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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y 12. 2023

고야, “예술에는 규칙이 없다.”

에스파냐의 황무지처럼 거칠고 투우장의 황소처럼 위협적인

프랑스가 진보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대혁명을 향해 갈 때, 종교의 땅 에스파냐에도 미신과 무지, 불합리한 사회를 개선하려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에겐 분명 계몽과 진보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에 불을 지폈던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는 고야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는 피레네 산맥 너머 아라곤 촌구석에서 나고 자란 고야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황량한 에스파냐의 황무지처럼 거칠고 차가웠으며, 투우장의 성난 황소 같이 위협적이면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계몽의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 우글거리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다.      




음울한 풍속화와 이중적인 초상화


가난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고야는 매우 출세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오랜 도전 끝에 왕실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 첫 일감은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 보낼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림의 주제는 시골의 전원생활로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유쾌한 로코코 풍의 밝은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고야도 유행에 따라 그런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림 1. 고야, <허수아비>, 1791-92, 캔버스에 유화, 267 x 160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허수아비>[그림 1]는 언뜻 보면 밝고 유쾌해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야 특유의 음울한 기운이 느껴진다. 여인들이 밝은 야외에서 천을 함께 잡아당기면서 허수아비를 던지며 놀고 있다. 하지만 허수아비의 비틀린 몸은 어딘가 기이하고, 여인들의 웃음에는 비인간적인 분위기가 서려있다. 그들은 왜 하필 사람 형상의 인형을 조롱하며 즐거워하는가? 허공으로 떠오른 허수아비가 바라보는 하늘은 왜 그리 어두운가? 따져 물을 수록 유쾌함은 지워지고 섬뜩함이 드러난다.


독창적인 밑그림으로 명성을 쌓은 고야는 고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인맥을 넓혀 마침내 수석궁정화가가 된다.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그림 2]은 정점 오른 화가의 초상화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림 2.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800~01, Oil on canvas, 280 x 336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참고 그림. 벨라스케스, <시녀들-Las Meninas>(부분), 1656-57, 캔버스에 유채, 318 x 276 cm, Museo del Prado, Madrid


고야는 벨라스케스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이 그림을 <시녀들>[참고 그림]과 비슷한 구도로 제작했다. 화가는 벨라스케스처럼 캔버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왕비는 <시녀들>의 중심에 선 공주와 비슷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화려한 옷, 황제의 가슴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훈장 등 황실 가족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구성은 왕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그림은 면밀히 따져보면 매우 이상한 왕실 초상화이다.


카를로스 4세는 매우 우둔한 왕이었기에 왕비가 왕실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고야는 그런 사실을 공표하듯 그림의 중앙에 왕비를 세웠다. 게다가 왕비는 어린 막내왕자의 손을 잡고 있는데, 이 막내왕자는 왕비가 젊은 장교인 마누엘 고도이와 외도를 통해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야는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는지 왕과 왕비 사이를 떼어 놓고 막내왕자를 끼워 넣었다. 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의 얼굴에는 어리석음과 뻔뻔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또 왕자들과 공주들, 왕의 오른편에 서있는 인척들까지 모두 천박한 허영심으로 가득해 보인다.


이들은 최고 권력자의 가족이지만 전혀 심오하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왕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읽었다. 고야는 위대한 정직함으로 화려한 왕실 가족의 초상 안에 불편한 진실을 새겨 넣었고,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왕실을 조롱거리 만들었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예술에는 규칙이 없다.”


1792년, 고야는 왕립아카데미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규범을 가르쳐야 할 왕립 아카데미에 던져진 이 도발적인 발언은 신성한 예술의 가치를 부정하는 신성모독과 같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말은 예술의 도그마가 깨지는 선언이자 미학적 해방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이후 고야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매우 창조적인 작업들을 이어나갔다. 그의 판화집 [변덕 Los Caprichos]에는 다채로운 주제로 구성된 80점의 동판화가 포함되어 있다. 이 판화집에서 고야는 인간에게 숨겨진 광기와 야만성, 공포와 불안을 참으로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신을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으로 교수형 당한 시신에서 이를 뽑는 여자[그림 4], 야만적인 종교재판[그림 5]과 처형장면, 아기들을 괴롭히는 자웅동체의 마녀들까지 고야가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좌) 그림3. 고야, [변덕] - <이빨 도둑>, 1797-98 / 우)그림4. 고야, [변덕] - <구원은 없다>, Etching and aquatint, 217 x 152 mm


그림 5. 고야, [변덕] -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1797-98, Etching and aquatint, 216 x 152 mm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그림 5]는 이 판화집의 주제를 압축하는 그림이다. 잠들어 있는 지식인의 주변에 덧없는 밤의 동물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식인은 해로운 망상과 허영, 어리석음과 불합리한 세계를 거부하지만 그가 잠든 사이에 어두운 세계는 그를 에워싼다. 이성은 그렇게 위태롭고 불완전하다.


고야는 자신의 작품들이 “다양한 어리석음과 잘못, 그리고 관습이나 무지나 이기심 때문에 묵과되고 있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관한 비판을 위해 제작되었다고 밝혔다. 즉 이 판화집은 욕망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하는 교훈적인 책자였다. 그는 판화집을 출판하며 자신을 화가가 아닌 ‘저자’로 규정했다. 판화집이 기존의 이야기를 해석한  삽화가 아니라 순수 창작물임을 명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위대한 책이 되어 미신과 환영으로 빠져드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계몽시키길 바랐던 것 같다.      




이것이 인간인가?


고야가 왕실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을 때, 왕비와 내연 관계였다고 알려진 마누엘 고도이는 에스파냐 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왕세자 페르난도는 그가 왕권을 탈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했던 왕세자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프랑스 군대를 불러들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이는 매우 어리석은 계획이었다. 군대를 보낸 나폴레옹은 페르난도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호세 1)를 왕위에 앉혔기 때문이다.


졸지에 나라의 왕이 바뀐 에스파냐 사람들은 1808년 5월 2일에 마드리드에서 반기를 들었다. 시민들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과는 뻔했다. 반란은 하루 동안의 소요사태로 끝났고 다음 날 프랑스 군대는 봉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처형했다. 마드리드 외곽에 주둔하고 있었던 에스파냐 군대는 외국 군대가 자기 국민을 죽이는 이 사태에 침묵했다.


그림 6. 고야, <1808년 5월 2일>, 1814, Oil on canvas, 266 x 345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그림 7.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Oil on canvas, 266 x 345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고야는 훗날 이 사건을 기록했다. <1808년 5월 2일>[그림 6]은 놀라운 봉기의 순간을 <1808년 5월 3일>[그림 7]은 밤새도록 총소리가 멎지 않았던 처형의 날을 묘사하고 있다. 5월 3일 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줄지어 서있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 군인들은 무심한 기계처럼 총을 쏜다. 멀리 보이는 불 꺼진 교회는 인간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비참한 현실을 암시한다. 이미 총을 맞은 사람은 정면을 향해 쓰러져 피를 뿌리고 곧 희생될 남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이들은 분명 무고하다.


이날을 시작으로 에스파냐는 전쟁에 휩싸였다. 고야는 1814년까지 이어진 반도전쟁(에스파냐 독립 전쟁)도 그림으로 기록했다. 판화집 [전쟁의 참화]는 길고 긴 살육의 시간 동안 벌어진 참상을 담고 있다. 그는 강열한 장면 하나하나에 짧은 문구를 적어 진실을 알렸다. [그림 8]


그림 8 고야, [전쟁의 참화] - <이것이 더 나쁘다>, 1812-15, Etching and wash, 157 x 207 mm


전쟁의 참혹함을 담은 일련의 그림들 속에 애국심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도륙한 프랑스 군대를 불러들인 사람이 왕이었고, 시민들이 저항하고 죽어가는 동안 에스파냐의 군대는 방관했다. 그런 가운데 고야는 그림을 통해 묻는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게 맞아?” “왜?” “이렇게 되기 위해 태어난 거야?” 그는 많이 화가 난 채로 묻는다. 안타깝게도 이런 질문들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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