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윤숙 May 31. 2023

낭만주의 - 고독한 예술가와 누더기를 입은 영웅

테오도로 제리코와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등장했다. 구체제가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한 개인이 혈통과 상관 없이 탁월한 능력과 카리스마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했다. 더 이상 신성불가침한 영역은 없었다. 혁명의 에너지는 사람들에게 자기 힘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하지만 이내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은 몰락했다. 그럼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희망은 왕정복고로 이어진 반혁명의 시간에도 이어졌다. 낭만주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낭만주의자들은 글자 그대로 감상적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혁명을 꿈꾸었던 신고전주의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형식과 지향점이 달랐다. 낭만주의의 영웅은 혁명가 마라나 알프스 산을 오르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빅토르 위고가 예찬한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도형수 장 발장과 창녀 팡띤느처럼 외적으로 실패했지만 내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낭만주의 예술의 주인공이었다.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테오도로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3~1824)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그림은 어떤 이들에겐 하찮아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고귀함과 성공에 대한 다른 모델을 제시한다.      


그림 1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0, -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이 그림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 좌표를 잃어버리고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영웅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그림 4]은 낭만주의의 선언문과 같은 작품으로 1816년에 있었던 메두사호의 난파 사건을 매우 영웅적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사건은 참혹했다. 식민지 세네갈과 프랑스를 오가는 국영선 메두사 호의 선장은 정부와 인맥이 닿아 뽑힌 실력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몰던 배는 표류했고, 선장과 선원들은 149명에 달하는 승객들은 뗏목에 태우고 자신들은 구호선으로 대피했다. 처음엔 구호선과 뗏목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선원들은 그마저도 끊고 도망쳐 버렸다. 승객들은 뗏목에 의지하여 12일 동안 태양과 파도, 배고픔과 절망을 견뎠는데, 그들이 구조되었을 때 생존자는 오직 15명뿐이었다.


그림 2 테오도로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1818-19, 캔버스에 유채, 491 x 71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제리코는 시체나 잘린 팔다리를 스케치하며 이 사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희생자들의 몸을 이상화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처럼 건장한 인물들은 오랫동안 굶은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각선 구조와 역동적 움직임, 강한 명암대조법 등은 격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건장하고 매끈한 인체는 남루한 이들이 고귀한 존재임을 역설한다.


제리코가 이처럼 난파된 사람들을 영웅적으로 그린 것은 이들이 생존의 한계에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성실히 살아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평선 끝에 보이는 배를 보고 파도로 흔들리는 뗏목 위에서 온 힘을 다해 구호 요청을 한다. 하지만 배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희망과 절망이 오가는 순간, 불안정한 뗏목 위에서 인간은 최선을 다한다. 제리코에게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빈부귀천을 떠나 고귀한 영웅이었다.


제리코는 자신의 그림처럼 낭만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감쌌으며, 메두사 호 사건을 조사할 때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했던지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자신의 안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화가는 안타깝게도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들라크루아, 색채와 열정으로 완성한 낭만주의


그림 3. 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 캔버스에 유채, 189 x 24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배>[그림 5]는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헌사였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와 고전적으로 묘사된 인체 표현이 제리코의 그림을 닮았다.  이 그림은 [신곡]의 한 장면을 담은 것으로 단테의 상상에 들라크루아의 상상이 더해진 산물이었다. 강 건너편은 불길에 휩싸여 있고 하늘은 어두운데, 단테가 타고 있는 배는 매달리는 악령들 때문에 흔들린다. 그럼에도 단테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손을 잡고 저승의 강을 건넌다. 그는 아마도 혼란한 시대를 견디는 예술가의 롤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림 4. 외젠 들르크루아,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 1824, 캔버스에 유채, 419 x 35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들라크루아도 제리코처럼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그림 6]은 그리스 독립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에 관한 것이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뒤 수백 년 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는 1821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키오스 섬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화가는 불타오르는 마을과 학살이 자행되는 벌판, 무심하게 말을 모는 군인, 그리고 무기력하게 쓰러진 희생자들을 작품에 그려 넣었다.


낭만주의의 장점은 공감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고 의지하는 순수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정은 죽은 엄마의 젖가슴을 더듬는 어린 아기를 볼 때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먼 이국땅에서 자행된 학살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이자 연대의 감정이었다.


당시 관람객들은 <키오스 섬에서의 학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두고 거친 붓질이 남아있는 미완성 작품이라고 비난하며 “회화의 학살”이라고 조롱했다. 화가에게 비평가들은 살롱에 등장한 무법자였다.

 

불쌍한 예술가는 그의 작품과 더불어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비평이라는 광기 어린 무기를 가진 그런 사람들의 판정을 기다려야 한다. 일단 그런 비평의 장에 들어서면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 악의로 가득한 필설은 그의 뼈까지 불태워버린다. -외젠 들라크루아


그렇다고 대중을 믿을 수도 없었다. 관중들은 작품과 비평 사이에서 오락거리를 찾을 뿐이다. 화가는 그 속에서 고독해진다. 물론 찬사도 있었다. 보들레르는 “마무리가 된(made) 작품과 완성된(finished) 작품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라고 반박하며 화가가 마무리하지 않는 그 부분이야말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라며 극찬했다.


상상. 그것은 낭만주의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처럼 이성으로 세상을 제단 하지 않았고, 계몽주의처럼 대중을 가르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낭만주의 예술가는 분석과 계몽이 아니라 상상하는 창조자였다.


사실 들라크루아의 거친 붓질은 엄격한 질서를 완성하려 한 신고전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그는 단단한 윤곽과 조각과 같은 매끈한 표현대신 거친 붓질과 다채로운 색을 사용했다. 선명한 색을 위해 팔레트에 물감 짜는 방법부터 달라져야 했기에 그의 팔레트에는 매우 다양한 색깔이 준비되어 있었다. 자신의 붓과 팔레트를 버리지 않고 들라크루아는 대중과 비평가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는 예술가의 이런 면모는 혁명의 결실이자 민주주의적인 미학의 시작이었다. 그의 팔레트가 담고 있었던 다양한 색채는 근대 회화의 혁명이었던 인상주의로 이어졌고, 그가 처음 선보인 고고한 삶의 태도 역시 후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전 03화 고야, “예술에는 규칙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