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 치열한 정치판의 예술가
신고전주의는 혁명의 시대에 탄생했다. 이전까지 전 유럽에 유행했던 로코코 양식은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귀족들의 예술이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와 맞지 않았다. 새로운 예술이 필요했다.
신고전주의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 ~ 1825)는 혁명의 시대에 프랑스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새로운 미술을 정립했다. 그의 예술은 고전주의를 표방했지만 이전까지의 고전주의와는 결이 달랐다. 신고전주의는 보다 장엄하고 엄격했으며 감성적이었다. 혁명의 최전선에서 때로는 혁명을 이끄는 선전물이 되었고, 때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던 다비드의 작품을 만나보자.
“우리는 누구든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에 대해 국가에 보답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매우 정치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여기서 그가 봉사하려는 국가는 사치하고 타락한 귀족의 나라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시민들의 공화국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그림 소재를 엄격하게 골랐다.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그림 1]는 다비드가 이루고 싶은 혁명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고대 로마는 인근에 있는 알바롱가 지역과 오랫동안 전쟁 중이었다. 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두 도시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각 도시를 대표하는 3명의 장수들을 뽑아 결투를 하여 승패를 가리기로 합의를 한다. 이때 로마를 대표하여 나선 사람들이 호라티우스 형제들이다.
둥근 로마식 아치 뒤편은 어둠에 싸여있고, 사건은 전면에서 벌어진다. 아치와 기둥은 전면과 후면을 가르는 동시에 화면을 셋으로 분할한다. 맹세를 하는 형제들의 공간, 칼을 들고 맹세를 받는 아버지의 공간, 그리고 슬픔에 빠져 흐느끼는 여인들의 공간이 그것이다. 빛은 고귀한 희생을 각오한 형제들이 있는 왼쪽에서 들어온다.
이 그림에 관람자를 미소 짓게 하는 세부는 하나도 없다. 날이 선 창과 그림자 마저 엄숙하고 비장하다. 이전까지의 고전주의는 이렇게 엄격하고 장엄하지 않았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의 은 역동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안에는 지식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신고전주의에는 이런 밝은 에너지가 없다. 앞서 말했듯 다비드가 고전주의 형식을 불러온 이유는 고전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민들을 애국주의로 고양시키는 교조적이고 도덕적인 그림이 필요했고 분명 성공했다. 이 그림은 매우 고요하지만 직접 싸울 수 없는 노인과 여자가 아니라면 도시를 위해 희생을 결의하라는 메시지가 매우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1789년, 혁명은 성공했고 황제는 단두대 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많은 피가 뿌려졌고 혁명 그룹 내부의 갈등은 연이은 숙청을 불러왔다.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는 급진적인 정치가이자 저널리스트로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매우 강경하게 혁명을 밀어붙였던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그림 2]은 이 혁명가의 최후를 그린 작품이다.
마라는 피부병으로 인해 자주 목욕치료를 받았는데 그 시간조차 아끼려고 욕조에 테이블을 놓고 글을 쓰곤 했다. 그의 공간은 언제나 민중을 향해 열려있었다. 암살자는 그곳으로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마라가 그 편지에 눈을 돌린 사이에 그의 심장을 찔렀다.
처참했을 그 장면을 다비드는 매우 숭고하게 그렸다. 부드러운 색조가 그를 감싸고 주위는 적막한데 욕조의 물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암살 현장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고, 희생자는 마치 <피에타>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 팔을 늘어뜨린 채 고귀하게 눈을 감고 있다.
역사적 평가가 어떠하든 다비드에게 마라는 친구이자 동지였다. 다비드는 그의 고귀한 인간성에 대해 깊은 공감과 연민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관람자는 숭고한 죽음 앞에서 거대한 침묵에 휩싸인다. 계속되는 처형과 정치적 대립 따위는 이 고귀한 인간의 죽음 앞에 목소리를 잃는다. <마라의 죽음>은 한 혁명가의 모습을 성인으로 변모시키며 혁명 이후 이어진 수많은 비극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가 반대파들에 의해 실각하고 처형되자 그의 동지였던 다비드는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두 번 구금되었다. 그리고 혼란의 열기를 제어할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다비드는 변화된 정치상황에 빠르게 적응하여 황제의 수석화가가 된다.
군인에서 통령을 거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자신이 시민 혁명의 산물임을 잊지 않으며 철저히 특권층의 부활을 막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재력 있는 부르주아지와 지주계급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고 일반 하층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황제가 된 이상 협력자와 위험 세력을 구분하여 지배했다. 분명 균형 잡힌 태도는 아니었으나 나폴레옹은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그런 식으로 봉합하고 통합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제국을 예찬하며 당대의 사건들을 거대한 캔버스에 기록했다. <나폴레옹 대관식>[그림 3]은 다비드가 얼마나 새로운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대관식이란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예식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무릎 꿇지 않고 관을 받아 스스로 자기 머리에 얹었다. 매우 나폴레옹다운 방식이었지만 새로 등극한 황제에게 필요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다비드는 황제의 대관이 아니라 황후의 대관을 그리게 된다. 이미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이 황후에게 관을 수여하고 교황이 한 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는 순간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황제는 그림 중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모습으로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멋진 편집을 통해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대관이 정당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자 황제를 위한 홍보물이 되었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특유의 장엄하고 엄격한 분위기에 과장된 화려함까지 더하여 백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폭이 9m가 넘는 대작은 완성했다. 이 작품은 분명 조작이고, 황제를 향한 예술가의 아부다. 황제는 키가 커졌고, 중년의 황후는 젊고 아름답게 묘사되었고, 대관식에 오지 않았던 황제의 어머니와 형제가 버젓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오직 황제를 위해 그려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는 바대로 나폴레옹은 실각했고, 수많은 피를 뿌리며 몰아냈던 부르봉 왕정이 다시 들어섰다. 나폴레옹의 화가였던 다비드는 설자리를 잃었고 브뤼셀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몇몇 초상화를 제외하면 기교적이고 허식적인 유희일뿐이었다. [그림 4]
다비드는 여느 대가들처럼 뛰어난 말년 작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위대한 그림들은 치열한 정치판에서 현실과 뜨겁게 부딪히고 있을 때 나온 것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는 혁명의 시대에만 발휘되었다. 그는 현실과 부딪히지 않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치열한 현실이 다비드를 이용해 빚어낸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