후 엄마는 나와 언니, 동생을 바닷가에 데려갔다. 잔잔하면서도 탐스러운 남해바다와 그 위를 노니는 보석 같은 햇살에 넋을 잃은 나는 집에 오자마자 내가 본 것들을 일기에 적었다. 담임선생님은 내 일기를 다른 선생님들과 돌려 보더니 “너 글을 참 잘 쓰는구나”라고 말한 후 어느 선생님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 선생님은 지역에서 곧 열리게 될 글짓기 대회 담당이었고, 나는 그날부터 6학년 언니 두셋과 함께 매일 방과 후에 선생님의 지도하에 글쓰기 연습을 해야 했다.


난생 처음 나간 글짓기 대회의 주제는 ‘저금통’이었다. 그 세 글자 앞에 나는 막막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빨간 칠이 되어 있고 등에는 가늘고 긴 구멍이 뚫린 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는, 어른 주먹만한 돼지가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던 돼지는 그간의 푸대접에 복수하듯 나에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나는 두 시간 내내 끙끙대다가 간신히 동시 두 편을 썼고, 그중 하나를 골라 원고지에 적어 냈다. 담당 선생님은 다른 동시가 더 낫다며, 왜 그걸 안 냈냐고 성화였지만 나는 아무 상관 없었다. 어차피 두 편 다 거짓말이었다. ‘엄마가 준 용돈으로 배가 부른 분홍색 토끼 저금통’ 같은 건 세상에 없었다.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첫 글짓기 대회는 그렇게 끝났지만 나는 그 뒤로도 크고 작은 글짓기 대회에 자주 참가했다. 대회 참가 경력이 늘어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큰 상을 받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지만 나는 매번 중간 이하의 상만 받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은 꾸준히 이어졌다. 억울하고 속상해도 말을 할 수 없는 집안 분위기 탓에 답답한 마음을 글로 자주 풀게 되니 무슨 주제를 주어도 글쓰기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제법 읽을 만한 글을 쉽게 써내는 나 자신에게 차차 도취하였다. 글짓기 대회에서 탈락하거나 변변찮은 상을 받으면 ‘심사위원들이 뭘 몰라서 그래’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집에도 학교에도 기댈 수 없었던 10대 시절, 글쓰기와 책은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당연히 대학도 국문과나 영문과를 원했지만 아빠는 내가 갈 대학과 학과를 정해놓고 거기가 아니면 서울에 못 간다고 하였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을 40년 넘게 살다가 마침내 내 의지로 고른 것이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였다.


하지만 입학 동기는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글을 꾸준히 써왔던 나는 내 글에 꽤 자신이 있었고, 그 자신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문예창작학과를 고른 것이다. 사이버대학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나는 수업도 대충 들었고, 교수들은 내 글에 감탄만 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걷다 보니 배우려고도, 성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오만한 여자가 홀로 있었다. 내가 만든 견고한 벽에 이제야 작은 틈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가운데 햇살은 아름답고 눈부시다. 그러니 조금씩 틈을 넓혀 보기로 할까.


※ 세사대 문창과 '글쓰기의 이해' 기말과제 제출 작품입니다.(고수리 교수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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